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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넛 경제학>(케이트 레이워스, 2018)에서 시작된 도넛도시 모델은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기본적 필요를 충족하면서도 지구생태계의 행성적 한계를 지키는 도시를 일컫는다. 도넛도시에서는 소득, 일, 주거, 교육, 보건, 문화 등 구성원의 기초적 필요를 효율적으로 충족하기 위해 공공 영역을 강화하는 전략이 우선시된다.

도넛 경제학을 적용한 도넛 워크숍에서는 두 개의 원으로 된 '도넛' 모양 도시 초상(city portrait)을 그린다. 안쪽 원은 사회적기초, 바깥 원은 행성적 한계선을 의미하는데 참여자들이 다양한 지표를 참고하면서 결핍, 적정, 과잉을 표시한다. 중요한 것은 엄밀한 초상을 그리는 것보다 지역사회의 문제점에 함께 공감하면서 대안을 도출해나가는 과정이다.

'도넛도시'의 상상은 도시가 아닌 농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농민들은 이미 이상기후로 인한 생산성 악화와 온열질환의 증가 등 고충을 겪고 있다. 이에 더해 고령화와 인구감소는 시시각각 소멸 위기를 현실화하고 있다. 기후위기 그리고 소멸위기의 농촌 사회에서 주민들이 충분히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안고 홍성군 결성면으로 향했다.

지표를 통해 본 홍성군 결성면

충남연구원이 개발한 마을소멸지수로 측정했을때 홍성군은 충남에서 세 번째로 소멸위험마을이 많은 지역으로 나타났다. 홍성군에서도 결성면은 더 열악한 편에 속한다. 결성면 인구는 총 2220명, 총 가구수 1153가구인데, 이 중 529가구(46%)가 1인 가구이며, 380가구는 60세 이상 1인가구이다. 세 집 중 하나는 고령의 노인이 홀로 거주하고 있는 셈이다.

고령자들의 경제적 상황도 여유롭지 않다. 결성면 65세 이상 인구 1066명 중 무려 884명(82%)이 기초연금수급자로 노인빈곤율이 높은 편이다. 농가 가구 532가구 중 415가구(78%)는 전업농가로 농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데, 농가인구의 72% 이상은 60세 이상으로 확인된다.

여느 농촌지역과 유사하게 홍성군의 대중교통은 부족하다. 2022년을 기준으로 시내버스는 51대, 시외버스는 39대 정도에 불과하다. 인구감소에도 불구하고 자동차는 2018년 5만 2000대에서 2022년 5만 6000대로 늘었다. 주택은 양적으로는 충분하다. 결성면의 주택보급률은 116.7%로 나타났다. 그런데 30년 이상 노후주택 비율이 전체의 65%를 넘는다. 빈집이 방치되고 있거나, 주택의 에너지 효율이 낮아 냉난방 비용부담이 늘어날 수 있다.

홍성군의 기후변화도 심각하다. '기후전망보고서'(기상청 2023)에 따르면 기후변화대응에 최선의 노력을 한다 해도 2050년경 홍성군은 최근 10년 평균보다 폭염일수는 약 3배, 열대야일수는 약 8배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온열 및 한랭질환, 전염병의 위험 그리고 냉난방 에너지 수요 증가가 불가피하다. 서리일수, 한파일수, 결빙일수의 감소, 집중호우의 증가 등으로 인한 농업재해의 증가도 예측된다.

2020년 기준 홍성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충남의 1.7%(국가전체의 0.2%)로 약130만tCO2eq로 나타났다. 축산 부문과 수송부문의 배출비중이 큰데 축산분야 탄소중립 전략과 교통체계 개편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결성면 주민자치회와 함께 한 도넛 워크숍

연구원들이 파악한 지표로는 결성면의 현황을 알기는 어려웠다. '면' 단위에 대한 조사 결과가 없거나 주민들의 생활세계를 반영하는 지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주민들과의 도넛 워크숍은 진짜 결성면의 초상을 그려보는 데 꼭 필요한 것이었다. 결성면 주민자치회에서 활동하는 주민 20여 분이 주거, 건강, 교통, 농업 4개의 모듬을 구성해 결성면의 현황을 그려보고, 구체적인 제안들도 제시해주셨다.

주민들에게 '도넛'이나 '도시초상'의 개념들은 낯선 것이었지만 결성면의 현황을 함께 짚어보고 대안을 찾자는 취지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셨다. 특히 한 주 전, '저탄소' 농축산업에 대한 교육이 있었던 터라 기후변화와 에너지전환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농수축산신문, 홍성군 결성면, 저탄소 농축산업 전환을 위한 교육 실시, 2024.11.27).

