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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곳에 고조선 시대 사람이 살았대!"

박물관 얘기가 아니다. 우리 집 앞마당처럼 드나들던 도로 옆 작은 공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초등학생도 이해하는 강원도 역사여행(줄여서 초강력)을 시작한 이래 우리 가족은 여러 번 입이 벌어졌다. 지난번에는 양양 오산리 선사유적박물관에서 석기시대 유적을 공부했으니, 이번에는 청동기 시대를 향해 떠날 차례였다.

"고인돌이 공장 단지 안에 있다고? 그것도 발전소 옆에?"

자료 조사 시작부터 충격을 먹었다. 동해시 북평국가공단 옆에 고인돌이 있다고 했다. 나와 아내는 동해시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해서 팔 년을 살았다. 두 아이들도 동해시에서 태어났다. 공단에서 십 분 거리에 살았는데 좀처럼 공장 근처로 갈 일이 없었다. 강릉으로 이사 온 이후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런데 국가유산청 홈페이지에 '구호공원' 내 부곡지석묘(고인돌)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일단 자동차를 몰았다.

 소재지를 보고서 혼란스러웠다.
소재지를 보고서 혼란스러웠다. ⓒ 국가유산청홈페이지갈무리
 아니나 다를까 친절하게 도로 옆 기둥에 '추암동 구분군'이라는 안내판도 달려 있다.
아니나 다를까 친절하게 도로 옆 기둥에 '추암동 구분군'이라는 안내판도 달려 있다. ⓒ 이준수

한 장소에 두 종류의 고인돌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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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좀 이상했다. 분명 고인돌을 찾으러 왔는데 '추암동 고분군'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고분'군'이라고 하면 고분이 여럿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리고 보통 고분군은 경주처럼 봉분 형태의 무덤이 모여있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우선 공원으로 들어가 보았다.

진짜로 봉분이 나와버렸다. '국가유산'이 등장했으니 기쁘긴 한데 내가 찾던 '고인돌'과는 한눈에 봐도 시대가 달랐다. 봉긋하게 솟은 봉분은 신라시대 유적이었다. 공단 개발 과정에서 신라 무덤 총 55기가 확인되었고, 강원 지역 최초로 여성의 것으로 추정되는 동관이 출토되어 주목을 받은 바 있었다(이곳 설명은 다음 삼국시대 이야기에서 자세히!).

 추암동 고분군은 6세기 전후 신라가 동해안 지역으로 진출한 역사 상황과 장례문화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고고학적 자료다.
추암동 고분군은 6세기 전후 신라가 동해안 지역으로 진출한 역사 상황과 장례문화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고고학적 자료다. ⓒ 이준수

국가유산청 홈페이지가 잘못되었단 말인가. 실망도 잠시 아이들이 흥분하여 소리를 질렀다.

"고인돌이다! 저기 정말 있어!"
"우가우가!"
"우가우가는 선사시대야. 고인돌은 청동기라고 언니가 알려줬잖아."

둘째가 석기시대 원시인 흉내를 내며 달려 가자 첫째가 바로 잡아주었다. 또 다른 반전이 있었다. 고인돌이 한 개가 아니었다. 내가 찾던 고인돌 옆에 처음 보는 형태의 고인돌이 서 있었다. 한 장소에서 두 가지 종류의 고인돌이라니! 예상치 못한 보너스가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국가유산 종합선물세트라고나 할까.

갑자기 의심이 들었다. 고인돌이 도심 공단 한복판에 평지에 신라시대 고분군과 나란히 존재할 수 있다고? 이렇게나 멀끔히? 함께 발견되었다는 간돌검과 돌화살촉은 어디에 있고?(나중에 알아보니 국립춘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원래 이 자리의 주인은 신라시대 고분군이었다. 두 개의 지석묘(고인돌)는 뒤늦게 이전, 복원한 사연이 있었다. 내가 찾던 고인돌은 본디 묵호 옆 서쪽 구릉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1976년 도로 확장 공사를 하며 시청 안 잔디밭으로 옮겨졌다. 그렇게 사십 년가량을 시청 잔디석처럼 머물러 있던 고인돌은 2017년에서야 현재의 장소로 이전되었다.

