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그달레나 섬에 서식하는 펭귄들나에게 푼타 아레나스라 하면 이곳에서 2시간 배를 타고 가서 본 마그달레나 섬의 펭귄이 먼저 떠오른다 ⓒ 백종인
엘에이에서 16시간이라는 짧지 않은 비행 끝에 도착한 곳은 파타고니아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칠레의, 아니 지구의 남쪽 땅끝인 남위 53도에 위치한 푼타 아레나스(Punta Arenas)였다. 파나마운하가 건설되기 전까지 푼타 아레나스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이어주는 가장 빠른 마젤란해협의 중심지로, 이곳을 통과하는 범선들의 석탄 충전소였다.
지구의 남쪽 땅끝, 푼타 아레나
푼타 아레나스에 도착한 첫날, 해안가를 걷자니 바람이 거세고 비가 뿌렸다. 전형적인 파타고니아의 날씨인 셈이다. 사나운 바람에 대비하여 신경 써서 준비한 우산을 쓰고 걷고 있자니 자전거를 타고 가던 한 젊은이가 우리를 향해 뭐라 말을 걸었다. 세찬 바람 소리를 뚫고 들리는 이야기는 여기서 우산은 소용없다고, 그냥 비를 맞으라는 충고였다.

▲푼타 아레나스의 해변거센 바람과 비로 대표되는 푼타 아레나스의 해변 ⓒ 백종인
마젤란이 처음 찾아낸 후 한때 번영의 영광을 누린 곳답게 푼타 아레나스 곳곳에는 마젤란 이름을 딴 간판이 많았다. 1520년 마젤란 함대가 이곳으로 타고 온 빅토리아호와 300여 년 후 다윈이 타고 왔던 비글호의 실물 크기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빅토리아호와 비글호1520년 마젤란 함대가 이곳으로 타고 온 빅토리아호와 300여 년 후 다윈이 타고 왔던 비글호의 실물 크기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 백종인
또한, 푼타 아레나스는 1970년대 피노체트 독재 정권이 반대자들을 고문하고 심문하고 가두었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악행을 자행했던 역사적 건물은 2020년 극우 세력의 방화로 화마에 휩쓸렸고 타다만 건물의 벽에는 낙서가 가득했다. 건물 앞 희생자를 기념하는 조형물도 관리가 안 되는지 여기저기 더럽혀지고 낙서가 많았다.

▲1970년대 피노체트 독재 정권이 반대자들을 고문하고 심문했던 역사적인 건물2020년 극우 세력의 방화로 화마에 휩쓸렸고 타다만 건물의 벽에는 낙서가 가득했다 ⓒ 백종인
그러나 나에게 푼타 아레나스라 하면 이곳에서 2시간 배를 타고 가서 본 마그달레나(Magdalena) 섬의 펭귄이 먼저 떠오른다. 이보다 더 사랑스럽고 귀여운 생명체가 지구상에 또 있을까?
1월이면 이곳은 여름이지만 지구의 남쪽 끝인 푼타 아레나스는 최고 기온이 고작 15도 안팎에 비와 사나운 바람이 일상인 듯했다. 아침 9시 30분, 푼타 아레나스 항구를 떠난 배는 거친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를 헤치고 2시간 후 목적지인 마그달레나섬에 도착했다.
키 70cm에 몸무게 3~6kg 펭귄

▲마중 나온 팽귄들마치 우리에게 환영 인사를 하려는 듯 펭귄 떼가 바다에 줄지어 서 있다 ⓒ 백종인
섬에 발을 내딛는 순간, 마치 우리에게 환영 인사를 하려는 듯 펭귄 떼가 바다에 줄지어 서 있는 광경이 펼쳐졌다. 뜻밖의 환영과 사랑스럽고 귀여운 모습에 반한 사람들은 환성을 내지르며 정신없이 휴대전화를 갖다 대느라 좀처럼 이동하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생명체인 펭귄서 있는 모습이 막 학교에 가기 시작한 어린이 같다 ⓒ 백종인
마그달레나 펭귄은 키 70cm에 몸무게가 3~6kg인 공식적으로도 세계 18종류의 펭귄 중 가장 귀여운 종족으로 알려져 있다. 자연 속에 서식하는 펭귄을 방해하지 않도록 우리는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자연 속의 펭귄 모습을 눈과 카메라에 담고 가슴에 새겼다. 어디를 가는지 뒤뚱뒤뚱 혼자서 혹은 무리를 지어 걸어가는 모습을 티브이나 극장의 화면에서가 아닌 같은 공기를 마시며 직접 본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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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펭귄들의 즐거운 학교 생활 모여 있는 펭귄들 모습이 학교에서 선생님이 뭔가 가르치는 모습 같기도 하고 꾸지람하는 모습 같기도 했으며 네 마리 펭귄은 알겠다는 듯 대꾸하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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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종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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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실감 나는 펭귄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간직할까 하며 눈을 굴리고 있을 때, 네 마리의 펭귄이 둘씩 짝지어 마주 보고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들 앞에는 좀 더 커다란 어른처럼 보이는 펭귄이 날갯짓하며 무슨 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마치 학교에서 선생님이 뭔가 가르치는 모습 같기도 하고 꾸지람하는 모습 같기도 했으며 네 마리 펭귄은 알겠다는 듯 대꾸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과정을 카메라에 담은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알을 품고 있는 어미 퓅귄펭귄들은 땅바닥에 커다란 구멍을 파서 집을 만들고 그 안에서 알을 품는다 ⓒ 백종인

