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에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 이래 돌봄의 문제는 페미니즘의 주요 논제가 되었다. 그때까지 자유주의에 기반한 철학과 도덕이론은 가정이란 공간을 나머지 '공적인 영역'으로부터 분리시켜 '사적인 공간'으로서 상정하였고, 공적인 영역을 무대로 활동하는 남성을 행위의 주체로 가정해왔다.
그 결과 가정 내에서 이루어졌던 가사나 돌봄은 그 노동을 주로 담당했던 여성들과 함께 공적인 담론에서 그림자처럼 (비)존재하게 되었다. 페미니스트들은 어둡게 가려져 있던 공간을 조명하여 여성의 존재와 그녀들이 수행한 역할과 노동을 공적인 담론의 장으로 끌어오는 작업을 시작했다.
버지니아 헬드(Virginia Held)는 <돌봄: 돌봄윤리(THE ETHICS of CARE)>에서 돌봄은 개인적인 관계나 가족의 영역에 한정되지 않으며, 사회의 근원적인 재건을 요구할 수 있는 급진적인 윤리라고 지적한다. 돌봄은 사람을 살리는 일과 맞닿아 있기에 돌봄의 관점으로 사회를 재구조하려는 노력은 대립과 폭력이 만연한 현실을 이해와 공존의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일이 될 수 있다.
특히 돌봄의 문제는 2년 연속으로 합계출산율이 OECD 가입국가 중 가장 낮은 우리나라가 당면한 현실적인 과제이기도 하다. 앞으로 블루오션은 시니어케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돌봄비용을 지불할 수 없는 노년층은 개인적인 관계에 기대거나 돌봄 없이 방치될 처지에 놓여 있다.
노인에 대한 돌봄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점점 적게 태어나고 있는 아이들에 대한 돌봄 역시 사회적 논의와 해결을 기다리고 있는 중요한 문제다. 가정 내에서든 바깥에서든 돌봄노동은 여전히 여성에게 기대되고 편중되어 있으며, 이들의 노동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지나치게 저평가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돌봄이 노동, 내적 동기, 가치, 그리고 그 이상의 것 차원에서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기반하여 돌봄에는 다양한 층위가 있으며 각각의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돌봄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먼저 돌보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려 한다.
누군가를 돌보는 마음

▲누군가를 돌보는 마음(자료사진). ⓒ joshua_hoehne on Unsplash
늘 어딘가에 잘 부딪히고 물건도 잘 잃어버리는 내가 차분하고 심지가 굳어 보이는 여자아이들에게 끌리는 건 아마도 본능이었을 것이다. 그녀들의 챙김을 받는 게 좋았다. 언제나 나보다 나은 친구들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왔다. 집에 놀러 왔다가 방을 정리해준 친구가 있었는가 하면 매일 저녁 전화해 준비물을 잘 챙겼는지 확인해준 친구도 있었다.
돌이켜 보면 두서없이 쏟아내는 말에 귀기울여 주는 친구, 나의 고민을 진지하게 자신의 것처럼 대해주는 친구, 언제나 먼저 식사를 제안해주는 친구, 뜸하다가도 잘 지내는지 안부를 묻는 친구들이 곁에 있었다. 그러나 관계 속에서 그들에게 돌봄을 받았다고 인지하게 된 것은 시간이 꽤나 흐른 뒤였고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에 대해서 역시 당시에는 무지하기 짝이 없었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이후 나는 이들을 삶의 어귀마다 나를 돌봐주었던 엄마라고 여기게 되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복수의 엄마들이 내게 있었던 건 정말 다행이었다. 모두 그 엄마들 덕분이었다. 내가 지금껏 잘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낳아준 엄마로부터는 받을 수 없었던 다정함으로 나를 키웠던 사람들. 안전함 속에서 뛰어놀 수 있도록 울타리를 쳐준 사람들.
누군가를 돌보는 일
챙김을 받는 게 익숙했던 역사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나는 돌봄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받는 일상을 살고 있다.
내가 수행하는 돌봄 노동의 주요 대상은 아무래도 다섯 살이 된 아이다. 아이와 함께 하는 삶을 된 이후 나는 믿을 수 없이 급속도로 돌보는 자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밤낮 가리지 않고 깨는 신생아를 돌보느라 이미 잠이 모자란 와중에 새벽녘의 작은 칭얼거림에도 눈이 번쩍 떠지던 일은 신비스러운 체험이었다. 그때만해도 제때 식사를 제공하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잠을 재워주는 게 돌봄의 전부였다.
아이가 점점 자라면서 상황이 많이 복잡해졌다. 그동안 하던 일(밥 차리기, 목욕시키기, 여전히 재우기, 등하원 시키기 등등)에 더해 정서적 돌봄과 교육이 돌봄의 중요한 축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음을 헤아려주고, 스스로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일. 그리고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공존할 수 있을 방법을 알려주는 일.