 두 번이나 자리를 옮긴 고인돌. 무덤의 운명도 꽤 다사다난하다. 뒤편으로 공단의 모습이 보인다. 꽤나 의미 있는 국가유산이 다소 어울리지 않는 곳에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두 번이나 자리를 옮긴 고인돌. 무덤의 운명도 꽤 다사다난하다. 뒤편으로 공단의 모습이 보인다. 꽤나 의미 있는 국가유산이 다소 어울리지 않는 곳에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 이준수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만든 무덤으로 지석묘라고도 한다. 지금 보는 고인돌은 긴 화강암재 판석을 세워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로 덮개돌을 올린 개석식 무덤이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만든 무덤으로 지석묘라고도 한다. 지금 보는 고인돌은 긴 화강암재 판석을 세워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로 덮개돌을 올린 개석식 무덤이다. ⓒ 이준수

"아빠, 대박! 전 세계 고인돌 절반이 우리나라에 있대."
"여기 옛날에 살기 좋았나 봐."

안내판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첫째와 둘째가 눈을 크게 떴다. 나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새로운 고인돌이 지금도 계속 발견되고 있다는 대목에서 소름이 끼쳤다. 그간 한반도는 산이 깊고, 지하자원이 빈약해서 풍족하게 살기 힘든 땅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번 오산리 선사유적(놀면서 아이들 역사 교육시키는 법, 어렵지 않은데요? https://omn.kr/2c8k6)도 그렇고, 이번 세계 최다 고인돌 발견지라는 사실도 한반도가 사람이 살기 적합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우스갯소리로 단군 할아버지가 부동산 입지를 잘못 분석해서 한국인은 항시 외세에 시달리며 고생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어쩌면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인돌을 눈앞에서 마주하자 선조와 이 땅을 매개로 강하게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다.

"고인돌 또 없어? 우리나라에 많다며. 사람 뼈 있는지 보고 싶은데."

고인돌 탐험에 재미를 붙인 둘째가 또 다른 고인돌을 요구했다. 안타깝게도 동해시 고인돌은 북평산단 제2공원에 있는 두 기가 전부였다. 검색 범위를 확대해 보았다.

"어디 보자, 삼척은 마땅한 곳이 없고. 강릉부터 보자."

디지털강릉문화대전 홈페이지에 접속해 강릉 곳곳에 있는 고인돌 사진을 살폈다. 미노리와 난곡리 등지에 고인돌이 있었다. 그렇지만 얼핏 보아서는 절대로 고인돌인지 알아볼 수 없을 외양이었다. 야산 능선을 뒤지며 탐험하는 즐거움도 있을 수 있겠지만 순조롭게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거 그냥 평평한 돌 아니야? 할아버지 산소 근처에서도 봤어."
"그러게, 산소에 있는 평평한 돌이 진짜 고인돌이었던 거 아냐?"

얼마나 많은 고인돌이 도시 개발 과정에서 훼손되고 사라졌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청동기 시대에 제대로 꽂힌 아이들을 위해 이대로 멈춰 설 수는 없었다. 온전한 형태로 존재하는 고인돌을 꼭 보여주고 싶었다.

양양군에는 비교적 관리 상태가 양호한 '범부리 고인돌'이 있다. 다만 양양 고인돌은 오산리 선사유적박물관에 다녀오며 답사를 했으므로 넘겼다. 그럼 이제 강원도 동해안에 남은 행정구역은 속초시와 고성군이었다.

설마 저거?

