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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따이덜 모다들엉 눈놀이 하는 날!"
(제주 아이들 모여들어 눈놀이 하는 날!)

제주에 눈이 많이 내리고 주말이 찾아오면, 도민들은 저마다의 '눈썰매 스팟'으로 향한다. 제주 시내권은 한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는 일이 드물어, 눈이 쌓이기도 전에 녹는다. 눈 구경을 하려면 고도가 높은 한라산 중산간의 그늘진 곳을 찾아가야 한다. 그 중에서도 적당한 비탈이 있어 눈썰매를 타기 좋은 몇몇 장소가 천연 눈썰매장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제주에는 상업적으로 운영되는 눈썰매장이 없다. 제주 아이들에게 눈썰매장이란 곧 한라산 중턱이다. 맘카페에서는 실시간 현장 상황이 공유되고 지역 라디오에서도 눈썰매 스팟 정보를 나눈다. 인공 눈이 아니기에, 며칠만 지나도 녹고 없어질 눈이라 딱 이 타이밍에만 즐길 수 있다. 겨울 제주의 특별한 재미거리다.

 눈썰매 타기
눈썰매 타기 ⓒ 박솔희

제주만의 천연 눈썰매장 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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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고지, 천왕사 가는 길, 과학탐구체험관 등 여러 눈썰매 스팟이 알려져 있지만 가장 특별한 곳은 바로 '제주4.3 평화공원'이 아닐까 싶다.

눈이 내리고 난 뒤의 주말, 네살배기 아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제주4.3 평화공원은 제주 시내에서 한라산 방향으로 15~20분 거리의 봉개동에 위치해 있다(그렇다. 제주도민들은 실제로 '한라산 방향', '바닷가 방향'이라는 표현을 쓴다).

제주맘카페에서 얻은 정보대로 네비게이션에 4.3 평화공원을 찍었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 단지는 물론 가는 길에도 눈이 하나도 없어 헛수고하는 건 아닌가 의심했다. 믿음이 적은 자여. 목적지에 도착하니 온통 하얀 눈세상이었다.

썰매 스팟은 4.3 평화공원 맞은편의 언덕배기였다. 갓길에 차들이 쪼르르 세워져 있고 알록달록 썰매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곳에서 눈썰매를 타고, 눈오리를 만들고, 눈공을 뭉쳐서 서로에게 던지고, 작은 눈사람을 만들면서 놀았다. 한 시간쯤 놀고 나서는 차에 타서 미리 준비해간 김밥과 컵라면을 나눠먹었다.

 제주4.3 평화공원 맞은편의 언덕배기. 눈이 오고 나면 천연 눈썰매장이 된다.
제주4.3 평화공원 맞은편의 언덕배기. 눈이 오고 나면 천연 눈썰매장이 된다. ⓒ 박솔희

평화에의 염원이 도민들의 추억과 함께

'썰매장 맞은편'으로 먼저 소개했지만, 제주4.3 평화공원은 제주도민이든 여행자든 한 번쯤 꼭 가봤으면 하는 장소다. 분단 한국사의 큰 비극인 제주 4.3사건을 기리는 곳으로, 매년 4월 3일이면 이곳에서 추념식을 개최한다. 나는 2017년 제70주년 추념식 때 참석할 기회가 있었는데 넓은 공원과 주차장이 가득 메워진 기억이 난다.

야외 공원에는 희생자들의 위령탑과 여러 추모 기념물들이 세워져 있다. 공원 내부의 4.3평화기념관에서는 제주4.3 사건의 전개와 의의를 살펴볼 수 있는 상설전시가 이루어지고, 해설도 들을 수 있다. 4.3 사건 자체가 한 마디로 요약하기 어려운 복잡한 사건이기 때문에 대강당에서 영상을 시청한 뒤 해설을 들으며 관람하면 도움이 된다.

현재 <전쟁을 겪은 어린이들의 이야기>라는 기획전시가 진행되고 있어 관람하였다. 전시는 보스니아의 War Childhood Museum과의 국제교류전으로, 1,425일 동안 1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사라예보 포위전을 겪은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4.3 학살의 광풍 속에서도 아이들은 자라고 삶은 계속되었듯, 사라예보의 포격 속에서도 아이들은 공부하고 놀고 일상을 살았다.

전시는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는 도입부를 거쳐 1990년대 사라예보로 관람객을 초대한다. 전쟁 전 사라예보에서 생산된 발레 토슈즈에서부터 구호물자로 지급받은 통조림 깡통들, 총에 맞아 죽던 날까지 소년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미완성 미술 작품까지 37점의 전시품들이 평화와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제주4.3평화공원에서 진행 중인 <전쟁을 겪은 어린이들의 이야기> 기획전
제주4.3평화공원에서 진행 중인 <전쟁을 겪은 어린이들의 이야기> 기획전 ⓒ 박솔희
 전쟁 전 사라예보에서 생산되었던 발레 토슈즈
전쟁 전 사라예보에서 생산되었던 발레 토슈즈 ⓒ 박솔희
 포격으로 죽은 사촌이 난민 생활을 할 때 받았던 재킷
포격으로 죽은 사촌이 난민 생활을 할 때 받았던 재킷 ⓒ 박솔희

눈썰매를 타러 갔다가 4.3평화기념관 기획전까지 관람하게 되었다. 제주도민의 아픔을 평화에 대한 염원으로 승화하는 뜻깊은 공간 지척에서 제주도민과 관광객들이 너나 없이 모여 눈놀이를 즐기고 있다. 이 사실이 왠지 역설적이면서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제주 4.3사건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를 쓴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자 강연에서 쓴 표현이 떠오른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제주4.3 평화공원 위령탑 주변에 눈이 쌓여 있다.
제주4.3 평화공원 위령탑 주변에 눈이 쌓여 있다. ⓒ 박솔희
 4.3평화기념관 상설전시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백비'
4.3평화기념관 상설전시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백비' ⓒ 박솔희

#제주여행#제주눈썰매#제주43평화공원#제주43평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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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없는 곳이라도 누군가 가면 길이 된다고 믿는 사람. <청춘, 내일로>, <교환학생 완전정복>, <다낭 홀리데이> 등 몇 권의 여행서를 썼다. 2016년 탈-서울, 이후 쭉 제주에서 살고 있다. 2021년 엄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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