요즘에는 하나만 낳아서 키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부모가 친구 역할까지 '잘' 수행해야 아이의 사회성이 발달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단순히 놀아주는 것이 아니라 친구 관계에서 발생할 법한 여러 불편한 상황과 갈등상황을 상정하면서 아이에게 공존의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나는 누군가를 가르칠 입장이 아니다. 아이를 잘 돌보기 위해 나는 나를 다시 교육시킨다. 원칙을 확인하고 구체적인 방법을 머리에 담는다. 이렇게 아이를 돌보는 일이 나를 돌보는 일과 맞닿을 때가 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삶을 살면서부터 관계의 중요성, 시간의 제한성, 깨끗한 환경에 대한 소중함, 안전한 사회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러니 아이와 함께 시작된 인생은 아이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를 제대로 돌보기 시작한 삶이기도 하다.
한동안 동거인(남편)은 아이에게 갖는 관심의 절반만큼이라도 자신에게 가져보라고 나를 종용했었다. 처음엔 심한 농담인 줄 알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아이 한 명을 낳았을 뿐인데 두 명(그것도 원치 않은)의 아이가 생긴 것 같은 기이한 상황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내게는 일을 분담할 파트너가 필요할 뿐인데 자신에게도 관심을 가져달라고 보채는 수염 난 아이라니.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모두에게는 돌봄이 필요하다
그런 동거인의 마음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어른들에게도 사실은 돌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부터였다. 그러니까 돌봄의 종류가 무척 다양할 수 있음을 이해하면서부터라고 할까.
영유아나 노약자, 장애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적으로 돌봄을 필요로 한다. 넓은 의미에서 돌봄을 누군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살피고 그것을 제때에 적절한 방식으로 제공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돌봄을 갈구한다.
나 역시 여전히 누군가의 돌봄을 받고 있다. 엄마는 일주일에 한번 나 대신 아이를 하원시키고 저녁 식사를 차려준다.
그렇게 확보된 시간 동안 나는 카페에서 읽고 싶던 책을 보거나 쓰고 싶은 글을 쓴다. 직장에서의 점심시간 외에 나만의 시간을 갖는 건 그때가 유일하다. 부모로부터 조건 없는 지지나 응원을 받지 못했기에, 나의 감정이나 판단이 수용되는 경험이 부족했기에 정서적 고아처럼 자라왔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돌봄을 엄마에게서 받고 있다. 스스로가 직장을 다니며 아이를 키우는 여성으로서 겪었던 곤란함과 어려움에 대해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라도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이지 않을까. 엄마는 엄마의 방식대로 여전히 나를 돌보고 있다.
엄마에게서 받을 수 없었던, 없는 종류의 돌봄은 다른 이들로부터 기꺼이 받는다.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기대하고 요구하지 않을 만큼 나는 컸고, 인간은 원래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만큼 성장했다.
진지하거나 가볍거나, 사회적이거나 개인적이거나
내밀한 관계 외에는 중요하지 않아, 라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도움 없이 혼자서 할 수 있어, 라고 믿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가벼운 돌봄과 진지한 돌봄, 그리고 사회적 돌봄까지 돌봄의 레이어는 두텁고 촘촘할수록 좋다는 것을.
예컨대 직장에서 나누는 가벼운 안부나 농담 같은 것. 뒤 사람에게 문을 잡아주는 친절.
만석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마음. 연락이 뜸한 친구에게 안부를 묻는 것. 밥 먹자고 제안하는 것.
곁에 있어 주는 것. 응원한다고 말해주는 것.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눈물 흘리는 마음.
시간과 노동력을 들여 기꺼이 아이를 대신 돌봐주는 일. 같이 분노하는 일.
해결책을 함께 고민하는 것. 집회의 현장에서 핫팩과 담요를 나누고 난방버스를 대절하는 마음.
사소하고 가벼운 습관 같아 보이는 것부터 자신이 가진 자원을 기꺼이 나누는 노력들. 이것이 모두 서로를 돌보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오랜 시간 후에나마 깨닫는 데에는 그동안 내가 받아왔던 돌봄의 힘이 컸다.
사랑이 없는 돌봄도 가능할까? 라는 질문에 답을 찾다가 여기까지 왔다. 현재 나에게 남아 있는 가장 강렬한 사랑을 떠올려 본다. 사랑의 힘은 확장성에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타인이 나의 아이를 대해주었으면 하는 방식으로 다른 아이를 대하는 것. 아이가 자랐으면 하는 방향으로 내가 살아가는 것. 아이가 살았으면 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 이것이 다 사랑에 기인해있음을, 결국 모든 돌봄에는 사랑이 관여되어 있음을 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