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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만년필 ⓒ 정무훈
만년필로 시작된 부부싸움
"지난번에도 중고 만년필 사서 쓰지도 않으면서 뭐 하러 비싼 만년필을 또 샀어?"
식탁에 앉아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는 나에게 아내가 지청구한다.
"지난번에는 중고로 산 만년필은 고장 난 펜이었어. 그래서 큰맘 먹고 산 거야."
"더구나 이 만년필은 한정판이야."
'또 쓸데없는 데 돈을 쓴 거야."
지난번 중고 만년필 사건 '
종이 위 사각거리는 소리가 매력, 만년필 입문기' 이후 아내 몰래 구입한 것이 오늘 들통난 것이다.
"당신도 비슷한 옷 여러 벌 사잖아."
나도 기분이 상해질세라 한마디 쏘아붙인다.
"옷하고 만년필하고 같아? 억지 부리네."
"옷도 매일 입지만 만년필도 매일 쓰는 물건이잖아."
아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 마디 툭 던진다.
"그럼, 만년필하고 살아."

▲만년필먄년필 ⓒ 정무훈
오늘 우리 집 부부싸움의 시작은 만년필이다. 나는 절대 만년필 덕후가 아니다. 하지만 작년부터 팟캐스트를 들으며 만년필에 관심이 생겼고 중고 사이트에서 고장난 만년필을 구입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만년필을 써 보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뜯었다.
"어 만년필이 하얀색이고 사각이네. 베개 모양의 받침대도 들어있네."
만년필을 이러저리 만져보고 바라본다. 만년필을 잡는 부분이 금속으로 되어 있어 차갑다. 휴대전화 돋보기로 문양을 자세하게 들여다보았다. 섬세하게 모란,구름, 학 등의 문양을 새겨 넣었다.
"전통적인 느낌은 뭐지? 조선시대에 만년필이 있었다면 이렇게 생겼겠네."
이건 일반 만년필이 아니라 임금이 썼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은 고급스러움이 있다.
사각사각 종이에 잉크가 번지며 긁히는 소리가 칼로 사과 깍는 소리 같다. 얼마 만인가. 손 글씨를 한 글자 한 글자 써 본 것이.
그동안 여러 만년필을 알아보던 중에 우리나라에서 한정판 만년필을 예약받아 제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얼른 사전 예약에 참여했고 오늘 만년필을 택배로 받았다. 포장이 안에 '베개'라는 이름의 있고 사용 설명서에 제작자는 밀이 적혀있다.
'고유한 문자를 가진 우리 수준의 문화에 걸맞은 자기 만년필이 없다는 걸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생각이다.
만년필을 보니 본격적으로 글씨를 써 보고 싶다. 그런데 잉크는 어디 있지? 서랍 여기저기를 뒤적이다 한 구석에 있는 잉크를 발견했다. 작년에 중고 만년필을 사면서 구한 잉크였다.
그런데 검은색이 아니라 파란색이다. 뭐지 왜 파란색밖에 없지? 일단 파란색이라도 써 보기로 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중세 시대부터 왕족과 귀족들이 왕실 문서와 조약에 서명하며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파란색 잉크를 사용했다고 한다.
나는 잉크가 물에서 풀리는 과정을 천천히 바라본다. 가끔 펜 촉에 뭉친 잉크를 풀기 위해 투명한 유리컵에 미지근한 물을 담아 펜촉을 담그면 퍼져 나가는 선형적이고 기하학적인 곡선이 매혹적으로 번진다.
그런데 이건 또 뭔가. 잉크를 넣는 방법을 모르겠다. 만년필 연결 부위를 힘껏 당겨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리저리 펜을 살펴봐도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는다. 한참 펜을 들고 쩔쩔매고 있는데 아내가 와서 한마디 한다. "펜 몸체를 한 번 돌려봐. 아! 돌리는 방법이 있었네." 펜 촉을 시계 방향으로 돌리니 펜이 드디어 열렸다.

▲만년필만년필 ⓒ 정무훈
식탁에 앉아 본격적으로 만년필에 새파란 잉크를 채우고 빈 공책에 글씨 쓰기를 시작했다. 손잡이 부분이 원이 아니라 사각이라 내 손에는 각도가 조금 틀어진다. 그래도 꾹 참고 또박또박 한 글자씩 써 내려 갔다. 휴대전화로 음악을 틀어 놓고 황가람 가수의 '나는 반딧불'을 써 보았다, 아직은 펜글씨가 서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괜히 샀나?' 속으로 후회가 올라온다.
조금 전에는 퉁명스럽게 말하던 아내가 어느덧 슬그머니 옆에 앉더니 "글씨가 별로네. 네가 한번 써 보게 줘 봐" 한다. 속으로는 얄밉지만, 꾹 참고 '어디 얼마나 잘 쓰나 보자'라고 생각하며 펜을 건낸다.
아내가 만년필 글씨가 궁금하기는 하다. 아내는 "오랜만에 써서 잘 안 써지네"라며 나와 똑같이 '나는 반딧불'의 가사를 쓰고 재미가 있는지 이어서 윤동주의 '서시'를 쓴다. 그러더니 갑자기 '당신을 글씨가 볼품 없으니 오늘부터 내가 이 펜을 쓰겠어'라며 펜을 꼭 쥔다.

▲만년필아내 손글씨 ⓒ 정무훈
펜이 마음에 드는지 본인 글씨가 마음에 드는지 모르겠다. 나는 얼떨결에 펜을 빼앗겼다. 아쉽지만 나에게는 비밀이 있다. 아내에게 빼앗긴 만년필은 스틸촉 펜이다. 얼마 있으면 아내 모르게 주문한 고급 금촉 펜이 온다. 아내가 알면 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 것이다.
다음날부터 저녁을 되면 아내는 책상에 앉아 만년필로 시를 한 편씩 옮겨 적었다. 나는 오히려 만년필은 안 쓰고 노트북 자판만 두드리고 있다. 만년필을 쓰기 위해서는 책상에 앉아야 하고 잉크를 넣고 공책을 펼치고 한 글자씩 마음을 기울여 써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그동안 편하게 자판을 두드리던 손으로 만년필을 잡으면 어색하고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가만히 아내가 쓴 손 글씨를 들여다보면 아내가 보인다. 난 조바심이 나서 덤벙덤벙 빠르게 글씨를 쓴다. 조금 틀려도 모양이 안 나와도 상관없다.

▲만년필아내 손글씨 ⓒ 정무훈
아내는 한 줄 쓰고 쳐다보고 다음 줄은 다르게 써 보려고 혼자 궁리한다. 아내가 책상에 앉아 있는 뒷모습을 보며 갑자기 마음한 구석이 짠하다. 그동안 아내는 퇴근하고 돌아와 바쁘게 집안일하느라 한가로운 저녁 시간이 없었다.
시를 옮겨적던 아내가 '시를 써 보니 단어 하나하나가 새롭게 느껴져'라고 나지막이 말한다. 아내에게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백열등 스탠드 아래서 시를 옮겨 적는 아내를 뒤로하고 방해가 될까 봐 설거지 하기 위해 나는 조용히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지금은 아내와 만년필의 시간이다.
오래가고 바로 써지며, 아름답고 이야기까지 있어야 명작이다. 베개가 그렇다. 숨죽여 루페로 펜 끝을 다듬다 해 뜨고 지는 것도 모를 만큼 빠져들었다.
- 베개 사용 설명서, 박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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