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는 적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인간을 제가 의도치 않았던 목표로 이끈다고, 그리고 그와 같은 의도가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말이다. 인간이란 대부분 한심하여서 사회의 이익을 의도적으로 늘리려 할 때보다도 자신의 이익에 골몰할 때 도리어 사회의 이익을 크게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명저 <국부론>이 적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에 얽힌 이야기다.
과연 스미스는 훌륭한 학자였고, 그의 판단은 옳았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지난 두 번의 세기 동안은 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모든 시대, 모든 환경을 관통하는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단 사실을 우리는 현대 물리학에서 채굴해냈다. 스미스와 그의 사상 위에 쌓아올린 자본주의 또한 마찬가지. 아주 많은 경우 참이고, 그로부터 인류에게 이제껏 경험한 가장 윤택한 삶을 안겨준 '보이지 않는 손' 이론 또한 그 한계가 명백해졌다. 자본주의는 스스로가 낳은 문제를 더는 해소하지 못한다.
임금노동의 위기와 부의 편중, 극우정치의 도래, 환경파괴와 기후위기 등 지난 시대 자본주의로부터 파생된 온갖 문제가 인류의 오늘을 위협한다. 그저 위협하는 정도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생존을 의심케 한다. 각자가 알아서 잘 사는 것만으로는 해소할 수 없는 위기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구하려는가.

▲부처스 크로싱책 표지 ⓒ 구픽
미개척 서부로 떠난 하버드 대학생
<부처스 크로싱>은 존 윌리엄스의 소설이다. 저자가 죽고 한참이 흐른 뒤에야 세계적 명성을 얻은 <스토너>의 저자로 존 윌리엄스는 문학애호가들 사이에서 기억되는 인물이다. 각별히 그의 작품을 아끼는 나는 존 윌리엄스가 이제껏 받아온 평가보다 훨씬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문학상을 받은 이들 명단을 줄줄이 읊어도 그보다 나은 작품을 인류에게 선사한 이가 채 한 줌도 되지 않는다 여기기 때문이다.
1960년에 출간된 <부처스 크로싱>이 한국에 소개된 건 그래서 매우 값진 일이다. 일생 오직 네 편의 작품만을 발표한 과작의 소설가가 세상에 내어놓은 두 번째 작품으로, 혹자는 그 제목으로부터 부처와 피안의 깨달음이 담긴 불교서적이 아니냐고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은 '부처스 크로싱 Butcher's Crossing'이란 미국 서부의 옛 마을이 있는 것이고, 영제에서 알 수 있듯 이는 짐승을 잡는 이들이 오가며 머물던 곳이었단 이야기다.
소설은 서부개척이 한창이던 1870년대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한다. 하버드 대학교 3학년을 마친 윌 앤드루스는 학업을 그만두고 가진 돈을 끌어 모아 서부로 향한다. 아버지와 옛 연을 가졌다는 사업가 맥도날드에게 전하는 한 통의 소개서가 그가 기대는 전부다. 맥도날드가 있다는 부처스 크로싱에 도착해 그에게 소개서를 전하고는 이내 마을을 제대로 소개해 줄 수 있는 이가 있느냐 묻는다. 사냥꾼 밀러와 앤드루스는 그렇게 처음 만난다.
소설은 밀러의 계획 아래 앤드루스가 돈을 대서 만든 들소 사냥대의 이야기다. 말이 사냥대지 밀러를 대장으로 가죽을 벗기는 슈나이더와 베이스캠프를 관리하는 찰리 호지, 물주이자 초짜인 앤드루스까지 네 명이 고작이다. 이들은 십 년 전 어마어마한 들소 떼가 출몰하는 터를 봐두었다는 밀러의 기억에 의지한 채 기댈 무엇도 없는 황무지를 가로지른다.
들판을 가득 메웠던 소떼가 사라진 시대
한때 서부엔 들판을 가득 메운 소떼가 있었다고 전한다. 검은 점처럼 가득 퍼진 소떼가 움직일 때면 마치 검은 파도가 들판을 밀어가는 듯 느껴질 정도. 천적이 보이지 않던 소떼는 인간들이 서부로 넘어온 뒤로 급속히 줄어가기 시작한다. 들소가죽으로 만든 외투가 인기를 끌자 가죽이 비싼 값에 팔려나갔고 사냥꾼들은 너나할 것 없이 들소 사냥대를 꾸려 소떼를 사냥하기 시작한다. 불과 십 수 년 만에 그 많던 소떼를 찾아보기 어렵게 된 건 자연스럽기까지 한 일이다. 밀러가 앤드루스와 함께 사냥에 나선 때가 꼭 그 어느 즈음으로, 이제는 만나기 힘들다는 소떼의 행방을 좇아 밀러의 인도 아래 길을 떠난 것이다.
소설은 그로부터 이들이 마주한 몇 번의 계절을 그린다. 밀러가 보았다던 들소로 가득한 계곡을 찾아 이들은 록키 산맥자락을 향하여 우마를 몰고 나아간다. 이들에겐 거듭 위기가 닥치는데, 마실 물이 떨어져 가축이 나아가지 않고 사람도 갈증을 겪는 것이 처음이다. 밀러와 늘 붙어 다녀온 찰리야 문제될 것이 없지만, 이번 사냥을 위해 데려온 슈나이더는 사사건건 불만이요 시비다. 오래 전 기억에 의지해 물을 찾는 것만도 어려운 일인데 슬슬 시비를 걸어오는 슈나이더를 달래가며 사냥대를 유지하는 밀러의 고생이 만만찮게 느껴진다.
