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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가 2월 22일로 창간 25주년을 맞았습니다.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 시민기자들이 '오마이뉴스야, 고마워'를 썼습니다.
누가 인생은 60부터라고 했나. 기억도 없는 오래전 과거의 어느 때, 별 감흥 없이 들었던 60이라는 나이는 아주 먼 미래였다. 결코 닥쳐오지 않을 것 같았던 미래였는데, 그걸 어느새 목전에 두고 있는 나이가 되었다.

어쩌다 글 쓰는 이로 살기로 마음먹고 글쓰기 언저리만 맴돌다가 착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다. 그와 손잡고 시골로 이주해서 살게 되었다. 도시 출신의 도시적 사고방식으로 시골 원주민들 틈바구니에서 두 아이를 육아하며 사는 생활은, 당시 나에겐 낯설고도 두려웠다.

결혼과 육아에서 도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두운 밤 현관문을 열고 도망치려는 나를 책임감과 모성이 붙잡았다. 인터넷이 막 활성화 되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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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인터넷망은 도심과 시골을 차별하지 않았다. 나는 현관문을 여는 대신 매일 밤 인터넷 속으로 도망쳤고, 어느 날 거기서 <오마이뉴스>를 만났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영원히 꺼내놓지 못하고 글자 감옥에 갇혀 있을 내 이야기를 <오마이뉴스>가 들어주었다. 두려움을 글쓰기로 치유하고 은둔형을 세상으로 안내하고 용기를 내게 해준 매체가 <오마이뉴스>였다.

시골살이의 유일한 즐거움, 기사쓰기

내가 발행한 소식지. 오마이뉴스 덕분에 부여에서 글 쓰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내가 발행한 소식지.오마이뉴스 덕분에 부여에서 글 쓰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 오창경

나는 주로 내가 경험했던 일과 마을의 재미있는 에피소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등을 써서 <오마이뉴스>에 올렸다. 글이 채택될 때 느끼는 희열이 시골살이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내가 기사를 <오마이뉴스>에 써서 올리면 방송국에서 출연 요청이 올 때가 많았다. 주로 기사 내용에 등장한 인물에게 출연 섭외가 오곤 했다. 그들을 방송에 출연시키고 준비과정에 동참하면서 나 또한 점점 시골살이에 동화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나의 글쓰기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었고 그들도 기꺼이 내 기사에 등장인물이 되기를 거부하지 않았다(관련 기사: 여기로 오세요... '반딧불이' 별천지가 펼쳐집니다 https://omn.kr/28uvd ).

반딧불이 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든 사진가들 덕림마을의 반딧불 축제를 기사로 썼다. 당시 대낮부터 찾아와 반딧불이 사진을 찍으려 좋은 위치 선점을 위한 치열한 경쟁을 하는 사진가들
반딧불이 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든 사진가들덕림마을의 반딧불 축제를 기사로 썼다. 당시 대낮부터 찾아와 반딧불이 사진을 찍으려 좋은 위치 선점을 위한 치열한 경쟁을 하는 사진가들 ⓒ 오창경

지난밤 마을 누구네 집에서 누구 제사를 지냈을 거라는 사소한 일이 그날의 화젯거리 전부였던 시골이었다. 마을 사람이 TV 화면에 스쳐 지나가는 것도 화제였을 당시에 주인공으로 나와서 숨겨뒀던 끼를 발산하는 장면이 대문짝만 하게 나왔다.

그는 오일 장날 장에 갔다가 이웃 마을 사람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관심을 끄는 연예인급 대우를 받고는 자존감이 하늘까지 치솟아서 돌아왔다.

그런 식으로 부여의 공무원과 교사, 농민들, 내 이웃을 방송에 출연시키거나 표창받게 해주는 보람이 동력이 됐다. 바쁜 와중에도 내가 글 쓰는 일을 멈추지 않게 했고 완벽한 시골 사람으로 정착해 살게 했다. 비전 없는 시골살이에 겁 없이 뛰어든 우리를 비웃던 마을 주민들의 눈길도 달라졌다. 나를 '작가', '기자'로 인정하고 그렇게 불러 주었다.

그러나 초창기에 <오마이뉴스>에 연재 기사를 쓰거나 사는 이야기 코너를 맛깔나게 썼던 사람들이 책을 출간하며 공인된 작가로 발돋움하는 동안 나는 항상 제 자리인 것만 같았다. 아이들은 여전히 내 손이 많이 가는 나이였고 생존을 위해 사업도 해야 했기 때문에 글 쓰는 일에만 집중하기 어려웠다. 한 마디로 글의 맛을 살리는 실력이 늘지 않았다.

한동안은 정체된 시기도

생각해 보니 책을 낸 기자들은 뭔가 남다른 것이 있었다. 관조가 담긴 관찰력, 독자를 빠르게 이해시키는 비유, 흡인력 있는 주제를 발견해 갓 잡은 물고기 같은 신선하고 역동적인 글을 내놓는 그들은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나에게는 적절한 비유와 화룡점정의 한 마디가 없었고 긴 호흡으로 이끌고 갈 주제 의식도 빈약했다. 스스로 한계를 인지한 순간 비참해졌고 자괴감에 빠졌다. 글 쓰는 일이 부끄러웠고 무기력하게 되었다. 중심부에 진입하지 못하고 변방에서 머무는 나의 글쓰기를 그만 내려놓고 싶었다.

