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새 근로시간제도는 중대재해처벌법과 함께 일하는 사람의 건강과 생명과 관련해 가장 큰 관심을 받고 있다.
누군가 과로로 인해 쓰러졌다는 소식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한국에서 이제 과로가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은 상식으로 통한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과로가 어떤 구체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을지 묻는다면 대다수는 아마도 돌연사, 심장마비와 유사한 문제를 떠올릴 것이다.
과로로 인해 생활 습관이 바뀌고 생리적 균형이 무너지기 때문에 신체적 문제를 먼저 떠올리는 것은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의외로 간과하기 쉬운 문제가 정신건강 측면의 위해이다.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갑자기 왜?

▲과로는 노동자를 짓누른다. ⓒ sashafreemind on Unsplash
2021년 <국민일보>에서 한정애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자살에 대한 업무상 질병 판정서 142건을 분석했을 때, 신청자의 57%(81명)가 '업무의 양·질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었다고 보도한 사실은 과로가 얼마나 노동자의 정신건강을 짓누르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질병의 업무 관련성을 판단하는 일을 업(業)으로 삼고 있는 필자 입장에서도 처음에는 과로와 자살 간의 연관성이나 인과성은 쉽게 인정하기 어려웠다. 자살을 비롯한 자해 행위의 모습이 우선 자유 의지에 기초한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라는 점과 그저 '일을 그만 두면 되는 것 아닌가' 식의 인식이 으레 합당하게 느껴지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과로 자살을 다룬 책을 무턱대고 두 권 사 읽으며 깊이 있게 알아보려 했지만, 여전히 논리적/학술적 시각에서의 답답함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일정 수준 이론적 설명이 가능한 과로사와는 달리, 과로 자살은 사회적 고립감 외에는 그 관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가족 부양을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던 가장(家長)이 갑자기 왜?, 돌연'미안하다'는 말만 남겨두고 도대체 왜?
늦게나마 알게 된 것은 과로 자살 또한 당사자가 처한 상황을 사회적 맥락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단 사실이다.
일각에서는 자율성 및 자기 결정권을 중요시 하면서 본인의 동의만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근로시간 규율을 반대하곤 한다. 하지만 내가 접했던 과로성 질환 발병 혹은 자살 사례에서는 본인이 과로를 '선택'했다기 보다는 회사와 부서의 요구를 미처 거절하지 못해 과로에 '몰린' 사례들이 대다수였다. 결원 발생 및 충원 지연, 한시적 업무량의 폭증이 흔한 사유다.
이러한 경우에 온전히 본인의 의사대로 과로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상명하복이 익숙한 분위기 속에서 직장 내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있고, 사용자와 대등한 지위에 서기 어려운 개개인의 처지에서 설령 용기 내어 의사 표시를 하더라도 조직보다 개인을 중요시한다거나 혹은 유별난 사람이라는 프레임에 갇힐 우려는 없을까?
물론 과로가 자살을 결의하게 만드는 단독 요인이라 보긴 어렵다. 고객응대 및 직장 내 구성원 간의 대인관계 갈등, 고용불안정, 그 외 가정·경제적 문제 등을 비롯해 개인적 취약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만 본인의 진의(眞意)와 다르게 행해진 과로가 본인의 행위선택능력과 더불어 인식능력과 억제력이 현저히 저해되는 토대 혹은 유도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혹자는 필자가 특수한 상황에 국한되어 생각하고 있다 말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과로사건 과로자살이건 가족 단위를 힘들게 지탱하고 있던 구성원의 사례가 많은 만큼 최소한의 보호 장치는 우리 사회에 마련해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고위 관리직, 고소득, 전문직만 주52시간 적용을 제외하는 일명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또한 같은 맥락에서 납득하기 어렵다. 도리어 이들은 대개 무거운 책임을 요구받는 경우가 많고, 과로나 일중독을 미덕으로 여기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자연스레 비자발적 과로에 몰리기 쉬운 상황이다.
근로복지공단에서 2021년 발간한 '정신 질병 자살 사건 주요 판정 사례'에서 제시된 과로와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 사건의 첫 사례가 제조업 공장장의 사례이며, 필자가 가장 최근 접했던 사례 또한 국내 굴지 기업의 연구원이었다.
근로 시간을 규율하는 논의에서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일하는 사람의 건강이라고 이야기하곤 하지만 아직 인식은 관념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직도 과로에 따른 건강 위해에 대처하기 위한 정부 전담 조직마저도 제대로 구성되지 않았으며 각종 논의 자리에서도 건강 및 보건 전문가의 목소리는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는다.
숨을 쉴 때 산소도 몰아서 쉬어 축적해 놓을 수는 없듯이, 우리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인 휴식 또한 몰아서 축적해 놓을 수는 없다. 산소가 부족하면 질식하듯, 휴식이 부족해도 누군가는 질식하는 건 마찬가지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이번 글은 김용균재단 이사이자,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로 활동하는 박승권 님이 쓰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