 흙이 점차 무너져 가는 언덕 가장자리를 1미터가량 앞에 두고 있던 고인돌. 토사 유출 시 무너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흙이 점차 무너져 가는 언덕 가장자리를 1미터가량 앞에 두고 있던 고인돌. 토사 유출 시 무너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준수
 솔가지에 덮여 완벽하게 위장되어 있다. 고인돌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눈을 크게 뜨지 않으면 좀처럼 알아차리기 힘들다.
솔가지에 덮여 완벽하게 위장되어 있다. 고인돌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눈을 크게 뜨지 않으면 좀처럼 알아차리기 힘들다. ⓒ 이준수
 바로 앞에서 촬영한 모습, 무덤방을 형성하는 판석과 덮개돌이 확연하다.
바로 앞에서 촬영한 모습, 무덤방을 형성하는 판석과 덮개돌이 확연하다. ⓒ 이준수

투명하게 하늘이 맑은 날, 고인돌과 청동기 유적이 여럿 분포되어 있다는 고성군 화진포로 향했다. 화진포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하자 김일성 별장, 이승만 별장, 이기붕 별장이 떴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리 고성이 강원도 최북단이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세 사람의 별장이 동시에 있을 수 있지? 그러나 의문은 화진포에 당도하자마자 바로 해소되었다.

티 없이 깨끗한 하늘 아래 펼쳐진 눈부신 호수. 그리고 세상 모든 지저분한 것들을 우습게 만드는 화진포 앞바다의 청량함. 화진포는 잡음이 자취를 감추는 순수의 공간이었다. 남북의 정상들이 탐낼 만하겠다 싶었다.

고인돌이 여럿 있지만 보존 상태가 양호한 것이 이승만 별장과 김일성 별장 인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승만 별장으로 향했다. 통합 입장권을 끊고 이승만 별장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고인돌은커녕 관련 표지판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매표소 직원 분께 문의를 하였다. 도로를 따라 언덕을 오르면 양옆에 드문드문 고인돌이 있다는 귀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도로는 인도가 갖춰져 있지 않아 갓길로 조심조심 걸었다. 직원분의 설명에 따르면 분명 근방이라고 했는데 고인돌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걸어보았다. 그러다 장소를 너무 이탈하는 것 같아 되돌아왔다. 문득 비상한 촉이 왔다.

설마 저거? 소나무 아래 누런 솔가지로 뒤덮인 불룩한 무엇. 밑져야 본전이라는 판단으로 둔덕 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화진포가 한눈에 들어오는 장소였다. 다만 그 정체불명의 '불룩한 것'은 바로 앞에 가서 보기 전까지 제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빠 이거 고인돌 맞아, 진짜 맞았네."

드디어 찾았다, 화진포의 보물! 고인돌은 서서히 토사가 깎여나가는 흙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호수를 내려다보는 위치가 환상적이었다. 다만, 큰비라도 와서 언덕이 더 깎여나가면 언제든지 휩쓸려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고인돌 앞까지 가는 데도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고성 군청 문화재 담당자에게라도 알려야 하나."
"왜 가만히 놔두는 게 제일 좋은 거 아냐?"
"훼손될 수도 있으니까 이전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부디 고인돌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며 잠깐 기도를 올리고 돌아섰다. 도로를 따라 내려오는 길에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또 다른 고인돌이 숨어있었다. 화진포는 청동기의 비밀을 잘 간직한 보물창고였다.

 길가에 몸을 숨긴 듯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고인돌. 미리 정보를 듣지 않고 갔다면 지나쳤을 것이다.
길가에 몸을 숨긴 듯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고인돌. 미리 정보를 듣지 않고 갔다면 지나쳤을 것이다. ⓒ 이준수

김일성 별장 근처에 있다는 고인돌은 허무하리라 만치 쉽게 찾았다. 아예 포털 사이트와 자동차 내비게이션에 '강원 고성군 고인돌'이라고 떴다. 이미 플레이스로 등록되어 있는 것이다. 김일성 별장 주차장에 차를 대고 번듯한 소나무 숲을 통과해 고인돌을 만나러 갔다.