내적 고민에 빠져 글쓰기를 소홀히 하는 동안 사업은 궤도에 올라 정신없이 바쁜 날들이 지나갔고 내 모성 본능의 전파가 닿지 않아도 될 만큼 아이들이 성장했다.

나의 글쓰기는 아이들이 독립해 떠난 자리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바짝 잘라낸 가지에서 새순이 돋아나는 것처럼 나는 어느새 부여군 전 지역을 다니며 소식지도 발행하고 마을지(마을志, 기억해 부여)도 쓰는 사람이 되었다.

부여군 초촌면 추양리 마을지 부여군 초촌면 추양리 마을의 이야기를 썼다.
부여군 초촌면 추양리 마을지부여군 초촌면 추양리 마을의 이야기를 썼다. ⓒ 오창경

나 살던 작은 동네에서 부여 전 지역으로 영역을 확장하면서 글감이 있을 만한 곳을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리게 되었다.

언젠가는 부여 터미널 앞을 지나가다가 한 택시 기사에게 이런 인사를 받았다.

"기사 잘 보고 있슈. 부소산 단풍 이야기 쓴 거 때문에 그날 부소산 찾는 손님들을 많이 태웠슈."

한 부여 관광지 문화유산 해설사는 내게 이런 인사를 하기도 했다.

"갑자기 손님들이 몰려오면 오 기자가 기사를 썼더구만."

나는 내가 이름만 둥둥 떠다니는 은둔형 글쟁이인 줄 알았는데, 그간 신상이 이렇게 털려버린 줄은 몰랐다.

"이젠 어쩔 수 없슈. 우리 마을 반딧불이들을 세상에 알렸으니, 우리 마을도 책임지셔야혀유."

반딧불이가 나오는 마을로 소개한 것이 인연이 되어, 덕림마을 행사 때마다 초대받는 시골마을 셀럽이 되어버렸다.

무엇보다 75년을 해로하는 노부부의 일상을 기사로 쓰고, 그게 작년 KBS 인간극장에 방송된 일만큼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보람 있는 일이었다(관련 기사: 세 발 오토바이 타고 텃밭 가는 90대 부부 https://omn.kr/29p48 ).

세발 오토바이크를 타고 텃밭으로 향하는 노부부 잔병이 없이 장수하는 비결은 따로 없고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비결이었다.
세발 오토바이크를 타고 텃밭으로 향하는 노부부잔병이 없이 장수하는 비결은 따로 없고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비결이었다. ⓒ 오창경

예비부부들에게 이상적인 부부상을 정립하게 해주는 노부부의 삶과 일상이 너무 아름다웠다고, 많은 부여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글쓰기의 끈을 놓지 못하고 부여에서 써왔던 시간을 돌아보니, 그게 벌써 <오마이뉴스> 창간과 비슷한 시간을 걸어왔다.

남들만큼 많이 쓰지도 못했고 뚜렷한 성과는 없는 듯하지만, 느렸지만 꾸준하게는 써왔다. 이제야 가끔 포털사이트에 기사가 실리고 <오마이뉴스>에 메인에 오르는 정도이다. 조금 써야할 문장이, 그 사이에 인생을 끼워 넣을 틈새가 보이는 것 같다.

부여 여성 인물 발굴에 참여해서 내가 쓰고 발행한 책자 조선중기 부여여성 시인 김임벽당을 발굴해 책자로 엮었다.
부여 여성 인물 발굴에 참여해서 내가 쓰고 발행한 책자조선중기 부여여성 시인 김임벽당을 발굴해 책자로 엮었다. ⓒ 오창경

어둠 속에서 코끼리를 찾아 헤매는 것 같던 나의 글쓰기가 환갑에 근접한 나이가 돼서야 코끼리의 꼬리를 겨우 붙잡은 것 같다. 코끼리를 찾으면 코만 잘 그리는 것이 글쓰기라는 것을, 그러니까 내가 보고 듣는 걸 잘 묘사하는 것도 참 중요하다는 걸 이제 알겠다.

"이잉, 걔네 금방 어프러졌어(엎어지다, '가까워지다'란 뜻). 메칠있으면 또 자쳐질겨.(잦혀지다, '멀어지다'란 뜻). 긍게 맨날 먹는 밥처럼, 사람 사이도 밍밍혀야 오래가는겨."

부여 사람들 중에는 가만히 좌중의 이야기를 듣다가 이렇게 촌철살인 같은 충청도식 유머 한마디를 던지는 사람이 꼭 있다. 지나고 보니 막막했던 시골살이에서 독백으로 끝났을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판을 깔아준 <오마이뉴스>와 동반 20여 년을 이런 밍밍한 관계로 지내온 것 같다.

그러나, 그런데, 그래서 오래 버틸 수 있었다. 남의 글을 훔쳐보며 다들 잘 쓰는 것 같아 질투심과 열패감에 사로잡혀 60세 인생을 맞이하지 않게 해 줘서, <오마이뉴스>에게 항상 고마웠다. 그런데도 성격상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비로소 20여 년 만에, 이제야 고맙다고 고백하는 이유다.

 석 달전 쯤, 강릉 선교장에 방문했을 때 찍힌 사진.
석 달전 쯤, 강릉 선교장에 방문했을 때 찍힌 사진. ⓒ 오창경


#부여사람#충남부여#촌철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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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조근조근하게 낮은 목소리로 재미있는 시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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