▲아직 솜이 보송보송한 새끼 펭귄들엄마 펭귄에게 야단을 맞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백종인
펭귄은 땅바닥에 커다란 구멍을 파서 집으로 삼는지 여기저기에 작은 굴처럼 생긴 구멍이 나 있었다. 어미 펭귄들은 그 안에서 알을 품고 있었고 아직 솜이 보송보송한 새끼 펭귄들은 구멍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다.
엄마 펭귄이 새끼들에게 뭐라 속삭이기도 하고 부리로 열심히 쓰다듬는 모습도 보였다. 서로 사랑을 나누는지 두 마리 펭귄이 마주 서서 부리로 뽀뽀하고 다른 펭귄 한 마리가 그 사이에 서서 부러운지 열심히 쳐다보는 광경을 볼 때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펭귄의 노는 모습에 넋을 잃고 있는 사이 빗줄기가 강해지고 바람이 더욱 세졌다. 한 무리의 펭귄들이 사람들을 향해 겁 없이 걸어오고 사람들은 규칙에 따라 펭귄에게 길을 양보했다.
너무 아쉬운 한 시간의 관찰 시간

▲마그달레나 섬에 서식하고 있는 다시마 갈매기갈매기는 날 수 없는 펭귄들에게 자랑이라도 하듯 하늘 높이 날고 있다 ⓒ 백종인
마그달레나섬에는 펭귄 외에도 여러 새가 서식하고 있었는데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녀석은 등이 검고 노란 부리 끝에 붉은 점이 있는 다시마 갈매기였다. 갈매기는 날 수 없는 펭귄들에게 자랑이라도 하듯 하늘 높이 날고 있었다. 갑자기 "꺄악"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 쳐다보니 큰 갈매기 한 마리가 아직 날기가 서툰 새끼 갈매기를 무섭게 쪼아 쓰러뜨리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다른 갈매기가 와서 맥없이 쓰러진 새끼 갈매기를 마저 쪼아 먹었다. 자연의 섭리지만 보는 순간은 끔찍했다. 그래서인지 무서운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어린 새끼를 보호하고 있는 갈매기들이 보였다. 영화 <마더>에서 "너는 엄마도 없니?"라는 대사가 떠올랐다. 역시 모든 새끼에게 엄마는 생명줄 그 자체다. 주어진 한 시간의 관찰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아쉬운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며 추억이라는 선물을 안고 배에 올랐다.
23년 전 야생의 펭귄을 볼 기회를 놓친 후 그 안타까움이 계속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드디어, 그것도 몇 마리가 아닌 수만 마리가 서식하고 있는 남단의 섬에서 펭귄의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 보고 관찰함으로써 인생의 버킷 리스트 하나가 지워졌다. 하이킹을 위주로 생각되는 파타고니아 여행은 첫 시발지인 푼타 아레나스에서 이렇게 펭귄과 함께 한 아름다운 기억을 안고 시작되었다.
덧붙이는 글 | 70대와 60대 후반 남녀 두 쌍이 남반구 땅끝마을이라 할 수 있는 파타고니아를 2주간 다녀왔습니다. 파타고니아의 대표적인 봉우리인 토레스델파이네의 삼봉(Las Torres)과 Fitz Roy의 봉우리(Los Tres)는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다만 두 발로 오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혹은 힘들여 오르지 않아도 되는 훤히 트인 호숫가에서, 이도 힘들다면 멀리 산봉우리 사이로 살며시 모습을 드러낸 장소에서 그저 바라보며 감상하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봉우리입니다. 저희는 앞으로도 계속 여행을 하고 싶어 무리하지 않고 저희 능력에 맞춘 여행을 하고 왔습니다. 4회에 걸쳐 파타고니아 여행 이야기를 펼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