워크숍은 크게 두가지 질문에 답하는 방식이었다. 첫째, 주거, 건강, 교통, 농업 등 4개 영역에서 결성면의 인프라는 충분한가요? 둘째,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며, 온실가스를 줄이고 환경을 지키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나요?

결성면의 초상 - '고립'의 위험공간

주민들은 무엇보다 아플까봐 걱정이었다. 질병이 발견되면 큰 병원에 가야겠지만, 사실 소소하게 아프지 않은 날은 없다. 매번 큰 병원에 갈 수는 없으니, 보건소가 중요한데 열지 않는 날이 많고, 보건소가 닫혀있을 때 가야하는 일반 약국에는 취급하지 않는 약이 많다. 한밤중, 혼자 있을 때 위급한 상황이 온다면, 운전해 줄 사람도 없고 병원이 닫혀 있다면 어떡하나 하는 상상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거동이 힘들어져 요양시설에 들어가는 문제를 여쭙자, 아무리 적게 내도 한 달 80만 원은 들어간다며 경제적 부담부터 말씀하셨다.

신체의 노화와 병도 걱정이자만, 고독감도 작은 문제가 아니다. 자녀들은 성장해서 떠나고 홀로 지내니 무엇보다 외롭다. 이웃이 있어 정겨울 것만 같지만,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관계인만큼 오히려 속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것이 쉽지 않아 답답한 마음을 풀 데가 없다고 서글픔을 토로하는 분도 계셨다. 신체의 건강만이 아니라 정신건강을 돌보는 인프라가 부재한 것이다.

교통의 문제는 고독을 고립으로 심화시키고 있었다. 자가용이 늘어난만큼 각자 이동하는 데는 문제가 없으리라 짐작했었는데 오산이었다. 운전면허증이 없는 주민들 특히 여성 노인들의 경우 면사무소에 한번 가려해도 이웃에 도움을 청하거나 하루 한 번 다니는 버스를 기다려야 한다. 80세 이상 고령자 중엔 면허증을 반납해 더이상 운전할 수 없는 분들도 있었다. 심지어 14명의 재학생이 있는 결성초등학교에 스쿨버스가 없다고 하니 공공교통의 부족은 노인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가용 없이 결성면에서 잘 살기는 불가능해보였다.

녹색전환연구소 연구원들과 결성면 주민 홍성군 결성면 주민들과 녹색전환연구소 연구원들이 결성면의 공공교통 정책에 대한 도넛 워크숍을 진행하고 사진을 찍었다.
녹색전환연구소 연구원들과 결성면 주민홍성군 결성면 주민들과 녹색전환연구소 연구원들이 결성면의 공공교통 정책에 대한 도넛 워크숍을 진행하고 사진을 찍었다. ⓒ 녹색전환연구소

고립을 넘어, 탄소를 넘어

주민들의 제안은 '함께'라는 말로 모아졌다. 노인요양시설이라면 결성면에도 2개가 있고 76명이 입소된 상태이다. 하지만 들어가면 죽어서 나온다는 노인요양시설이 아니라, 고독과 외로움을 이기고 서로를 돌보며 일상을 영위하는 생활공간을 바라고 계셨다. 노인요양 공동생활가정은 홍성군 전체에 3개가 있지만 수용인원은 26명에 불과하며, 결성면에는 한 곳도 없다. 공공생활공간은 부족한 교통문제나 환경문제의 해결에도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집집마다 난방하는 것보다 저탄소에도 맞다고 생각해요. 서로 챙겨주고 건강관리도 되거든요. 뚝뚝 떨어져 사는데, 버스도 자주 없지만 정류장도 멀어서 걸어서 나가기도 힘들어요. 서로 모여 살다보면 버스나 택시 같은 거 연결하기도 좋고요.

결성에 목욕탕이 없어요. 건강하려면 목욕탕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집집마다 하자면 그것도 돈이 많이 들거든요. 노인들이 온수를 막 틀기도 어렵고. 그래서 목욕탕 같은 거는 꼭 있어야 돼요. 옥상에 태양광이나 태양열 연결하면 저탄소로 될 거거든요." - 건강 모둠 참여자 발언 중에서

'목욕탕'이라는 단어가 귀에 쏙 꽂혔다. 건강을 평가하는 사회지표로 흔히 1인당 병상이나, 의료인 수 등을 중요시했던 연구자의 관점과는 달라 신선했다. 그러고 보니 '건강'은 '질병 없음'과 같은 뜻이 아닐테다. 신체적, 정신적 균형을 이루고 만족하며 사는 것이 건강이라면, 병이 나서 갈 곳만큼 중요한 것은 일상에서 마음과 육체를 돌보는 공간일 것이다. 따라서 목욕탕은 핵심적인 건강 인프라였고, 결성면에 시급히 필요한 것 중 하나였다.

