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령. 지난 12월 3일 밤, TV화면에 뜬 저 세 글자를 보는 순간, 나는 운동에 열심이던 한 에어로빅 강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니 중요한 것은 그 사람 뒤로 거리낌 없이 지나가던 탱크였다. 이어 자동으로 연상된 장면은 정치인 체포와 구금, 시민을 향한 발포, 그리고 거리에 쏟아진 피, 피, 피.
실은 한국의 상황이 아니다. 이건 2021년 2월 1일 이후, 미얀마의 상황이다.
다행히 한국은 시민들과 국회가 현명하고 재빠르게 막은 덕분에 최악의 상황을 피했다. 나의 일상이 크게 흔들리지 않은 것은, 모두 국회로 거리로 달려 나간 동료시민들 덕분일 것이다. 뒤늦게 새삼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그러나 미얀마는 그렇지 못했다. 미얀마 시민들은 안온한 일상을 빼앗겼다. 최진배의 <포가튼 미얀마>는 쿠데타 발생 후 온통 삶이 뒤틀려버린 다섯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포가튼 미얀마 ⓒ 출판사 들꽃
이 청년 세대는 2015년부터 2020년 사이 짧지만 강렬하게 민주주의를 경험했다. 1962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군부, 짓눌리는 삶 속에서도 민주화 운동을 지속한 시민들. 마침내 2015년 선거를 통해 탄생시킨 민주주의 정권.
그러나 2020년 선거에서 민주주의 세력이 더 압승을 거두자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암흑천지를 만든 군부. 잠시 느꼈던 민주주의와 자유를 잃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미얀마 청년들은 '미얀마 봄혁명'에 나섰다.
매우 '보통 사람'들이었던 A, K, L, P와 N이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며 봄혁명에 참여하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 <포가튼 미얀마>다.
책은 청년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에 맞서 시위에 참여하다 소수민족 해방구로 옮겨가 군사훈련을 받고 시민방위군이 되는 과정, 저항세력이 응집하여 민족통합정부를 구성하고 시민방위군을 만든 일, 외부에서 모아진 모금액이 어떻게 현장에 전달되고 사용되는지를 비롯해, 그 활동에 참여하는 청년들의 고뇌와 쓰라린 마음까지 찬찬히 전한다.
소설적 형식이지만 모두 실제 있었던 일이다. 이는 최진배가 평소 많은 정보를 수집하여 촘촘하게 정리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테다.
청년들을 일으켜 세운 분노... 소수민족의 연대

▲28일 부평역 앞에서 열린 “국제형사재판소에 미얀마 군부 독재자 민 아웅 흘라잉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와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 ⓒ MFDMC
최진배는 미얀마 사람인 배우자와 함께 현장에서 전해지는 미얀마 소식을 국내에 알리기 위해 페이스북 뉴스 그룹 《미얀마 투데이》와 같은 이름의 텔레그램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쿠데타가 발생한 뒤 한 달 쯤 후부터 시작한 이 활동에 대해 최진배는 이렇게 말한다.
뉴스와 신문에서 모두 담지 못하는 미얀마 사람들의 이야기, 온라인에서 연대하며 인연을 쌓아온 현장의 활동가 동지들이 겪고 있는 일이 잊히지 않기를 바랐다. 잔혹한 폭력에 속절없이 당한 희생자들, 두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끄집어내 항거하다 쓰러진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했고, 그들이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혹자는 너무 지엽적이라 했지만 누군가에게는 세상 전부였던 역사, 그 처절한 역사를 자유로운 소셜미디어를 통해서나마 알리고 싶었다.
《미얀마 투데이》의 뉴스를 받아보는 나는, 그 뉴스 뒤에 얼룩진 최진배의 눈물을 생각한다. 총격과 폭격, 방화로 무참하게 손상된 인체, 무너지고 불탄 삶의 터전을 사진으로 정리하고 글로 묘사하는 그 마음은 얼마나 처참할 것인가.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거나, 그 현장을 직접 수습하고 사진으로 남기는 이들 못지않게 아픈 울음을 삼켰을 그 마음.
그가 새로 올린 기사를 클릭할 때마다 나는 마음을 다잡는다. 보고 싶지 않은, 차마 볼 수 없는 글과 사진을 보며 나는 저자인 최진배의 마음을 헤아린다. 최진배는 등장인물 N을 통해 그 심정을 이렇게 토로한다.
N은 미얀마에서 쿠데타가 벌어진 뒤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영상과 사진을 매일 보아야 했다. 총탄에 맞아 머리에 뚫린 주먹만 한 구멍에서 피와 뇌수가 쏟아지는 모습, 팔다리가 잘리고 살갗이 갈기갈기 찢긴 모습, (중략)... 망가진 인체를 내내 보았다. 괴로웠지만 두 눈으로 보고 기억하는 것 또한 N이 할 수 있는 투쟁이었다.
