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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일부터 두 달 넘게 윤석열의 친위쿠테타 세력에 맞서 싸우며 제일 놀란 점은 거리의 주력이 20, 30대 청년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윤석열이 취임한 해부터 그의 파쇼화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렸으나 참석자는 대부분 40대 이상의 중장년층이었다. 그런데 계엄사태를 겪고서는 젊은이가 앞장서고 중노년이 힘을 보태는 모양새다. 세대를 넘어 뜨거운 손을 맞잡고 가게 되어 무척 기쁘다. 윤석열은 이런 점에서 큰 기여를 했다. 그의 내란 시도가 세대의 단절을 넘어 세대간 결속과 연대를 이루게 했으니 표창장이라도 줘야 할 판이다.

20, 30대가 광장으로, 거리로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들이 10대와 20대에 겪은 세월호의 아픔, 이태원 참사때의 분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20, 30대의 등장을 다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이토록 빛나는 1982>(이하 1982. 원더박스 2024)란 책을 보면서 해답의 한 꼭지를 얻은 느낌이다.

이토록 빛나는 1982의 표지 이 책은 성균관대 82학번의 문집이다.
이토록 빛나는 1982의 표지이 책은 성균관대 82학번의 문집이다. ⓒ 원더박스제공

이 책의 저자는 무려 마흔두 명이다. 성균관대학교에 1982년에 입학해 학생운동에 뛰어들어 구속이나 수배 등 여러 고초를 겪은 이들. 사회에 진출해서도 나름 공동체를 위해 살려고 노력하는 별스런 무리다.

이 책에는 60줄을 넘긴 이들의 청년시절부터 인생 2막, 3막을 펼쳐가는 장면이 담겨있다. 이들은 베이비부머세대이면서 4년제 대학진학율이 20%가 안 되던 1980년대 초반에, 성대에 들어갔으니 나름 사회에서 혜택을 받은 층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그 '누림'에 부채의식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려 애썼다.

이들은 축제, 미팅, 대학가요제 같은 낭만에 눈을 주는 대신 80년 광주의 아픔에 주목했다. 쇠몽둥이에 가격당한 듯 무너져내린 머리뼈, 옆구리를 파고든 총탄에 피칠갑을 한 몸뚱이, 쉬쉬하며 전해 들은 광주학살의 진상을 마주하고 전율했고 고민했다.

밤에는 치열하게 토론하고 낮에는 벗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경찰벽을 향해 전진해갔다. 하루, 한 달을 넘어서 대학생활 내내 그런 82학번의 얘기가 생생하게 담긴 책이 바로 '1982'다.

82학번이 3학년 4학년이 되던 1984년과 1985년에 한국 민중운동은 고양기를 맞는다. 학생운동은 민주화운동의 기수로서 큰 역할을 한다. 민정당사 점거투쟁, 사상 첫 미문화원농성, 학생회의 부활과 학생운동의 대중화추진, 이 모두가 82학번이 열어간 역사의 페이지다.

1984년 11월 14일 성대·연대·고대생 193명이 함께 한 민정당사 점거투쟁은 "광주학살 책임져라, 노동악법 개정하라"를 내걸고 진행되었다. 이날 3학년으로서 앞장을 선 이동일(한국철학과)은 "오늘은 퇴로가 없다"라고 말하며 후배들을 이끌었다. 경찰은 여론의 눈치를 보지 않고 즉각 농성해산에 나선다.

경찰특공대가 옥상에서 9층 농성장으로 내려왔다. 유리가 깨지고 파편이 튀는 가운데 들이닥친 경찰은 곤봉을 마구 휘둘렀다. 이동일은 가까운 경찰서 유치장으로 연행된 다음 모처의 대공분실로 끌려간다. 그는 이곳에서 권총을 찬 수사관으로부터 "너 같은 새끼 하나 죽어도 삼팔선에 걸어놓고 입북하다 죽었다고 하면 그만이야"라는 협박을 당한다. 농성의 배후를 대라는 압박이었다.

