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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에 초콜릿 향이 가득하다. 딸 아이가 쿠키 반죽에 넣을 다크 초콜릿 커버춰(카카오 원두에서 나온 것들과 설탕만 섞은 진짜 초콜릿)를 잘게 자르는 중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다크 초콜릿이라는 것.

단맛으로 단숨에 입안을 점령하는 밀크 초콜릿은 내게 매력적이지 않다. 첫맛은 쌉싸름 하지만 입안에서 녹아내리며 짜고 시고 쓴 다양한 맛을 전하고는, 깊은 곳에서 옅은 단맛이 올라오는 다크 초콜릿이라면, 언제나 환영이다.

밀가루와 코코아 가루, 아몬드 가루, 분당을 섞은 가루 재료에 아이가 자른 초콜릿 커버춰를 쏟아붓고, 차가운 버터를 넣어 한 덩어리로 만든다. 그걸 손으로 매만져 가늘고 긴 직육면체가 되도록 빚는다. 냉장고에서 차게 굳힌 뒤 얇게 잘라 구울 예정. 밸런타인데이를 위한 초콜릿 쿠키 반죽이다.

초콜릿이 들어가는 디저트를 만들며 딸아이에게 밸런타인데이의 유래에 관해 들려주었다. 전쟁으로 병사들의 결혼을 금지하던 로마 제국 시절 한 신부가 몰래 병사들의 결혼식을 집전해주었다고 한다. 그 신부의 이름이 발렌티누스이고 제국의 금지에 굴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연결해주다 순교한 그를 성인으로 기리는 날이 밸런타인데이라고.

지금도 이날엔 사랑하는 이에게 마음을 전하기 위해 사람들은 선물을 주고받는다. 초콜릿 회사의 마케팅 때문에 그 선물이 초콜릿이 되어버렸지만, 반드시 초콜릿이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딸아이에게 알려 주었다.

그 때문일까. 아이는 밸런타인데이 전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초콜릿을 사 와 비밀스레 포장까지 해두었다. 그날 저녁, 밥을 먹으며 딸아이는 의기양양한 태도로 밸런타인데이 선물을 준비했다며 아빠는 어떤 선물을 준비할 거냐고 남편에게 물었다. 엄마랑 자신은 이미 선물을 계획해 두었는데 아빠는 그런 것도 없다고 재촉하는 투였다.

그 말에 남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매년 선물을 주었는데 기억 못 한다고 답답해하면서. 잠시 후 밸런타인데이마다 꽃을 선물했는데 다 잊었냐고 원망 조로 말했다. 그제야 우리는 "아하!" 하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나와 딸아이는 초콜릿에만 정신이 쏠려 다른 건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겨울 때가 깊어질 수 있는 기회

남편은 해마다 기념일이면 꽃을 들고 온다. 사정으로 한두 번 건너뛴 적도 있지만, 본인이 의식처럼 챙긴 일을 상대가 기억해주지 못해 서운했을 것 같다. 익숙해진 사이 그걸 선물이라 여기지 않았던 걸까. 중요하고 소중한 것 일지라도 반복되어 익숙해지면, 당연해지면 의식에서 잊히기 쉽다.

삶의 어느 지점을 통과하면서부터 새로운 일을 기획하고 시도하는 것보다 해오던 일, 익숙한 것을 기억하고 꾸준히 지속하는 데 더 가치를 두게 되었다. 이제는 전자보다 후자가 더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얼마 전 라디오에서 들었던 이야기도 떠오른다. 무언가를 오래 하면 지겨워지고 번아웃이라는 게 찾아온다고. 그럴 때 직장인들은 이직을 생각하거나 업무를 바꾸는 시도를 한다고. 뒤이어 이에 반문하는 DJ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바꾸는 것만이 답일까요?"

그는 베토벤이나 피카소처럼 오래도록 하나의 일에 매진했던 사람들을 언급했다. 그들에게도 분명 자신의 일이 지겨운 때가 있었을 거라고. 자신이 만드는 음악과 그림에 번아웃을 느끼는 타이밍이 수시로 있었을 거라고.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이 하던 음악과 그림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만두고 바꾸는 대신 계속하면서 자신의 작업에 깊이를 만들었다.

