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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으로 무엇인가 풍자가 되기 시작했다는 건 이제 변화할 때가 되었다는 신호탄이 아닐까? 요즘 이수지의 '대치맘' 재현이 화제다. 연예인 한가인의 현실판 라이딩 스케줄로 현실 고증까지 완벽해진 대치맘의 일상이라나. 거기에 더해 지난 3일 드라마 <라이딩 인생>이 첫 방송을 탔다. 대치동 라이딩은 뭐, 사실 어제오늘의 일도 아닌데...

라이딩을 표면적으로 내세웠지만 드라마의 면면은 전반적인 사교육에 관한 이야기다. 워킹맘을 짠하게 본다는 설정 자체는 불편하지만(외벌이로는 대치동 사교육을 못 시키는 집이라는 시선)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엄마일 때도 전업맘들의 모임에 워킹맘은 낄 자리가 없긴 했다.

분당에서 대치동 라이딩 해보니

 분당에서 대치로 넘어가는 매봉터널. 항상 막힌다.
분당에서 대치로 넘어가는 매봉터널. 항상 막힌다. ⓒ 은주연

드라마는 그 워킹맘의 입장에서 이야기한다. 워킹맘이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동안 늘 시터에게 갑이 아닌 을의 존재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이제는 그 시터에게 라이딩의 역할이 더해지면서 초갑을의 상황이 된 것 같다.

실제 어린 아이를 둔 워킹맘의 상황이 드라마와 똑같은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일터에서 일하는 동안 아이를 제 시간에 학원에 데려다주고 다른 학원으로 무사히 이동시키고 하원시키는 것, 셔틀버스가 있긴 하겠지만 학원 간 이동은 엄마의 라이딩(아빠가 가능한 집은 아빠가!)이 필수이니 말이다.

"난 서윤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거야!"

드라마에서 서윤이 엄마 전혜진의 대사이다. 사실 할 수만 있다면 공부라도 대신해 주고 싶은 것이 대치맘들의 간절한 마음일 것이다. 일단 7세 고시에 합격하기만 하면 인생의 탄탄대로에 올라탈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진 엄마들.

그러나 엄마들이 대신해 줄 수 있는 건 라이딩뿐이라 제 시간에 학원에 도착하는 것에 더욱 사활을 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드라마에서도 전혜진이 꽉 막힌 도로에서 내려 운동화를 갈아신고 아이를 안고 전력질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유는 하나. 학원 시간에 늦으면 안 되니까.

 <라이딩 인생> 공식영상 화면 캡처
<라이딩 인생> 공식영상 화면 캡처 ⓒ ENA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12년 전 나는 첫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차를 뽑았다.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라이딩 인생이 펼쳐진다는 선배맘들의 조언으로 그 당시 무리해서 남편의 출퇴근용 차 이외의 라이딩용 차량을 구입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나의 '라이딩 인생'.

나의 라이딩 인생이 대치동으로까지 범위를 넓힌 건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첫째가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면서부터였다. 그전에도 약간 살벌한 연습게임 같은 라이딩 인생이 있긴 했다. 바로 분당의 정자동도 학원가.

학원이 한데 모여있는 탓에 학원 시작 시간과 끝나는 시간에 주변은 전쟁터가 따로 없다. 학원 앞 길가에 이중으로 쭉 늘어선 차들이 아이를 픽업하거나 드롭하기 위해 경적을 울려대는 전쟁터.

나름 그 전쟁터에서 5분 이상 정차해도 주차위반 카메라에 걸리지 않는 자리, 좀 더 아이와 만나기 쉬운 자리, 아이를 태우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위치 등등에 완벽하게 익숙해졌었는데, 대치동 라이딩이라니 약간은 설렜다. 뭔가 대한민국 교육의 중심지로 한 발짝 다가서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나도 뭔가의 그 어떤 대열에 합류한 것 같은 우쭐함.

분당에서 대치동까지는 꽤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에 별 긴장 없이 출발했는데 역시 대치동 길은 대치동만의 룰이 있었다. 가장 달랐던 점은 양이다. 그곳에 몰리는 아이들과 차량 수는 정자동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압도적으로 많었다.