N은 한국에서 홍보와 모금으로 현장 활동가들을 지원하는 인물이다. N의 실제 모델은 최진배의 배우자라고.
비폭력저항을 중심에 뒀던 이전의 민주화운동과 달리 이번에 전개되는 운동은 무장 항쟁 중심이다. 미얀마에서는 쿠데타 발생 3개월 쯤 뒤부터 무장 항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초기 미얀마 시민들은 '거리가 무고한 이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든' 상황에서도 평화 시위를 벌이며 국제사회가 개입해 주기를 기다렸단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냉담했고, 시민들은 자각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 미얀마 시민은 서로 말고는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다는 사실만이 명징해진다.만약 군부와 싸울 무기가 있었다면 이렇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텐데...
미얀마 시민은 모진 탄압 앞에서도 줄기차게 평화를 외쳤다. 하지만 돌아온 건 총탄뿐. 국제사회는 부당한 상황을 목도하면서도 철저히 침묵했다. 결국 시민을 무장하게 만든 것은 군부와 국제사회다.
무력감과 분노는 청년들을 일으켜 세웠다. A, K, P는 자발적으로 소수민족 군대로 들어가 군사훈련을 받고 현장에서 활동한다. L은 외부에 자금을 요청하고 현장에 연결하는 일을 한다. 개인들의 의지가 사회적 의지로 뭉쳐지고 시민방위군으로 모아져, 군부를 향한 무장 항쟁을 지탱한다.
미얀마를 구성하는 다수민족인 버마족은 소수민족들과 대립 관계에 놓여 있었다. 버마족은 그간 군부가 소수민족을 핍박하고 살육해도 외면하여 비판받기 일쑤였다. 봄혁명은 이 오랜 미움과 대립을 협력과 연대로 바꾸고 있다.
자체 군대를 보유하고 있던 소수민족들은 버마족 청년들을 받아들여 군사훈련을 제공하고, 시민방위군과 협력해서 군부에 맞서고 있다. 수렵용 엽총 몇 자루가 전부였던 시민방위군은 목숨을 거는 의지로 싸웠고, 피 말리는 연구와 실험으로 자체 무기를 개발했다. 그 비용 대부분은 국내외 미얀마 사람들이 돈을 모아 대고 있다.
"시원한 생맥주 한 잔 하면 소원이 없겠어요"
책에 따르면, 자금이 떨어진 P가 N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최근에 군자금을 지원해주는 후원자들이 많이 줄었어요. 그러다 보니 립스틱이 여유가 없어서 부대원 모두가 초조해하고 있거든요.
그에 따르면 립스틱은 '실탄'을 뜻하는 은어란다. 후원자들에게 탄약 살 돈을 도와달라고 하기 어려워서 쓰기 시작한 말이라고. 미얀마와 한국이라는 먼 거리를 뛰어 넘어 같은 목적을 위해 뭉친 청년들은 이런 소망도 나눈다.
저는 그냥 시원한 생맥주 한 잔 하면 소원이 없겠어요. 텔레비전에서 틀어주는 챔피언스 리그 경기 보면서요. 마음 졸이는 일 없는 심플한 일상, 뭐 그런 건데 말하고 보니 전혀 작은 소원이 아니네요.
과연 이 청년들은 언제쯤 함께 모여 생맥주 한 잔을 나누게 될 것인가.
<포가튼 미얀마>는 '현장에서 쓰러지는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고 기록' 했다. 그리고 '우리가 인지조차 못하는 수많은 죽음과 희생이 작금의 미얀마 시민혁명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아파한다.
스스로 혁명의 전장에 뛰어든 미얀마 청년들은 처절하게 싸웠다. 그리고 수많은 목숨이 덧없이 사라졌다. 이름도 명예도 남김없이.
2025년 2월 1일은 미얀마에서 쿠데타가 발생한 지 꼭 4년이 되는 날이다.
민족통합정부는 2024년 말 기준으로, 소수민족군대와 시민방위군이 전국 330개 타운십 가운데 144곳을 통제하고 있으며, 이 중 48곳은 완전히 점령했다고 밝혔다. 79곳은 접전 중이고 107곳은 여전히 군부가 장악하고 있다고 한다.
미얀마 청년들의 봄혁명은 여전히 치열하다. 현장에서 피 흘리는 평범하고 숭고한 사람들에게, 또 그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고자 분투하는 최진배와 그의 배우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 모든 이야기가 차라리 지어낸 소설이기를 기도하지만 일어난 모든 일은 논픽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