구속자 열아홉 명 중에 이름을 올린 이동일은 1986년에 국가보안법사건으로 1989년 노동쟁의법 위반사건으로 두 번의 감옥살이를 더 한다. 화양연화라는 인생의 20대는 빛깔도 다양하다. 푸른 수의, 차디찬 은색 수정이 그의 젊은 날을 채운 색이었다.

저자중 한명인 이동일의 모습 그는 1984년 민정당사 점거농성투쟁을 주도한다.
저자중 한명인 이동일의 모습그는 1984년 민정당사 점거농성투쟁을 주도한다. ⓒ 민병래

1982학번이 이끈 투쟁 중에 1985년 5월 23일의 미문화원 농성을 빼놓을 수 없다. 4학년이던 구자춘(행정학과)은 그 중심에 있었다. 그는 '전국학생총연합 광주학살원흉처단투쟁위원회' 성대위원장으로 서울대·고대·연대 대표들과 투쟁기획을 짠다. 미대사관을 포함 '광주학살에 대해 미국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상징적인 장소"를 물색하던 중, 미문화원을 점찍었다.

D-day에 65명의 학생은 미문화원으로 진입했다. 구자춘은 현장지도부로서 투쟁의 대의를 알리기 위해 직접 붓으로 쓴 "광주학살 책임져라"라는 펼침막을 유리창에 내걸었다. 미대사는 면담을 피했고 정치참사관 던롭은 '책임이 없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미국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농성을 해결하는 척 하면서 뒤로는 단전, 단수를 해 농성학생을 지치게 했다.

구자춘은 현장지도부와 상의 27일부터 열리는 '남북적십자회담'도 있고 3일 간의 농성으로 나름 메시지가 전해졌다는 판단에서 스크럼을 짜고 당당히 걸어나왔다. 구자춘은 그 대가로 3년 형을 선고받고 목포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한다. 그렇게 뜨거운 시절을 보낸 그는 지금은 신영복선생의 제자로서, 붓으로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성대 행정학과 82학버 구자춘 그는 1985년 미문화원 농성투쟁을 주도한다.
성대 행정학과 82학버 구자춘그는 1985년 미문화원 농성투쟁을 주도한다. ⓒ 유지호 제공

80년대는 치열한 투쟁만큼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아픔을 많이 남겼다. 대학마다 그때를 상징하는 인물이 있다. 서울대는 박종철이 있고 연세대에는 이한열이 있다. 명지대에는 강경대가 있고. 이들은 고문받거나 최류탄과 쇠몽둥이를 맞으며 고통 속에서 숨졌다. 성대에는 누가 있을까? 최동(80 국문과) 김귀정(88 불문과)을 꼽을 수 있으리라.

82학번 김난희는 두 사람의 열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성대를 상징하는 써클 심산연구회에서 만난 선후배이기 때문이다. 김난희는 최동을 통해 세상에 눈을 떴다. 전경련점거농성투쟁으로 구속되어서도 옥중 싸움을 이어나간 그는 교도관에게 맞아 몸이 많이 상했다.

형집행정지로 1987년 5월에 출소하나 아픈 몸을 추스르지도 않고 최동을 따라 부천에서 노동운동에 투신한다. 최동이 인천부천노동자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망가진 몸으로 출소했을 때 정성껏 돌봤고 최동이 투신했을 때 백병원으로 제일 먼저 달려간 것도 그다. 묘하게도 김난희는 사랑하는 후배 김귀정이 1991년 퇴계로에서 백골단의 폭력진압으로 숨졌을 때도 백병원에서 빈소를 지켰다.

그런 사연 때문인가. 김난희는 평생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고 언제나 낮은 곳에 있고자 했다. 그때의 다짐이 단단했던 터인가 윤석열의 내란을 진압하기 위해 그는 남태령대첩때 자리를 지켰고 한남동의 2박 3일 투쟁 때도 싸움터를 떠나지 않았다.

