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 <맡겨진 소녀>, <푸른 들판을 걷다> 이후 오랜만이다. 글을 읽어 나가면서 주인공의 감정과 마음이 이토록 가슴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오는 건.
책을 손에 잡으면 쉬이 놓을 수 없는 한편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마음속에 감정의 여운과 잔상을 깊게 남긴다. 2025년 한국에서 출간된 소설 <폴라드인>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 J.M. 쿳시(J.M. Coetzee)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소설가로 200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부커상도 두차례 수상했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이야기와 문장의 마스터피스다.

▲<폴란드인> 노벨상, 부커상 2회 수상 작가 J.M. 쿳시의 신간표지에 그려진 황금의 세조각은 책을 읽고 난 뒤 구스타브 클림트의 황금으로 그린 그림 <키스>를 생각나게 했다. ⓒ 노태헌
쿳시의 문체는 가슴의 맥박처럼 리듬이 있다. 그의 소설은 인간의 소외와 고독을 주로 표현한다. 사람이 가진 도덕적 책임과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예리한 문장을 이번 작품에서도 선보인다. 그러면서 차분하고, 강렬하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깊은 연민을 담는다.
<폴란드인>은 사랑과 인간관계의 불균형, 문화적 차이,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해 묻는데, 주인공은 장년의 피아니스트 비톨트(Witold)와 그보다 젊은 스페인 여성 베아트리스(Beatriz)다. 이야기는 주로 베아트리스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비톨트는 70대 후반의 폴란드인 피아니스트로 쇼팽의 음악을 주력으로 연주하는 음악가다. 콘서트의 주무대는 유럽의 국가들로 어느 날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문학 및 음악 행사에서 공연을 하게 된다. 그리고 행사 조직위원인 베아트리스를 만나게 된다. 베아트리스는 마흔 살로 지적이고, 교육 수준이 높고, 글과 음악을 좋아하는 좋은 아내이자 엄마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남편과도 자식과도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 공연 후 만찬에서 비톨트는 베아트리스에게 운명적인 사랑을 느끼고 편지와 공연 초대로 그녀에게 다가간다. 베아트리스는 남자의 말과 표현에 혼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호기심이 생긴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스페인의 마요르카 섬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야기 안에서 두 주인공의 사건을 통해 소설은 시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독자에게 일으킨다. 어쩌면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며 실체가 없는 '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기억을 담고 살아가는 존재다.
하지만 기억 속에는 시간이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그녀(또는 그)를 기억 속에 간직한다. 그리고 그녀(또는 그)는 나를 어떤 형태로든 기억할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때론 오래된 기억을 신화로 변형시키며 삶을 유지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 망각 속에 기억을 남기게 될 것이다.
그렇게 책은 질문한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의 형태로 한 우리의 모든 행동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연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그녀가 그 문을 열게 되면 그 안으로 뭐가 쏟아져 들어올지 누가 알겠는가.'
'내가 당신을 향해 느낀 사랑이 나를 선에 대한 사랑으로 이끌었지.'
'오디너리 한 삶을 나란히 사는 것, 그게 내가 원하는 것이오.'
책 속에서 인상 깊게 남은 글귀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