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수영 흉상문학관 내부에는 친필 원고 등 김수영 관련 자료가 많이 있다. ⓒ 이양훈
박정희 정권의 폭력성은 정치는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침체와 낙후성을 불러왔다.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이어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졌다. 야당과 다수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에 군대를 보냈다.
1964년 9월 소규모 비전투부대로부터 시작된 한국의 베트남전 개입은 1973년 3월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8년 5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한국은 이 기간 베트남에 연 평균 5만 명 수준의 병력을 유지했으며, 베트남에 파견된 한국 총병력은 약 32만 명에 달했다.
한국군은 베트남전에서 월맹군(북베트남군) 4만 1천여 명을 사살하고, 참전 기간 국군도 약 5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집계되었다. 다수의 친서방 국가들로부터 미국의 '용병'이란 비난을 받아야 했고, 파월 군인들의 현지주민 학살문제와 고엽제 문제 등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굴욕적인 한일국교정상화와 거듭된 대학에 위수령선포 등 강압조치, 베트남전 파병 등은 한국사회를 정신적으로 더욱 침체시켰다. 이런 분위기를 깨뜨린 것은 문인들이다. 대표적인 주자는 김수영이다. 서울 출생으로 선린상고를 거쳐 해방 후 연희전문대 편입, 6.25전쟁 중 거제도 포로수용소 수감. 미군통역과, 선린상고 영어교사, 평화신문 기자, 제1회 한국 시인상을 수상했다. 여기서는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와 <껍데기는 가라>를 뽑았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十五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 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려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 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정보원이 너이쓰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쓰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주석 1)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주석 2)
주석
1> <52인 시집>, <신동엽집>, 80~81쪽, 신구문화사, 1968.
2> 앞과 같음.
덧붙이는 글 | [광복80주년명문80선]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