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작마을 노거수. 광주광역시 광산구 우산동 대광아파트 로제비앙과 광산교회 사이에 있다. ⓒ 이돈삼
"어른들은 목욕재계하고, 옷도 이쁘게 차려입고, 동네잔치였어. 먹을 것도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 많이 얻어 먹었는디… 근디 이제, 다 옛날 일이여. 지금은 제사 안 지내. 몇 년 전부터 안 지냈지."
정병호 어르신이 들려준 서작마을의 정월대보름 당산제 이야기다. 서작마을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우산동에 속한다. 어르신은 서작마을에서 나고 자랐다고 했다. 정병호 어르신 등 당산나무 쉼터에서 만난 몇몇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당산제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

▲몇 해 전까지 정월대보름이면 당산제와 함께 제사상을 받은 서작마을 노거수. 대광아파트 로제비앙과 광산교회 사이에 서 있다. ⓒ 이돈삼
당산제는 해마다 지냈다. 먼저 마을회의를 통해 화주와 제관을 뽑았다. 화주와 제관으로 뽑힌 사람은 가려야 할 것이 많았다. 궂은일은 멀리해야 했다. 초상집에도 가지 않아야 했다. 서로 화주를 맡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다. 이후엔 하릴없이 노인회원들이 맡았다.
비용은 마을 소유의 논을 빌려준 대가로 충당했다. 논을 팔아 마을회관을 지은 뒤로는, 회관 임대료로 충당했다. 당산제 비용은 큰돈이 들어가지 않았다. 옛날처럼 돼지를 잡는 것도 아니고, 음식도 간소하게 준비하기 때문이다.
'붕알전'으로 비용을 충당하던 때도 있었단다. 마을사람들이 곡식을 십시일반 모아 비용으로 썼는데, 남자들만 냈다. 하여, '붕알전'이다. 어르신들이 어렸을 때의 이야기라고 했다.
당산제에 쓸 제물을 살 때도 값을 흥정하지 않았다. 물건을 파는 장사꾼도 좋은 물건을 골라서 줬다. 화주의 집에서 제물을 장만하는 과정은 청결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화주는 마을 공동우물의 물로 목욕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제물을 장만하는 화주 외에, 다른 주민들의 공동우물 출입도 막았다.

▲광주 서작마을 노거수. 몇 해 전까지 정월대보름이면 당산제와 함께 제사상을 받았지만, 대규모 택지개발 이후 주민 쉼터로 변했다. ⓒ 이돈삼
당산제를 지내기 사흘 전에는 당산 주변과 마을의 고샅, 화주의 집 앞, 공동우물 등에 금줄을 쳤다. 금줄을 친 이후엔 생선 같은 비린 음식을 먹지 않았다. 화주는 물론 마을주민들도 모두 그렇게 했다. 예부터 내려온 전통이었다.
정월대보름 전야가 되면 화주는 또다시 목욕을 했다. 날이 어두워지면, 참기름 불을 바가지에 담아 우물에 띄웠다. 일년 열두 달 물이 마르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쌀과 미역을 섞은 맑은 죽을 쑤어 고샅에 뿌리기도 했다. 액운을 막아준다는 믿음에서다. 이 풍습을, 보름달 구경과 한데 어우러져 '달궁'이라고 했다.
당산제를 지낼 시간이 가까워지면 화주는 밥을 짓고 국을 끓였다. 흰떡과 설기떡도 했는데, 간을 일절 하지 않았다. 제사 지낼 시간이 되면, 화주의 부인은 공동우물에서 참기름 불을 가져왔다. 그는 참기름 불을 담은 시루를 머리에 이고, 화주는 제물이 든 대바구니를 들고 당산으로 향했다. 그 뒤를 제물과 풍물패가 따랐다.

