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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6일 오후 서울 시내 현대오일뱅크 주유소 모습. ⓒ 연합뉴스
[기사 수정: 6일 오전 10시 39분]
현대오일뱅크 대산공장이 독성물질인 페놀과 페놀류가 함유된 폐수를 배출허용기준(페놀: 1㎎/L, 페놀류: 3㎎/L)을 초과해 배출한 혐의에 대해 1심 법원(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이 유죄 판결을 내렸다. 범행 기간과 독성물질 배출량도 상상을 뛰어 넘는다.
2월 26일 법원의 판결문을 통해 현대오일뱅크의 범죄 내용을 들여다보면 당시 대표이사 등에 대한 형량(전 대표이사 징역 1년 6개월)은 오히려 낮아 보인다.
조직적이고 계획적이고 치밀했던 '법 위반'
우선 명백한 법 위반이 있었다. 물환경보전법상 폐수배출시설에서 배출되는 폐수는 수질오염방지시설로 보내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현대오일뱅크와 계열사는 독성물질이 함유된 폐수를 처리시설을 거치지 않고 습식가스 세정시설에 사용하는 냉각수로 사용했다. 비용 절감을 위해 깨끗한 물 대신 페놀이 섞인 폐수를 사용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약 5년 5개월 동안 현대오일뱅크와 자회사에서 유해물질이 포함된 폐수 129만 톤(전체 투입량의 33%)이 굴뚝을 통해 배출돼 대기 중으로 날아갔다.
페놀과 페놀류는 공장 폐수의 주 함유물로 중추신경계, 심장, 혈관, 폐, 신장에 심한 손상을 일으키는 독성물질이다. 전문가들은 체내로 들어오면 신경계와 순환계를 모두 손상할 수 있는 데다가 간이나 신장 등 주요 장기 역시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검찰의 기소내용과 법원의 판결문을 보면 이들은 폐수처리장 증설 비용과 용수 공급 비용을 줄일 목적에서 조직적·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주민들의 악취 민원에 의한 단속이 있을 때는 폐수 투입을 중단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수사가 시작되자 냉각수로 사용하는 깨끗한 물의 양을 늘리는 방법으로 페놀과 페놀류가 배출허용기준 이하로 조작하려는 정황도 포착됐다.
한국 최초의 민간 정유사이자 시장점유율로도 국내 정유사 중 손가락 안에 드는 굴지의 기업이 수질오염방지시설 비용을 아끼려고 저지른 범행은 충격적이고 잔인하기까지하다.
발끈한 성일종

▲대정부 질문 나선 성일종성일종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2월 12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서 정치·외교·통일·안보 분야 대정부 질문을 하고 있다. ⓒ 남소연
현대오일뱅크는 1심 판결에 대해 입장문을 통해 "사실관계 확인 및 법리 판단 등에 수긍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어 즉시 항소할 예정"이라며 "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이 기업은 그동안에도 공업용수가 부족해 폐수를 재활용했으나 외부로 유출하지 않아 어떠한 환경오염도 발생하지 않았고, 주민 피해도 없었다고 주장해 왔다.
오히려 국회에 대산공단의 공업용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물 재이용 촉진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아래 물 재이용촉진법)'의 조속한 통과를 촉구(2021년 12월)했다.
법원은 판결문을 통해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라며 "내부 제보자에 의한 공익 신고가 없었다면 범행의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지적했다.
성일종 의원(충남 서산태안, 국회 국방위원장)도 이같은 현대오일뱅크의 행보에 발끈했다. 성 의원은 2023년 8월 검찰이 현대오일뱅크를 기소하자 입장문을 통해 "이 사건의 핵심은 페놀의 대기 유출 여부와 이를 은폐한 의혹이라며 사법부에서 위법행위가 밝혀질 경우 서산 시민과 함께 국회 차원의 추가적인 책임을 엄중히 물을 것"이라고 강도 높은 대응을 시사했다.
성 의원은 현대오일뱅크의 이중성도 지적했다. 당시 그는 "현대오일뱅크가 지역발전상생협의체를 구성하고 물 재이용촉진법 통과를 촉구하면서 (같은 기간) 폐수를 불법 배출한 혐의를 받고 있다"라며 "현대오일뱅크는 시민과의 약속을 무시하고 국회를 우롱했다"고 강조했다.
국회가 통과시킨 '물 재이용촉진법'

▲검찰에 따르면 현대오일뱅크는 지난 2017년 6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수년 동안 유해물질인 페놀을 포함한 폐수 130만 톤을 증발시켜 가스 세정시설의 굴뚝을 통해 대기 중으로 배출했다. 사진은 현대오일뱅크 홍보영상에서 갈무리했다. ⓒ 현대오일뱅크 홍보영상 갈무리
하지만 현대오일뱅크에 대한 법원의 유죄판결이 나온 다음 날인 2월 27일 국회는 성 의원이 대표로 발의한 '물 재이용촉진법'을 통과시켰다. 이 개정안은 생산공정에서 나오는 온배수를 재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이를 이용하는 자에게 재정지원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국회를 우롱했다'면서 '위법행위가 밝혀질 경우 서산 시민과 함께 국회 차원의 추가적인 책임을 엄중히 물을 것'이라는 성일종 의원이 위법행위가 밝혀진 직후 되레 기업윤리를 저버린 현대오일뱅크에 흡사 '선물'을 안겨준 셈이 돼버렸다.
물론 이 법안이 현대오일뱅크의 생산공정에서 나온 폐수를 재활용하도록 허용한 건 아니다. 공장 운영 과정에서 나오는 깨끗한 온배수만 재활용하도록 하고 있고, 해수를 끌어다 온배수로 이용하는 다른 회사들도 같은 혜택을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양생물의 피해 사례가 증가하고 있는 만큼 법 제정에 앞서 꼼꼼한 검토와 선진화된 관리방안을 먼저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성 의원은 현대오일뱅크에 대한 1심 판결이 있은 다음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아직 사법부의 최종 판단이 남아있지만, 지금이라도 현대오일뱅크는 폐수 유출에 대한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주민들이 수긍할만한 대책을 조속히 내놓길 바란다"라고 밝혔다. 이어 "저도 서산 시민들과 함께 향후 재판 진행 과정을 지켜보면서 국회는 물론 정부 차원의 대응책 마련에 힘을 쏟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재판 과정에서 더 많은 범행이 드러나는데도 사과 한마디 없는 현대오일뱅크에 대해 '진상을 밝히고 대책을 내놓으라'는 성 의원의 입장은 오히려 검찰 기소 때보다 뒷걸음질한 느낌을 준다.
반면 서산태안환경운동연합과 서산태안시민행동은 1심 판결 직후 "현대오일뱅크의 계획적인 범행과 페놀 배출의 양, 반성을 하지 않는 점 등을 고려하면 1심 판결의 선고형은 부족하다"라며 "현대오일뱅크에 대한 조업정지 등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