고인돌은 군인들의 휴양지로 쓰이는 '화진포 콘도' 정문 앞에 있었다. 이승만 별장 주변의 고인돌과 달리 반듯하게 정비된 소나무 숲에 눌러 앉은 고인돌은 누가 봐도 '보살핌'을 받는 유물이었다.

"무덤 주인은 좋겠다. 아직 고인돌이 남아있고."
"당시에 엄청 권력이 센 사람이었을 것 같아. 죽어서도 무거운 돌로 무덤을 세웠잖아."

기록으로 자세한 사정이 남아있지 않아 청동기 무렵의 이야기는 알 길이 없었다. 그렇지만 고대 사회라 하여 인생사가 복잡하지 않았겠나. 추측할 길 없는 온갖 사정을 돌무덤 아래에 묻어두고 잠시 기도를 올렸다.

 뒤편으로 울타리가 없어서 그런지 소나무 숲과 썩 잘 어울리는 '화진포 콘도' 정문 앞 고인돌
뒤편으로 울타리가 없어서 그런지 소나무 숲과 썩 잘 어울리는 '화진포 콘도' 정문 앞 고인돌 ⓒ 이준수

고인돌 만든 사람들이 살던 집

여기서 퀴즈 하나. 고인돌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어디에서 살았을까? 대부분의 사람은 움집(반지하식 주거 형태)이라 대답할 것이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그렇지만 움집은 절반의 정답이다. 우리 아이들도 신석기 시대 유적지에서 발견된 움집을 보고 와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움집을 떠올렸다.

움집은 신석기 시대(약 기원전 8000년 ~ 기원전 2000년) 사이에 시작된 반지하식 주거 양식이다. 이후 청동기 시대(약 기원전 2000년 ~ 기원전 1000년)에도 움집이 사용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지상식 주거 형태로 변화해 갔다. 그러므로 고인돌이 제작된 시기와 장소에 따라 당시 사람들의 집도 달랐던 것이다.

그럼 두 번째 퀴즈.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모두 움집이 있었다면 차이가 있었을까? 없었을까? 이 퀴즈의 정답은 복원된 선사 시대 움집과 청동기 시대 움집에 직접 들어가 본 우리 집 아이들이 어렵지 않게 답을 맞혔다.

"석기시대 움집은 바닥이 완전히 푹 꺼져 있는데, 청동기 시대 움집은 바닥이 조금밖에 안 꺼져 있어요."

좋다, 그럼 청동기 시대의 지상식 주거 형태는 어떤 모습일까? 선뜻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속초 조양동에 가면 청동기 시대 거주지를 복원해 놓은 곳이 있다.

 능선을 따라 나란히 늘어선 집터의 크기가 23-76 제곱미터 규모로 다양하다. 76제곱미터는 이십삼 평에 해당한다. 청동기에도 제법 큰 집을 짓고 살았던 것이다.
능선을 따라 나란히 늘어선 집터의 크기가 23-76 제곱미터 규모로 다양하다. 76제곱미터는 이십삼 평에 해당한다. 청동기에도 제법 큰 집을 짓고 살았던 것이다. ⓒ 이준수
 움집터에서 바라다본 청초호 일대. 현재는 건물에 가려있지만 푸른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위치다.
움집터에서 바라다본 청초호 일대. 현재는 건물에 가려있지만 푸른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위치다. ⓒ 이준수
 지상가옥 내부. 지붕 무게를 지탱하는 나무기동이 보인다. 또한 흙벽과 나무벽을 세웠다는 것을 생생히 확인할 수 있다. 지붕은 초가집 형태나 나무껍질, 풀잎 등을 이용해 덮었다.
지상가옥 내부. 지붕 무게를 지탱하는 나무기동이 보인다. 또한 흙벽과 나무벽을 세웠다는 것을 생생히 확인할 수 있다. 지붕은 초가집 형태나 나무껍질, 풀잎 등을 이용해 덮었다. ⓒ 이준수

"여기 또 호수네. 이 사람들도 우리처럼 호수 좋아하나 봐."
"그러게. 우리 가족도 호수가 좋아서 강릉으로 이사 왔잖아."