▲광주 서작마을 노거수. 도심 아파트와 어우러져 주민 쉼터로 자리매김했다. ⓒ 이돈삼
제사상을 받은 서작마을의 팽나무는 당산 할아버지 나무다. 옛날엔 할머니 당산나무도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사람들이 베어버렸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서작과 동작은 본디 한 마을이었다. 당산제도 서작의 할아버지 나무와 동작의 할머니 나무에서 따로 지냈다. 마을의 공동우물도 함께 이용했다. 다만 제사 지내는 시간을 달리했다. 서작마을의 당산 할아버지 나무는 '고정자나무'로 불린다. 마을에 처음 들어온 장흥 고씨가 심었다고 이름 붙었다.
고정자나무에 전해지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어느 날, 마을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이 소 한 마리를 훔쳐 끌고 가는데, 나무 주변만 빙빙 돌았다. 도둑은 발을 동동 굴렸지만, 마을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 동이 트고, 때마침 논으로 향하던 마을사람한테 붙잡혔다. 사람들은 당산나무가 소도둑을 잡아줬다고 믿었다.
다른 얘기도 전해진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한테 놋그릇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마을사람들이 나무 아래에다 놋그릇을 숨겨 무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국전쟁 때 죽은 사람이 없었던 것도 당산나무가 돌봤다는 얘기도 있다. 당산나무의 나뭇잎이 한꺼번에 피면 풍년이 들고, 그렇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는 얘기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당산나무와 정자가 한데 어우러진 광주 서작마을. 지금은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 단지가 시야를 가리지만, 예전엔 전망이 정말 좋았다고 한다. ⓒ 이돈삼
당산나무 아래에 쉼터가 있다. 이른바 '고정자'다. 지금은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 단지가 시야를 가리지만, 예전엔 전망이 정말 좋았다. 무등산도 훤히, 가까이 보였다.
"옛날엔 초가 세 칸짜리 정자였어. 대나무를 엮어서 마루를 만들었지. 동네사람들이 다 함께 이엉을 엮고, 지붕도 올렸어. 집집마다 나와 울력으로 했어. 마을 어르신들의 쉼터였지. 우리는 그때 어려서, 얼씬도 못했어. 주변에서 소를 많이 키웠고, 소를 매어두기도 했는디. 논밭에서 일하다가 오신 어르신들은 쉬면서 막걸리도 한 잔씩 허고. 지나가는 지게꾼이나 리어커꾼도 쉬어가곤 했는디. 그때는…."
정병호 어르신의 회고다. 어르신은 그때 그 시절이 그립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추억 속의 풍경으로만 남았다. 마을의 공동우물도 벌써 수십 년 전에 없어졌다. 1970년대 이후 새마을사업과 토지정리, 도시개발 등으로 모두 사라졌다. 마을 앞으로 흐르던 개울도 덮여 도로가 됐다.
마을의 골목 담벼락에 장식된 타일벽화를 통해 옛 모습을 짐작할 뿐이다. 동작마을 공동우물 터에는 빨래하는 엄마, 양동이에 물을 긷는 아빠, 그 옆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장식돼 있다. 배시시 웃음을 짓게 한다. 우물 터 위쪽에 보리마당의 흔적도 그대로다. 옛사람들이 수확한 보리를 말리던 넓은 땅이다. 지금은 빈터로 남아있다.

▲옛 공동 우물을 떠올려주는 골목 타일벽화. 양동이에 물을 긷고 빨래하는 모습 등이 새겨져 있다. ⓒ 이돈삼
서작마을의 노거수는 잉계마을에 있다. 대광아파트 로제비앙과 광산교회 사이다. 잉계(孕鷄)마을은 지형이 소의 생김새를 닮았다는 우산동에서도 오래된 마을이다. 암탉이 알을 품은 형국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조선 초기에 장흥 고씨가 처음 들어와 정착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김극추가 옮겨오면서 마을이 커졌다. 옛 지명에 '들개', '배나드리'가 있는 것으로 미뤄 큰 포구가 있었다. 서작과 동작으로 나뉜 것도 지역이 넓고 사람들이 많아서였다.
마을사람들은 넓은 농지에서 벼농사를 주로 지었다. 수리시설이 좋아 수확량도 많았다. 큰물이 나도 안전한 지역이었다. 다른 마을에서 부러워하는 부자마을이었다. 근대에는 수박, 참외를 많이 재배했다. 가을엔 무를 많이 심으며 도시근교 농업을 해왔다.
부자가 많고, 부자마을이었지만, 집집마다 대문이나 울타리가 거의 없었다. 있더라도 장식용이 대부분이었다. 도둑이 없는 마을로도 유명했다.
1980년대 중반에 대규모 택지 개발이 이뤄지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상무신도심과 연결되는 80m 도로를 타고 업무지원 시설이 많이 들어서고, 차량 통행도 크게 늘었다. 자연스레 상공업이 발달했다. 원예단지와 화훼단지는 아직 건재하다.

▲도심 속 마을 안길. 발걸음을 옮기면 옛 마을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 이돈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