그러니 우리가 무언가에 지겨움을 느끼는 시점이 자신의 일에 깊이를 만들 수 있는 때일지 모른다고 DJ는 전했다. 아무리 해도 나아지지 않는 것 같고 심지어 퇴보하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계속하다 보면 어느새 깊이라는 게 생길 거라고.

관계를 이어가는 일도 그렇지 않을까. 하나의 일을 계속하면 지치는 구간이 등장하듯 한 사람과 오랜 시간 관계를 이어가는 일에도 그런 어려움이 생기기 마련이다. 결혼 17년 차, 서로가 지겹고 미워지는 시기도 없지 않았다.

때로는 날 선 상태로, 때로는 무심하려 애쓰면서 터널 같은 긴 구간을 지나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어느덧 관계의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관계에도 깊이라는 게 생겼을까. 사소한 구석을 기억해주고 스스로가 놓치는 것을 챙겨주면서 서로에게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되어간다. 그러고 보니 이 관계의 풍미야말로 다크 초콜릿 같다.

초콜릿 쿠키 쌉싸름하면서 짜고 신맛, 그리고 쓴맛까지 복합적인 풍미를 지닌 다크 초콜릿은 언제나 환영이다.
초콜릿 쿠키쌉싸름하면서 짜고 신맛, 그리고 쓴맛까지 복합적인 풍미를 지닌 다크 초콜릿은 언제나 환영이다. ⓒ 김현진

다크 초콜릿은 카카오 함량에 따라 70%, 80%로 표기하는데 이 함량이 높을수록 더 쓰고 강렬한 맛을 낸다. 밀크 초콜릿보다 단단하며 다양하고 복잡한 풍미를 지닌다. 때로 풍미 향상을 위해 숙성 과정을 거치고, 유통기간 또한 길다고 알려져 있다.

밀크 초콜릿의 맛은 즉각적으로 전해지는 반면 다크 초콜릿은 더 복잡한 풍미를 지니고 있어 후천적으로 맛을 들여야 한다는 말도 있다. 입안에서 음미하고도 한 단어로 정의 내리기 힘든 다크 초콜릿의 맛처럼, 오래된 관계일수록 때로 더 어렵고 복잡하게 다가온다.

뻔하다고 생각했던 이 관계에도 미지의 영역이 있음을 생각한다.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낯설고, 그래서 어긋나면 한 발 물러나 고민하고 다시금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하나의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관계를 평생 고민할 것 같다. 내가 변하고, 상대가 변하는 만큼 익숙함 속에서도 드넓은 스펙트럼이 펼쳐질 거라고. 좁고도 넓은 깊이라는 걸 이 관계에서 경험할 것이다.

당신이라는 소중한 삶의 증인이 되어주기

밸런타인데이 날, 퇴근해 돌아온 남편의 손에 꽃다발이 들렸다. 전날 미리 포장해두었던 선물을 빨리 주고 싶어 몸이 달았던 아이가 신이 나서 선물을 꺼내 왔다. 나도 아이와 같이 구워 둔 초콜릿 쿠키를 내놓았다. 세 사람이 각자 준비한 선물이 모이자 이미 알고 있던 선물인데도 일순간 하늘 높이 폭죽이라도 쏘아 올린 듯 경쾌한 기운이 집안을 물들였다.

저녁 식탁에는 동죽을 넣은 파스타와 매콤하게 무친 달래와 참나물을 올렸다. 향긋하고 쌉싸름한 봄나물이 입안에서 생명의 기운을 퍼뜨렸다. "해마다 이맘때면 당신이 달래나 냉이, 참나물 무침을 해줬잖아." 남편이 말했다.

삶을 공유한다는 건 서로에 대한 세부 목록을 늘려가는 일이다. 기념일에 꽃을 준비하는 사람, 봄이면 냉이, 달래를 챙기는 사람, 매콤한 무침을 좋아하는 사람과 슴슴한 오일 파스타를 좋아하는 사람, 다크 초콜릿을 좋아하는 사람과 꽈배기를 좋아하는 사람처럼. 시간에 닳아 관계의 모서리는 뭉툭해지더라도 그 안에서 서로의 모서리만은 선명해져 간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초콜릿#관계#밸런타인데이#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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