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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 지났다. 이번 명절은 시댁에서 음식 할 일이 없었다. 시댁 식구들과 이수도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이수도는 거제도의 시방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7분만 가면 되는 육지와 가까운 섬이다. 걸어서 한두 시간이면 섬 전체를 다 돌아볼 수 있는 그리 크지 않은 섬인데 섬 곳곳에는 펜션과 민박이 즐비하다.

이수도의 모든 숙소에서는 아침, 점심, 저녁 세 끼를 다 제공한다. 원래 이 1박 3식은 낚시꾼들에게 제공되던 서비스였는데 입소문을 타 유명해지면서 이수도의 모든 숙소에서 1박 3식을 제공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주 매력적인 조건인데 가격도 합리적이다.

우리 가족은 명절마다 부산 시댁에서 2박 3일을 머문다. 첫째 날과 마지막 날은 그냥 시댁에서 지내지만 둘째 날은 그 근처에 갈 만한 곳을 둘러본다. 결혼한 지 15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부산에 둘러볼 만한 곳은 다 둘러본 지 오래다. 부산뿐 아니라 경주, 거제, 울산까지 다 돌아보았다. 그렇다고 2박 3일 내내 시댁에만 있을 수는 없다. 끼니 때는 아주 빨리 돌아오고, 심심한 아이들은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않는다.

그런데 이수도 1박 3식 펜션이라니. 이보다 더 좋은 대안이 어디 있을까. 섬에는 둘레길이 잘 되어 있어 식사 후 섬을 한 바퀴 걷거나 방파제에서 낚시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오래된 드라마 촬영지나 테마파크를 둘러보는 것보다 몇 배는 나을 것 같다. 남편은 이수도 펜션 예약이 어렵다는 얘길 듣고 설 명절 두 달 전에 이미 이수도의 한 펜션을 예약해 두었다.

할 거라곤 먹고 쉬는 것뿐

이수도 둘레길 풍경 둘레길을 따라가다 보면 바다, 들판, 숲 등 다채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이수도 둘레길 풍경둘레길을 따라가다 보면 바다, 들판, 숲 등 다채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 김지은

드디어 명절 연휴. 시댁 식구들은 이수도로 가는 배가 있는 시방 선착장에 모였다. 배는 오전 8시부터 2시간마다 있는데 사람이 많을 때는 배의 정원만큼 인원이 모이면 바로 배가 뜬다. 그 덕에 우린 11시 조금 넘어 배를 탈 수 있었다. 배가 출발했나, 싶었는데 바로 도착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점심을 먹으러 펜션 1층으로 내려갔다. 생선찜과 조개찜, 간장게장 등 제철 해산물로 구성된 상차림이 아주 알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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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잠시 쉬다가 둘레길을 걸었다. 아이들을 챙기며 쉬다가 걷다가 하니 다 둘러보는데 한 시간 남짓 걸렸다. 남편과 아주버님은 섬의 슈퍼에서 낚싯대를 빌려 방파제에서 낚시를 했다. 남편은 어디선가 이수도에서 고기가 잘 잡힌다는 얘길 들은 모양인데, 아쉽게도 초보 낚시꾼에게 잡히는 눈먼 고기는 없었다.

추운 날씨에 돌아다니니 몸이 금세 노곤해졌다. 따뜻한 방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는데, "밥 먹으러 오세요" 하는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펜션 1층에 내려가니 또 풍성한 상이 차려져 있다. 우럭, 광어, 산낙지, 멍게, 전복, 새우튀김 등이 우릴 반긴다. 젓가락이 쉴 새가 없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저녁엔 혹시나 심심할까 싶어 준비해 온 게임을 하고, 별구경도 하러 나갔다. 섬에 자동차가 다니지 않아서인지 날이 흐렸는데도 별이 잘 보였다.

이수도 펜션의 저녁 식탁 1일 3식 중 저녁 식탁의 사진. 매운탕이나 김치 등은 아직 올라오지 않은 상태다.
이수도 펜션의 저녁 식탁1일 3식 중 저녁 식탁의 사진. 매운탕이나 김치 등은 아직 올라오지 않은 상태다. ⓒ 김지은

그다음 날 아침에도 1층에 내려가니 잘 차려진 밥상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식사 시간에 맞춰 펜션 1층에 내려가는 것. 차려진 밥을 맛있게 먹고 더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더 달라고 요청하는 것뿐이다.

여태까지의 명절 중에서 가장 깔끔하고 재미있었다. 그런데 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아쉬운 거다. 이 아쉬움의 근원이 뭘까. 놀랍게도 아무런 노동도 하지 않고 누가 차려주는 음식을 세 끼 연속으로 먹은 것이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요리를 하기 싫은 집안일 중 두 번째로 꼽는 사람인데 이게 무슨 일일까(첫 번째는 화장실 청소다).

물론 명절 음식 준비가 힘들긴 하지만, 이렇게 할까요, 저렇게 할까요, 이렇게 하니 더 맛있네요, 하고 오랜만에 만난 친지들과 소통도 하고 깔깔 웃기도 하는데 이런 과정이 빠지니 아쉬운 거다.

펜션 1층에 차려진 음식을 먹는 건 식당에 가는 것과는 또 다르다. 식당은 맛있는 곳을 검색하고 거기까지 이동하는 노력도, 서로가 메뉴를 고르며 조정하는 과정도 있는데 여기는 그 모든 것이 필요 없다. 명절 노동이 몇 명에게만 몰리는 게 싫었던 거지, 이렇게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란 건 아니었나 보다.

기승전이 있을 때 빛나는 결의 가치

예전에 <알쓸신잡2>에서 봤던 유현준의 '부석사의 기승전결'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유현준은 '빽빽한 숲을 지나 108계단을 오르면 눈앞에 부석사 무량수전'이 나타난다며 이것을 부석사의 '기승전결'이라고 했다. 건축가는 힘들게 숲을 지나고 계단을 올라 부석사를 만나도록 의도했다. 그런데 요즘엔 숲의 자리에 주차장이 있어서 감흥이 덜해졌다고 아쉬워했다. 건축의 '기승전결'의 시퀀스가 무너졌다며 모든 건축은 최종 목적지보다 그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기승전결'이 비단 글과 건축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일에는 '기승전결'이 있다. 앞의 '기승전'이 있을 때 '결'의 가치가 빛난다.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올라서 본 풍경과 등산을 해서 정상에 올라서 본 풍경은 같지만 무척 다르다.

난 이제야 남편이 명절에 자신의 본가에 가면 잠만 자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매번 '기승전'이 없는 '결'만 누린 것이다. 반면 여자들은 '승'이나 '전'에 지쳐서 제대로 '결'을 즐기지 못했다.

모두 함께하며 가벼운 '기승전'과 즐거운 '결'을 맘껏 누리는 명절을 상상해본다. 같은 노동이라도 함께하면, 그 노동은 훨씬 가벼워지고 재미있어진다. 그러니까, 이 기사는 얼핏 보면 기행문 같지만 사실은 초대장이다. 뭔지 모르게 명절이 아쉽다고 느꼈던 남편에게 보내는 초대장.

요리의 과정에 조금이라도 참여하고 음식을 먹으면 말이지, 음식이 훨씬 맛있어. 음식에도 '기승전결'이라는 게 있거든.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이수도#이수도1박3식#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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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whitekje) 내방

아이들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살아 갈 세상이 지금보다 조금 나아지기를 바라며 내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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