주택에 대해서 주민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폐가'였다. 날로 늘어나는 폐가는 마을을 더 을씨년스럽게 하면서 경관을 해치는데, 혹여 새로운 인구의 유입에 걸림돌이 될까봐 우려하는 목소리였다. 지난 날의 기억이 켜켜이 쌓인 마을이 비어가는 것에 속상해하는 주민들의 마음도 읽혔다. 폐가의 신속한 처리를 포함해 농촌 경관을 가꾸는 지자체 정책이 부족해보였다. 뿐만 아니라 노후된 주택에서 거주하는 노인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주거 대책도 필요해보였다.

"도시가스 되는 데는 없고, 화목(보일러)이나 기름인데, 춥다고 보일러를 좀 틀면 너무 빨리 닳아요. 태양광이나 패시브(하우스)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나 혼자 살자고 집 수리하기는 비용도 너무 부담되고. 언제까지 살지도 모르겠고, 나 죽으면 자식들이 와서 살 것도 아닌데. 그냥 이러고 사는 겁니다." - 주거 모둠 참여자 발언 중에서

 홍성군 결성면 주민들이 주거부문에서 탄소배출을 줄이면서도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에너지효율성을 높이는 주택을 만들기 위한 우선과제를 선정하여 발표하고 있다.
홍성군 결성면 주민들이 주거부문에서 탄소배출을 줄이면서도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에너지효율성을 높이는 주택을 만들기 위한 우선과제를 선정하여 발표하고 있다. ⓒ 녹색전환연구소

주민들도 태양광주택이나 패시브 하우스에 대해선 들어봤지만 사비를 들여 리모델링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무엇보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집이 너무 노후한 경우라면 태양광 설치도 불가능하다. 주민들도 땜질식 처방이 답은 아니라며 부정적 의견을 내비치셨다. 당장 난방비를 줄일 수 있다는 단기적 효과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냉난방의 효율성을 높여 에너지비용을 절감할뿐만 아니라 농촌의 경관을 살리고 노령 인구의 주거 복지를 확충하는 장기적인 주거공간계획이 수립되어야 한다.

기후가 이런데 농사를 계속 하려면

기후위기 앞에 농민들은 당황스럽고 혼란스럽다. 언제 파종을 하고, 언제 수확을 해야 할지 정하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쌓아온 농사 경험에 의존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고령의 농민들은 불안하기까지 하다. 농업의 기후변화 적응을 위한 정책들이 많을테지만, 매일 기후위기와 싸우는 농민들에겐 멀기만 하다. 믿고 의지하며 도움을 얻을 데가 가까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느껴졌다. 파종과 수확 시기를 결정하는 데 참고할 수 있는 안내가 주어지기를, 변화될 기후에 적응할 수 있는 품종과 농법에 대한 정보와 지원정책이 제공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기후위기도 걱정이지만, 결국 사람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농사를 짓는 데 기계화가 상당 부분 진행되었다 해도 사람 손이 필요한 일이 많은데, 일할 수 있는 사람은 계속 줄어드는 상황에서 농사일은 힘겹게만 느껴진다. 농촌의 공공자원이 부족해 삶의 기초가 무너지면 새로운 인구 유입은 더욱 어려워진다. 농촌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하면서 농업 인구의 유입을 유도하기 위한 농민정책이 필요해 보였다.

위기를 넘기 위해 무너진 삶의 기초 회복해야

주민들은 '고립'이라는 위험 앞에서도 돈 걱정, 기후 걱정, 건강 걱정에 잠식되지 않는 노년을 바라고 있었다. 공동생활시설, 마을버스, 콜택시, 공중목욕탕, 보건소, 심리상담시설, 패시브하우스 등의 제안들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도넛도시가 지향하는 것이기도 했다. 덧붙여 폐가 정리, 농업예측정보, 농작물보관시설, 농민소득보장 등을 통해 농촌의 인구 유입을 기대하고 있었다.

농업이 지속되고 결성면이 이어지려면 결성면의 삶의 기초가 단단해져야 한다. 이를 위해 주거, 건강, 농업, 교통 등의 생활 영역에서 공공 정책이 확충되어야 한다. 오늘의 주민들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결성면이 될 때, 누군가 결성면의 다음 주민이 되기를 결심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의 정치와 행정이 주민들의 생생한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응답해야 할 것이다.

#녹색전환연구소#홍성군#도넛모델#탄소중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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