학원이 시작되는 시간이나 끝나는 시간, 특히 토요일 일요일에 더 불야성인 쉴 틈 없는 학원가는 이제 막 대치동 라이딩에 입성한 나 같은 초보 엄마에게는 새로운 세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새롭고 낯선 진풍경.

무엇보다 검은색 트레이닝 바지에 무채색의 후드티, 무채색의 가방을 멘 똑같은 청소년들이 양쪽 도로를 꽉 메운 장면은 초저출산 국가에서 보기 힘든 장면이었지 싶다(여름에도 에어컨 때문에 반팔 입은 아이들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겨울이 되어야 비로소 롱패딩 하나가 추가되는 단조로운 패션. 학원이 끝나는 저녁 시간에 몰려나오는 아이들, 가만히 서 있어도 저절로 걸어지는 물결 같은 흐름.

아이들의 옷만 똑같은 게 아니라 라이딩 차량들도 비슷한 덕분에 내 차의 문을 열고 타는 남의 집 딸과 인사한 적도 한두 번은 아니다. 아이도 차를 구분 못하고 나도 아이를 구분 못한 웃지 못할, 그러나 있을 법한 이야기.

그 흐름에서 홀로 섬처럼 불을 밝힌 '스트레스 프리존'은 또 어떻고. 대치동 학원가 도로변에서만 볼 수 있는 투명한 네모 박스형 공간인데 들어가서 소리 지르면서 스트레스를 풀라고 만들어 놓았단다.

그런데 실제로 이용하고 있는 아이들을 본 적은 없다. 가끔 들어가서 추위를 피하는 아이들은 있다 들었지만 동물원의 원숭이도 아니고 거기에 들어가서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아이가 몇이나 될까 싶다.

좀체 경적을 울리지 않는 운전자들

 대치동 학원 앞 도로에 쫙 깔린 애들. 도로 정차를 단속하는 빨간눈 카메라.
대치동 학원 앞 도로에 쫙 깔린 애들. 도로 정차를 단속하는 빨간눈 카메라. ⓒ 은주연

진풍경에 넋을 놓는 것도 잠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운전해야 하는 곳이 대치동이다. 현란한 차선 바꿈과 민첩한 끼어들기는 기본 중의 기본. 그런데 재미있었던 것은 대치동 운전매너다. 희한하게도 웬만하면 경적을 울리지 않는다.

이 정도의 끼어듦이나 차선변경, 불법정차는 욕먹어도 싸다 싶었지만 그녀들, 경적 한번 울리지 않는다. 다들 니맘 내 맘인 건지. 물론 얼마나 단련된 솜씨들인지 갑자기 차선을 넘나드는 아찔한 운전에도 요리조리 잘 피해나가지만 말이다.

물론 대치동 라이딩이 늘 젠틀한 것은 아니다. 이상하게 그 도로에 서면 승부욕은 치솟고 인내심은 바닥을 치고 분노 또한 솟구친다. 그냥 아이를 늦지 않게 제 시간에 학원에 데려다주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생각나지 않는 상태.

그러다 앞차 때문에 빨간불에 딱 걸리면 나도 모르게 사자후가 나온다. 어쩌면 스트레스 프리존은 공부에 지친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라이딩에 열받은 나 같은 엄마들에게 필요한 공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던 이유다.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대치동 버전이라는 '7세 고시부터 대입수능까지' 책임지는 대치동 학원가이다 보니 어쩌면 그 길이 늘 꽉 막혀 있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말이다.

한 가지 고백할 것은 나도 대치동 키즈였고, 내 아이들도 대치동 학원가를 전전했지만 그게 보장해 주는 게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건지 나는 요즘 자꾸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이 머리에 맴돈다. 진짜 모든 게 운인 것은 아닐까. 내가 보기에 아이들 실력은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아서.

그나저나 정말 좁디좁은 골목마다 촘촘하게 들어서 있는 수많은 학원들. 그 길을 요리조리 돌고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대치동 학원가의 지리를 완벽하게 꿰찬 나의 실력을, 이대로 썩히긴 아까웠는지 아이는 재수를 결심했고 나의 라이딩 인생도 1년 더 늘었다.

#대치동라이딩#라이딩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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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고 글쓰는 일을 좋아합니다. 따뜻한 사회가 되는 일에 관심이 많고 따뜻한 소통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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