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사적지 제21호 청주상당산성 전경 ⓒ 충북인뉴스

▲그래픽=서지혜 기자 ⓒ 충북인뉴스
국가사적지 제212호인 충북 청주 상당산성은 백제시대 조성된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둘레가 자그마치 4.1km에 달하며 성내 면적은 70만4609㎡에 이른다.
청주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전망과 잘 정비된 산성둘레길이 있어 청주시민이 가장 즐겨찾는 명소 중 하나다. 주말이면 시민 3000명 이상이 이곳을 찾는다.
산성 중심부에는 한옥마을을 중심으로 카페와 식당이 즐비하다. 청주시는 2018년부터 40억 원 가까운 예산을 들여 한옥마을 인근에 자연마당을 조성해 산책로와 수변공원을 조성했다. 최근에는 진출입도로를 확장했고, 야간경관조명까지 설치를 마쳤다.
청주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40~60세대에겐 산성을 따라 철쭉이 흐드러지게 필 무렵 소풍과 행군을 다녀온 기억을 간직해주는 공간이다. 지금이야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2005년까지만 해도 이곳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2005년까지의 '주인들'
바로 일제강점기 일제로부터 자작이라는 귀족 작위를 받아 중추원참의를 지냈고, 일제에 비행기를 헌납하는 등 친일반민족행위에 앞장섰던 민영휘(1852~1935, 휘문의숙 설립자)와 그 후손들이다.
상당산성 비운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당산성내 토지 중 최대면적을 자랑하는 토지인 청주시 산성동 산28-1(면적 44만1390㎡)는 1917년 갑자기 민영휘의 소유가 된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임야조사사업을 진행했고, 임야조사부에 뜬금없이 민영휘가 최초 소유자로 등재됐다. 1930년대에서 상당산성이 위치한 청주시 산성동 일대 토지는 계속해 민영휘 일가 수중으로 흘러갔다.
민영휘 일가의 무덤의 묘지기 집터과 있는 산성동 138번지와 142번지의 경우 원래는 마을(산성리, 낭성면)소유였다. 그러다 1930년 갑자기 소유자가 민영휘의 첩인 안유풍으로 변경됐다.
이렇게 민씨 일가가 상당산성 내에 소유한 토지는 확대됐고, <충북인뉴스> 취재를 통해 확인한 것만 56만여 ㎡에 이른다. 전체면적 74만여 ㎡의 80%에 달한다. 실제는 더 많았을 가능성이 높다.
어떻게 시민품으로 돌아왔나?

▲그래픽=서지혜 기자 ⓒ 충북인뉴스
청주시는 2000년대 초반 청주상당산성 사적공원화 사업을 추진하며, 민영휘 일가 등이 소유한 사유지 매입을 추진했다. 이때 민영휘 후손은 "선친 묘소 등이 있다"는 이유를 들며 매각에 나서지 않았다.
실제로 상당산성에는 민영휘의 첩 안유풍, 그 사이에서 태어난 민대식과 민천식의 무덤 그리고 이를 관리하는 묘지기의 집이 남아 있었다. 또 민영휘 일가의 증손자의 가묘 5기도 조성돼 있는 상태였다.
그러던 와중에 2004년 민영휘 후손이 소유한 토지 일부가 경매로 나왔다. 청주시는 입찰에 참여해 청주시 산성동 산28-1번지(44만1390㎡)의 지분 1/3을 경매로 낙찰받았다.
청주시의 매각에 협조하지 않던 민영휘의 후손들은 가치가 있는 토지에 대해 제3자에게 땅을 팔아 이득을 얻었다. 2004년과 2005년 민영휘 후손들이 매매한 땅만 12필지(약 6000여㎡)에 달했다.
참고로 민영휘 일가가 보유한 토지 중에는 이순신 장군 묘소 위토와 관련된 것도 있었다. 1931년 민영휘의 아들 민대식이 대표로 있던 동일은행은 충남 아산에 있는 이순신 장군 묘소 위토를 경매에 부치려 했다.
1931년 동일은행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후손이 묘소 위토를 담보로 동일은행에 돈을 빌렸지만 갚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매에 부쳤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당시 조선 민중은 극렬히 반발했다. 전국적으로 모금운동이 벌어졌고, 결국 이 돈으로 빚을 대신 갚아 경매를 중단시켰다.
민영휘뿐만 아니라 민대식도 친일반민족행위에 가담했던 인물이다. 민대식은 중일전쟁 직후 귀족·고급관리 부인들의 금비녀 수집을 목적으로 결성된 애국금차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하는등 재산헌납을 통한 친일행위를 벌였다. 애국금차회의 발기취지문을 보면 이 모임의 친일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배신(背信)과 모일(侮日)을 일삼는 지나(支那)를 응징하는 동시에 동아(東亞) 영원의 평화를 수립하기 위하야 방금 전선(戰線)에서 활약하고 있는 황군(皇軍)에 대한 총후(銃後)의 가정을 위문하는 동시에 국방(國防)에 대한 비용에 만분의 하나라도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려는 취지 하에 탄생되는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 발기인회를 준비하는...(생략)"
또한 동생인 민규식과 함께 '황군 양성소'인 만주 봉천동광학교 설립 후원회에 참여했다. 봉천동광학교는 1937년 설립돼 해방을 맞을 때까지 운영됐다. 이는 '만주 조선인의 정신도장'으로 '황군 양성소'로 만들기 위해 친일 조선인들이 뜻을 모아 설립됐다.
후원회에 소개된 두 형제의 직함만으로도 친일행적을 판단하기 충분하다. 민규식(閔奎植, 반도무훈현창회 위원, 조선임전보국단, 동일은행대표 취체역, 조선실업구락부) 민대식(閔大植, 동일은행장, 조선미곡주식회사 대주주, 경성상공회의소 보결부회장, 경성방송 평의원, 조선대아세아협회 임원)으로 소개됐다.
3.1운동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제정된 친일재산귀속법