성대 가정관리학과 82학번 김난희 그는 최동, 김귀정과 심산연구회의 선후배사이다
성대 가정관리학과 82학번 김난희그는 최동, 김귀정과 심산연구회의 선후배사이다 ⓒ 유지호제공

격동의 청년 시절을 보낸 82학번의 오늘은 매우 여러 색깔을 띠고 있다. 사학과를 나온 박승렬은 한신대학 신학대학에 입학해 목사안수를 받고 현재 은평구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또 기독교인권단체인 NCCK인권센터이사장이면서 '4월 16일의 약속 국민연대' 대표로도 활동을 하고 있다.

그가 땀을 쏟는 일은 국가폭력피해자를 지원하고 성소수자와 이주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일이다. 입이 닫힌 사람의 입을 열어주고 집을 빼앗긴 사람의 지붕이 되는 주는 것이 교회와 목회자의 사명이라는 소명의식에서다. 교회의 이름으로 차별과 증오를 선동하는 전광훈류가 판치는 세상에서 지금도 20대의 영혼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셈이다.

조경학과를 나온 장진희는 안양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성동구와 광진구에서 야학활동을 했다. 생계를 위해 광고기획사 일은 하던 그는 잠시 휴식기를 거친 후 '반부패운동' 단체에서 일을 한다. 그는 한국이 2008년 반부패협약을 비준하는 것을 기쁘게 지켜봤고 부패방지위원회가 국민권익위원회로 후퇴하는 것도 가슴 아프게 지켜봤다. 지금은 '반부패' 관련 연구자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압축성장의 폐해를 고치려면 글로벌 스탠다드의 도입이 중요하다는 신념에서다.

또 의상학과 이진은 육아에만 전념하다 2002년 사회적 기업 '아름다운가게'를 만난다. 이진은 2003년 초 아름다운가게와 인연을 맺은 후 3호점인 독립문점의 운영을 맡는다. 그런데 아름다운 가게가 서초동 국민은행 건물 3층 공간을 기부받게 되자 이를 예술품 경매전문매장으로 운영키로 하면서 이진은 책임자로 발탁된다. 그때부터 많은 화가를 만나 작품기부를 요청하고 이를 경매에 부치는 작업을 했다.

2022년 10월 정년퇴직을 했으니 꼬박 20년을 일한 셈이다. 그 사이에 입사 때 단 한 군데였던 매장은 110여 개로, 30여 명이었던 동료간사는 500여 명이 되었다. 이진은 생활문화운동활동가로 살아온 시간을 기억하며 정년 이후에도 그 가치를 이웃에게 전파하려고 노력중이다.

이렇게 '1982'의 저자들은 젊은 날의 소중한 뜻을 잊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서 땀을 흘리며 60이 넘은 나이에도 우리사회의 밀알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1982'에는 그 사연이 알알이 박혀있다. 박수를 받을 만하다.

지금 윤석열과 맞서 거리를 나온 20,30대가 누구인가, 바로 1982의 아들,딸이고 세대를 이어오는 후배들 아닌가? 80년대의 함성은 시나브로 MZ에게 전해졌다. 영화 <1987>과 <서울의 봄> 그리고 소설 <소년이 온다>는 모두 80년대의 젊은이, '1982' 저자와 같은 세대의 분투와 눈물을 다뤘다. 이 정서와 의기를 공감하고 계승한 20,30대가 지금 일어난 것이다. '1982'의 저자들은 음으로 양으로 광장의 새로운 주역을 길러 낸 셈이다.

농업경제학과의 강재봉은 '1982'에 담긴 자신의 글 제목을 "이만하니 다행입니다. 잘 쓰이겠습니다"로 뽑았다. 그는 아침마다 아내와 함께 108배를 하며 욕심을 내려놓고 살아가려 애쓴다고 한다. 1982학번은 이제껏 잘 쓰였다. 바라건대 조금만 더 쓰였으면 한다. 딸들이 일어섰으니 아들들도 일어서는데 조금만 더 쓰이기를 바란다.

이토록 빛나는 1982

성균관대학교 82학번 (지은이), 원더박스(2024)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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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 줄여서 '사수만보'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 민초들의 이야기를 빚어내는 일에서 보람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조명을 비추고 의미를 부여코자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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