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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병에 효험이 있다는 할망당에 자시(23:30-01:30)를 택해 다녀왔습니다.
치병에 효험이 있다는 할망당에 자시(23:30-01:30)를 택해 다녀왔습니다. ⓒ 강충민
1932년생 엄마는 작년 5월 넘어져 골반이 깨졌는데, 다행히 인공 골반 수술을 받았습니다. 병원에 있던 두 달과 집에서 몸조리를 오롯이 내가 돌봤습니다. 자리물회가 먹고 싶다고 해서, 서귀포 보목포구에서 자리돔을 사고, 물회를 자주 해드렸지요.

엄마의 짧았던 봄날

자리돔은 넉넉하게 사서 깨끗하게 다듬고 급랭을 시켜 언제든 먹을 수 있게 냉동실에 준비했습니다. 밥도 잘 먹고 보행 연습도 열심히 한 덕에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 있게 되자, 엄마는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시각장애인복지관에 다시 나가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1급 시각장애인입니다. 그곳에서 엄마의 봄날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엄마의 봄날은 너무도 짧았습니다. 복지관에 나가고 두 달 지날 무렵부터 손에 감각이 없어지면서 손에 쥔 것을 자꾸 떨어뜨렸고 숟가락도 제대로 못 잡았습니다. 다리 힘도 빠져 제대로 걸을 수 없었습니다.

대학병원 신경과에서는 고령에 노화가 원인이라고 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날을 택해 당에도 가서 비념(제주에서,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비는 작은 규모의 굿)하고 정성을 들였습니다. 그럼에도 상태가 안 좋아져 어쩔 수 없이 시각장애인복지관에 못 가게 되었습니다. 내가 더 아쉬웠습니다. 엄마의 행복이고 즐거움이었으니까요.

하루 종일 엄마가 집에 있게 되자, 우리 가족은 엄마 돌보기에 맞춰 역할 분담했습니다. 요양보호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는 시간을 빼고는 오롯이 우리의 몫이었습니다. 때 맞춰 밥을 먹여드리고, 시간마다 기저귀를 가는 것이 제일 중요했습니다.

내가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엄마의 기저귀를 갑니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했던 일입니다. 기저귀를 갈고 따뜻한 수건으로 엉덩이 부위를 닦은 뒤, 바디로션을 발라주면 엄마는 참 좋아했습니다. 유산균도 먹이고 보청기를 끼워주고 라디오를 틀어줬습니다.

온 가족의 엄마 돌보기

 엄마가 봉투에 돈을 넣어달라고 해서 아이들에게 줬습니다.
엄마가 봉투에 돈을 넣어달라고 해서 아이들에게 줬습니다. ⓒ 강충민

내가 감귤농장에 나가면 각시가 세수를 시키고 부랴부랴 출근합니다. 아침 식사를 포함한 하루 세 시간은 요양보호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습니다. 점심에는 각시가 집에 다시 와서 드리는데, 못 할 경우, 주로 내가 합니다.

대학생인 아들과 딸도 시간을 서로 조절했습니다. 주말에 나와 각시가 감귤농장 가면서, 식사 챙겨드리라고 대화방에 남겼더니 서로 순번을 정해서 했더군요. 목욕도 시키고 다들 서로의 몫을 하면서 돌보기 분담을 했습니다.

국을 꼭 찾는 엄마의 평소 식습관에 맞추어 여러 가지 준비했습니다. 고사리육개장, 몸국, 된장국, 콩국, 소고기미역국 등을 한 번 끓일 때 넉넉하게 해 두고, 1회용기에 넣어 냉동실에 보관하여 번갈아 가며 드렸습니다.

엄마 혼자 집에 있는 두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생길까 마음 졸여야 했습니다. 엄마 옆에 한 사람이 오롯이 붙어 있어야 하는데, 각시는 직장을 다니고 대학생인 아이들이 그 역할을 종일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면 내가 해야 하는데. 감귤농사를 접고 엄마 옆에 종일 붙어 지내는 것은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이기적인 걸까요?

엄마에게 요양원 입소를 이야기하던 날

요양원 얘기를 나와 각시 중에 누가 먼저 꺼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서로의 생각이 같았다는 것이겠지요. 그럼에도 앞을 못 보는 엄마가 낯선 환경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에 쉽사리 결정을 못 내렸습니다.

지난 주말 저녁에 아이들에게 먼저 엄마의 요양원 입소를 얘기했습니다. 각시가 "요양원이 할머니에게 더 좋은 환경일 수 있어"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설음식을 만들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보다 살아계신 엄마가 드시기 좋게 만들었습니다.
설음식을 만들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보다 살아계신 엄마가 드시기 좋게 만들었습니다. ⓒ 강충민

정작 엄마에게 요양원 얘기하는게 어려웠습니다. 조심스럽게 내가 "요양원 가면, 말벗도 있고 잘 챙겨주고 좋다"라고 말을 꺼냈습니다. 그 말에 엄마는 덤덤했습니다. 미리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말이지요.

"난 그디 가민 느네 돈 하영 들카부댄 저들어저라. 개난 요양원 가민 돈 막 하영 드는거 아니라?" (나는 그곳에 가면 너희들이 돈 많이 들까 봐 걱정했어. 그래서 요양원은 돈 많이 드는 게 아닐까?)

엄마의 말투가 요양원 가는 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는 게 아닌 걸, 나도, 각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안심시키려고 그러는 말이겠지요.

"느네 나 돌앙살잰허난 막 속았저. 요양원가도 느네가 돈들이멍, 속아살건디... 어떵헐거라 어멍이고 할망이난 어디 데껴불지도 못허곡, 고맙다. 나가 그 고마움을 무사 모르느니? 막 고맙다." (너희가 나와 같이 살면서 정말 고생했다. 요양원 가도 너희가 돈 들고 고생할 건데... 어쩌겠니? 엄마고, 할머니라서 어디 버리지도 못하고, 고맙다. 내가 그 고마움을 왜 모르겠어? 정말 고맙다.)

이번 설에는 돌아가신 아버지보다, 살아 계신 엄마가 잘 먹는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물을 넉넉하게 넣어 엄마가 좋아하는 진밥을 지었고 살과 비계가 적당히 섞인 삼겹살도 삶아 먹기 편한 크기로 잘라 먹여드렸습니다.

엄마는 설을 지낸 다음인 2월 4일 요양원 가기로 했습니다. 슬퍼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래도 앞이 안 보이는 엄마를 등 떠미는 것 같아 못내 미안함과 죄책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나는 불효자일까요? 나는 엄마를 포기하고 만 것일까요?

 떡국도 엄마가 드시기 좋게 닭으로 육수를 냈습니다. 살코기를 잘게 찢어 드시기 좋게 만들었습니다. 잘 드셨습니다.
떡국도 엄마가 드시기 좋게 닭으로 육수를 냈습니다. 살코기를 잘게 찢어 드시기 좋게 만들었습니다. 잘 드셨습니다. ⓒ 강충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주의 소리에도 실립니다.


#요양원#엄마간병#노인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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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살고 있습니다. 대학원에서 제주설문대설화를 공부했습니다. 호텔리어, 입시학원 강사, 여행사 팀장, 제주향토음식점대표,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사 등 하고 싶은일, 재미있는 일을 다양하게 했으며 현재 서귀포에서 감귤농사를 짓고 제주돌문화공원 문화관광해설사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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