마을을 떠난 지 한참이 지나 이들은 밀러가 보았다던 계곡에 접어든다. 밀러의 말이 사실인지, 그저 들소사냥에 미친 허황된 인간인지를 알 수 없는 채로 이어져온 여정이 계곡에 들어서며 그 진실을 드러낸다. 사냥대가 계곡 안에서 마주한 건 이제는 어디서도 볼 수 없다고 믿었던 어마어마한 숫자의 들소 떼다. 심지어 계곡은 들어오는 입구만 있을 뿐 나갈 때도 같은 곳을 지나야 하는 협곡이다. 사냥대는 입구 근처에 베이스캠프를 차려두고 곧장 사냥에 나선다.
'조금 전만 해도 당당하고 고귀하며 생명의 위엄으로 가득했던 존재가 이제 속절없이 가죽이 완전히 벗겨진 채 죽은 고깃덩이가 되어, 존재 자체 또는 그 존재에 대한 앤드루스의 개념을 완전히 빼앗긴 채 기괴하게 조롱하듯 눈앞에 걸렸기 때문에 구역질이 나서 도망쳤다. 그것은 들소 자신도, 앤드루스가 상상했던 들소도 아니었다. 그 들소는 살해당했다. 앤드루스는 그 살해를 통해 자기 안에 있던 무언가가 파괴되는 걸 느꼈다. 그걸 마주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 188p
사냥은 예상이며 기대를 완전히 벗어난다. 독자와 앤드루스가 얼마쯤 예상하고 또 얼마쯤 기대했을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기척을 죽인 채 한 들소무리 곁에 접근한 밀러는 먼저 우두머리인 늙은 수컷 들소를 찾아내 한 방에 쏘아 죽인다. 그리고는 명령을 내릴 이가 사라져 빙빙 돌기만 하는 소떼를 향해 한 발씩 쏘아 한 마리 한 마리를 죽여 가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제가 쏘아죽일 수 있을 만큼의 들소를 죽여 버린다.
들소를 사냥해 가죽을 벗기고 그를 옮겨다 팔아 돈을 버는 일련의 과정은 독자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린다. 미지의 땅에서 거센 육체를 가진 생물을 잡아내는 사냥을 기대했던 이는 처음엔 실망했다 나중엔 충격을 받고 종국엔 앤드루스가 그러했듯 적응하게 될 밖에 없는 일이다. 앤드루스는 밀러의 사냥을 살해라고 말한다. 독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그는 도살이며 차라리 일방적 학살이라 불러야 마땅할 참극인데, 밀러는 멈추지 않고서 계곡 안에 갇힌 수천마리의 들소를 오랜 시간을 두고 차근히 죽여가는 것이다.
성장과 모험,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우화
<부처스 크로싱>은 그저 어느 작은 사냥대가 대박을 치는 이야기쯤에 머물지 않는다. 들판을 가득 메운 소떼가 어떻게 줄어갔는지를 알도록 하고, 또 그 소떼가 모두 사라진 뒤의 파국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게끔 한다. 황무지로 나아가 고생하며 들소를 쏘고 가죽을 벗기는 이보다도 도시에 앉아 그 가죽을 사는 이들이 더욱 부유해지고, 그렇게 창출된 부가 커지면 커질수록 들판은 휑하니 비어가는 모습을 소설은 짐작토록 하는 것이다.
소설은 어느 각도에선 성장드라마이고 어느 면에선 모험기이며, 또 어떻게 보자면 시대를 비틀어 그리는 블랙코미디처럼 읽힌다. 처음 부처스 크로싱에 도착해 뜨거운 물로 몸을 씻던 청년 앤드루스가 첫 사냥 뒤 잡은 들소의 각을 뜨다가 그 핏물을 뒤집어쓰고 계곡에서 옷을 벗고 몸을 씻는 두 장면은 얼마나 문학적이고 상징적으로 마주하는가. 진실에 다가서면 설수록 순수함을 유지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보이고, 그를 성장이라 부르고 있는 부조리함을 부각하지 않는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존 윌리엄스가 본다면 어떤 작품을 써낼지가 궁금하다. 지구상엔 어느 때보다 많은 짐승들이 살고 있지만, 그 대다수는 우리가 먹는 축산업의 자산이다. 더 값싸고 맛있는 고기를 먹기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짐승들을 빠르게 살찌우고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가. 그 과정에서 수만, 수십만의 짐승에게 전염병이 돌고 그를 산채로 땅 아래 파묻으면서도 우리는 음식점에 앉아 그 광경을 떠올리지 않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진단 사실조차도 우리는 알고자 하지 않는다. 그를 통해 이룩되는 것은 부처스 크로싱을 찾은 하버드 중퇴생 앤드루스가 가졌던 것과 꼭 같은 순수함이 아닌가.
이 땅에 살던 야생동물 대부분이 설 자리를 잃고, 그나마 남은 것은 농수로에 빠져 죽거나 차에 치여 죽거나 건물 벽면에 부딪쳐 죽거나 인간 사는 곳으로 내려와 총에 맞아 죽는다. 황무지를 허하지 않는 인간은 끊임없이 땅을 개척하고 사냥하며 개간한다. 그리하여 이룩한 오늘의 세상을 우리는 인간의 번영이라 자랑스레 내보인다. 저기 파묻힌 동물의 썩은 물이 바다로 흘러가고 또 인간이 차마 처리하지 못한 온갖 쓰레기가 땅과 바다 아래 버려진단 사실을, 그 모두가 우리의 번영 뒤에 감추어진 자본주의의 마땅한 귀결이란 것을 존 윌리엄스의 소설은 우아하게 그려낸다.
가죽이 벗겨진 채 들판에 버려져 썩어가는 수천 마리 들소의 몸뚱아리를 떠올린다. 인간이 스스로의 욕망을 실현할 때 세상은 어찌될 수 있는가를 이 광경이 보여준다. 나는 <부처스 크로싱>을 자본주의에 대한 우화라고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