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죽음은 비참하고 불행했다. 서울의 한 병원에서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한 천재 화가 이중섭(1916~1956). '빈센트 반 고흐'에 비견될 정도로 추앙받는 예술가,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대표하는 화가라는 타이틀은 모두 그의 사후에 붙여진 것이다.
이다지도 슬픈 죽음이란 말인가. 그는 마지막에 혼자였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손성은은 2016년 <인물미술사학> 12호에 발표한 논문 '이중섭 심리부검'에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던 그가 왜 정신증상이 있었고 죽음에 이르렀는가 연구했다.
이중섭은 우울증과 조증을 반복하는 양극성 정동장애와 거식증을 심하게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 손성은은 가족과 떨어져 있으면서 깊어진 우울감, 그리움, 죄책감이 자기 학대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이중섭의 고통스럽고 가슴 아픈 서사는 사람들의 주목을 많이 받았다. 남겨진 작품들만큼이나 관심을 끌었던 그의 생애를 조명하는 책과 논문들도 많이 나왔다. 하지만 죽음을 넘나드는 가난속에서도 위대한 작품을 그려낸 대가라는 수식은 어딘가 공허하다.

▲김탁환 장편소설 <참 좋았더라> 표지. ⓒ 남해의 봄날
통영! 참 좋았던 이중섭의 시간속으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밤이 어두울수록 별들은 밝게 빛나고, 슬픔이 깊을수록 신과 더 가까워진다"고 했다. 소설가 김탁환은 장편소설 <참 좋았더라>(2024)에서 이중섭의 '별의 순간'에 집중했다. 이중섭이 예술가로서 가장 빛났던 시간과 장소들을 찾아 작가는 통영을 샅샅이 훑었다.
지독한 가난과 외로움이 평생 그림자처럼 따라 붙었으나, 이중섭의 삶이 마냥 비참하기만 했을까. 이중섭이 절망을 뚫고 살게 만드는 힘의 원천은 그림이 아니었을까. 김탁환 작가는 통영에서 그림에 치열했던 화가의 예술적 영감이 정점에 이른 이중섭의 '화양연화'를 발견하고자 했다. 불행했던 비운의 천재라는 틀을 걷어내자 비로소 화가 이중섭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1916년 평안남도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했던 이중섭의 삶은 한국전쟁을 경유하며 판이하게 달라졌다. 이 시기 월남한 이북 출신의 예술가에게 남쪽 땅은 무척 가혹했다. 이중섭은 부산(1950년), 제주 서귀포(1951년) 등에 머물렀는데 변변한 생계수단이 없어 막노동을 전전하며 힘들고 가난하게 보냈다. 가족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낸 이후에도 변변한 출로를 찾지 못하던 이중섭에게 공예가 유강렬은 통영행을 제안한다.
유강렬은 이중섭에게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구와 물감을 대줬고 '아틀리에'(작업실)를 제공했다. 이중섭은 통영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에서 강의도 하면서 제자들을 길러냈다. 화가 유택렬, 김용주, 전혁림과 공예가 김봉룡, 시인 유치환, 김춘수 등 동시대 예인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그를 위해 마련된 공간과 그를 아끼는 사람들로부터 이중섭은 위안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위대한 작품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찬란했던 통영의 이중섭을 조명한 소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이 <참 좋았더라> 인가 보다.
"통영으로 갈 결심을 굳히며 다짐했다. 소를 그린다. 소 곁에 사람이나 풍경을 두지 않는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소도 아니요, 사람을 위해 밭을 가는 소도 아니다.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도 아니요, 외양간에 갇힌 소도 아니다. 소다운 소다. 네발로 땅을 딛고 어디든 간다. 막아서는 장벽엔 온몸으로 부딪친다. 고개를 치켜들고 하늘을 향해 껄껄껄 웃는다. 자유다, 해방이다."(66쪽)
이중섭의 그림이 말하는 '이중섭'
통영의 이중섭은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1953년부터 이듬해까지 짧게 통영에 머물렀으나 가장 왕성하게 그림을 그렸다. 눈만 뜨면 화구를 메고 밖으로 나갔다. 저녁에 아틀리에로 돌아와 밤새 그리는 불면의 밤들이 쌓여갔다. 일본의 아내에게 보낼 편지에 '백 점을 그렸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그러나 만 점을 그린들 최고의 경지에 이른 '단 한 점'이 절실했다. 이중섭이 더욱 '소'에 집착한 이유이다.
김탁환 작가는 '화가 이중섭'의 그림에 투영된 '인간 이중섭'을 통찰한다. '사람'에 집중하니 그림속에 담긴 풍부한 이야기와 의미들을 포착할 수 있었다. 이중섭에 대한 독보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했다. 작가는 이중섭이 통영에서 그린 소 그림을 이렇게 묘사했다. 두 페이지 꽉 채운 분량인데 일부만 소개한다. 이 글을 읽고 나서 이중섭의 그림을 보니 비로소 '그'가 보였다.
"다리 넷에 두 상황이 겹친다. 왼쪽 앞다리만으로 머리와 목과 어깨를 지탱하기 때문에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린 현재 상황이 하나고, 들고 있던 오른쪽 앞다리가 땅에 닿는 순간 돌진해 나아갈 미래 상황이 또 다른 하나다.
팔레트에서 물감을 듬뿍 바른 붓이 마지막으로 집중한 것은 뿔 한 쌍이다. 다음 대결을 향한 깃발처럼 순백으로 단정하다. 정면으로 내달려 치받으려는 의지다. 세상과 맞서다. 전쟁과 맞서다. 이산과 맞서다. 외로움과 맞서다. 공산주의와 맞서다. 자본주의와 맞서다. 그 모든 적이 뭉친 또 하나의 소와 맞서다. 통영에서 그린 첫 소다." (204~205쪽)

▲2022년 4월 1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미술관에서 열린 개관 10주년 전시 '두려움일까 사랑일까 Fear or Love'에 이중섭의 '황소'가 전시되어 있다.
ⓒ 연합뉴스
기실 이중섭은 그림으로 절망을 벽을 넘었다. 자화상 같기도 하고 시대상 같기도 한 그림에 쏟아낸 예술가의 순정한 투혼은 사람들은 열광했다. 1955년 이중섭은 서울 미도파백화점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관람객이 쏟아져 들어온다. 소설은 여기서 끝난다.
이후 이중섭의 인생은 그가 원했던 모양대로 되지는 못했다. 김탁환 작가는 소설을 쓰는 동안 "한 인간은 어떤 과정을 거쳐 경지이자 한계에 이르는가?"라는 질문을 품었다고 했다. 이중섭은 예술가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점에 이르렀으나 안전하게 내려오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진대로 안타까운 결말을 맺고 말았다.
이중섭의 죽음을 알기에 소설 속 이중섭의 '화양연화'를 읽는 내내 마음이 아렸다. 이중섭의 발자취를 따라 통영의 붉은 바다를 마주한 작가의 마음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작품속에서 '글쓰는 사람' 김탁환이 '그리는 사람' 이중섭과 수도 없이 조우하며 나눴을 예술가의 고뇌를 감히 짐작할수는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