▲그래픽=서지혜 기자 ⓒ 충북인뉴스
2005년 12월 29일 상당산성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노회찬 국회의원과 최용규 국회의원이 발의했던 '친알반민족행위자 재산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아래 친일재산귀속법)이 국회를 통과해 공표됐다.
친일재산귀속법 법 제1조(목적)는 이 법의 목적이 3.1운동의 헌법이념을 구현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세부적으로 "이 법은 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협력하고, 우리 민족을 탄압한 반민족행위자가 그 당시 친일반민족행위로 축재한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키고 (중략) 정의를 구현하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며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한 3.1운동의 헌법이념을 구현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면서 일제국주의의 국권침탈이 시작된 1904년 러일전쟁 개전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한 재산과 이를 상속받은 재산을 국가에 귀속하도록 명시했다.
법이 제정되면서 청주상당산성에 소재한 민영휘 후손이 소유한 토지에 대한 국가귀속이 속도를 냈다. 2007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총 13필지 44만9657㎡가 이 법에 의거해 귀속됐다. 그럼에도 국가에 귀속되지 않은 미귀속 토지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2010년 국가귀속 업무를 하던 '재산조사위원회' 활동이 종결됐다. 자연스럽게 국가귀속 활동도 중단됐다.
친일파 민영휘 일가의 국가 귀속엔 <충북인뉴스>도 한몫했다.

▲그래픽=서지혜 기자 ⓒ 충북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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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과 2020년 <충북인뉴스>는 민영휘 일가가 소유한 토지 중 국가에 환수되지 않은 미귀속 토지의 존재를 찾아내 보도했다. 결국 2021년 조선신탁주식회와 안유풍 명의로 돼 있던 토지 8필지(7800여㎡, 공시지가 5.6억 원)가 국가에 귀속됐다.
이런 사실만 보더라도 친일파가 강탈한 상당산성이 시민품으로 돌아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2005년 제정된 '친일재산귀속법'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차원에서 상당산성은 3.1운동 정신이 살아있는 대표적인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친일재산귀속법 자체가 '헌법에 구현된 3.1운동 이념을 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정됐고, 그 취지에 맞게 전국에서 친일파 단일인물이 연접해 소유한 토지 중 최다 면적이 환수된 곳이 상당산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속이 완료된 것은 아니다. 아직도 상당산성 내에는 민영휘 일가가 소유한채 귀속되지 않은 토지가 19필지(1만3821㎡)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2025년 삼일절은 105주년을 맞는다. 3.1운동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제정된 '친일재산귀속법' 취지에 맞게 이들 미귀속 토지에 대한 환수여론도 점점 거세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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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북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