속초 조양동 청동기 유적에서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고성군 화진포에서도 그렇고, 속초 조양동 '청초호'도 그렇고 모두 물이 내려다보이는 장소에서 유물이 나왔다. 양양군에 있는 오산리 선사 유적지도 '쌍호'를 중심으로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강릉 초당동 선사시대 집터 또한 '경포호'와 인접해 있었다. 우연이라 하기에는 특징이 너무 명확했다. 교과서였다면 이런 문장이 쓰여있지 않았을까.

'선사시대 집터는 주로 강가나 구릉지대에 위치했다. 물을 얻기 쉽고, 농사짓기 좋았기 때문이다.'

깔끔한 설명이다. 그렇지만 두 발로 각 장소를 누비며 두 눈으로 여기저기를 살피다 보면 책을 읽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지식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편하고 먹고 마실 수 있고, 생존하기 유리한 환경을 선호한다. 수천 년이 흘렀어도 사람의 욕구는 비슷하다.

속초 조양동 유적에는 실내 화덕 자리, 기둥 구멍, 저장구덩이, 작업대 등 생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특히 남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겹아가리 토기와 굽손잡이 그릇, 부채꼴 모양의 청동 도끼도 나왔다. 집 바닥에는 점토를 얇게 깔아 푹신하게 만들었다. 실제로는 점토 위에 짐승 가죽이나 마른 잎, 줄기 따위를 깔아 썼다고 한다.

청동기 유물과 유적을 공부하면서 드는 생각은 '아, 이만하면 국가가 생겨나도 이상하지 않겠다. 고조선 단군왕검이 등장하는 게 우연이 아니구나'였다. 비파형 동검과 청동 거울을 보고 있노라면 계급 사회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또 돌로 만든 괭이와 곡물 저장용 토기는 농경문화와 정착 생활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었다.

"다음에 춘천 박물관 가면 돌칼 보고 싶다."
"화덕 안에 쏙 들어가는지 흙 그릇 크기도 재어볼 거야."

사람들은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박물관에 간다. 훌륭한 선택이다. 그러나 더 재미있는 방식이 있다. 집터나 고인돌 형식으로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현장을 먼저 방문한 뒤에 박물관을 찾는 것이다. '유튜브'와 '챗GPT'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인간은 온몸으로 배우는 것을 가장 잘 기억하게끔 설계되었다.

공부할 때 다양한 감각을 활용하면 뇌의 여러 영역을 동시에 활성하는 효과가 있다. 우리 가족은 강원 영동 지방에서 청동기의 흔적을 찾기 위해 약 한 달가량 삼척부터 동해, 강릉, 양양, 속초, 고성을 두루 다녔다. 선사 시대 사람처럼 나무 작대기를 지팡이 삼아 언덕을 오르고 움집 안에서 비바람을 피했다.

자주 길을 잃었고, 주유비도, 식비도, 시간도 꽤 잡아먹었지만 후회는 없다. 직접 반달돌칼처럼 생긴 도구를 만들어서 풀을 꺾는 즐거움은 해 봐야지만 알 수 있다.

고조선의 기운을 느껴보고 싶다면 집 주변에 있는 고인돌부터 검색해서 찾아가 보자. 의외로 야생에 방치된 듯한 고인돌이 흔하다. 보물찾기 미션을 수행하는 느낌으로 산책 삼아 나서보는 건 어떨까. 운이 좋다면 미등록된 고인돌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청동기시대#고인돌탐험#가족역사여행#고조선역사#강원도선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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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미래의창 2024>, <선생님의 보글보글, 산지니 2021> 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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