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이라는 표현하에 경쟁과 입시몰입교육을 지양하고, 자치와 상생을 위한 교육을 하며, 학생들이 현재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안전한 삶의 터전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곳에서 여러 존재들과 좌충우돌하며 교육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전하고자 합니다.[기자말] |
학기가 마무리되면서 고교학점제 준비학교(목적사업) 예산이 애매하게 남았다. 이럴 땐 소규모로 떠나는 체험형 교육 활동을 짜는 것이 가장 좋다. 모든 학생에게 기회를 제공할 수 없어서 안타깝지만, 소수 정예로 떠나는 교육 여행은 대단히 효과가 좋다. 사제지간의 진한 만남 속에서 아이들은 순식간에 성장한다.
물론 난이도로 따지자면 꽤 높은 편이다. 기획부터 시행까지, 운전부터 식당 선정까지 모두 직접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하라고 하면 어느 누구보다 의욕적으로 일을 시작한다. 여행을 좋아하는 성향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꾸린 교육 여행에서 진한 행복을 맛보는 경험을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겪어오고 있어서 그렇다.

▲물수제비전북의 아이들은 동해의 물빛을 보고 환호했다. ⓒ 안사을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은 300만 원 이내. 전주에서 동해안까지 가야 하는 여정을 3일 동안 소화하면 전세버스 비용만으로 소요되는 금액이다. 교사 개인 차량을 이용하고 유류비는 출장 여비로 충당하면 해당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안전에 각별히 주의해야 하고 양육자 사전 동의는 필수다.
목적사업비의 애초 의도에 맞게 이번 여정은 진로 체험을 중심으로 한 인문, 역사 체험으로 구성했다. 평소 상호 보완이 기가 막히게 잘 맞아 자주 합작품을 만들어 주시는 본교 수석 교사가 짠 코스였다. 살인적인 스케줄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지만 새로운 것을 보고 휘둥그레 커지는 아이들의 눈망울과 함께하다 보니 마냥 즐거웠다.
첫째 날: 전주역(집결지) - 한동대학교 - 이가리 해변 - 숙소
둘째 날: 포스코(Park1538) - 죽도시장 - 주왕산 - 숙소
셋째 날: 도산서원 - 이육사문학관 - 전주역
졸업생과 함께한 한동대 탐방
첫 번째 목적지는 한동대학교였다. 재작년 그곳으로 진학한 선배 A가 있는 곳이자, 대안학교 입학 전형을 가지고 있는 학교이며 무전공 모집 후 인원이나 자격 제한 없이 세부 전공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독특한 학제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우리를 안내해 준 A는 고등학교 재학 시절 학생회장이었으며, 본교에서 매우 큰 역할을 해 주었던 학생이었다. 한 사람의 교사로서 아이 아버지에게 "우리 학교가 ○○에게 참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니 얼마나 함께 울고 웃으며 교학상장 했는지 상상 이상이다.
국도를 이용해 쉬엄쉬엄, 휴게소에서 눈싸움도 해 가며 포항에 도착하니 꼬박 4시간 반이 걸렸다. 내 차 2열에 세 명, 3열에 두 명이 구겨진 채 "이렇게 4시간을 간다고요?"라며 경악과 경탄의 중간 발음을 내던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재잘거리다가 졸다가 하면서 오래 만난 친구처럼 가까워졌다.
한데 모인 아이들은 처음 만나는 A와 다소 서먹한 인사를 한 후 본격적으로 대학 탐방을 시작했다. 벤치에 앉아 개괄적인 이야기를 듣고 질문과 응답을 이어 나갔다. 교정을 한 바퀴 돌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A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 입학 시 무전공으로 선발하며 2학년 진학 시 계열, 전공, 인원 제한 없이 학생의 희망대로 전공을 선택할 수 있다.
- 전공을 학기 상관없이 바꿔도 된다. 단, 전공별 필수 학점 이수를 해야 하니 졸업 시기가 늦춰질 수 있다.
- 복수전공이 필수이고, 2개 이상을 선택할 수도 있다.
- 대안학교 전형이 있고,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온다.

▲선배와의 대화 ⓒ 안사을
이외에도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생략한다. 특히 A는 무전공 입학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을 말했다. 1학년 때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특히 세부 전공을 정해 실제로 공부하고 있는 선배들을 보면서 더욱 실제적인 정보를 가지고서 전공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자율전공학부 등으로 대학 신입생을 뽑는 방식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진짜로 공부하고 싶은 분야에 대해 고민하지 못한 채, 심리적 유예기를 그대로 유지한 상태로 단순히 입시 성적에 맞추어 학과가 아닌 학교의 급에만 신경 쓰는 무의미한 입시 경쟁의 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자율전공 모집이야말로 대학의 생존 전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의 미봉책으로서 학생을 유치하려는 유치한 전략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A의 설명을 듣고서 생각이 상당히 바뀌었다. 자신이 나아가야 할 학문의 길을 제대로 고민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도 같았다.

▲한동대 도서관에서관심 분야인 연극과 배우에 관한 책을 살펴보는 학생 ⓒ 안사을
하지만 같은 고민이 여전하다. 굳이 대학생이 되어서야 진정으로 자신의 전공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고3이 될 때까지 우리 청소년들은 진짜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사고할 수 없다. '좋은' 스펙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어떤' 공부를 할지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직업 선정을 위한 전공 선택을 이야기하는 것만은 아니다. 다양한 삶이 있고 사람마다 다양한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길게, 다채로운 공부 끝에 직업을 선택할 수 있고 어떤 이는 곧바로 생업을 시작할 수도 있다. 문제는 획일화인데, 고용의 불안정성과 직업의 귀천 의식이 이를 부추긴다.
고교학점제의 본질은 학생으로 하여금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면 시행을 코앞에 둔 지금, 고교학점제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자신의 전공과 직종을 반드시 골라야 한다는 방향으로 설계되고 있다. 이는 애초에 꾀했던 방향과는 오히려 정반대로, 이제 고교학점제는 대학 입시 결과를 위한 기획형 교육과정으로 전락할 것이다.
대학을 나온 이와 나오지 않은 이가 차별되는 사회, 명백하게 서열화되어 있는 대학, 돈을 내야만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현실 속에서는 이러한 양상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 공부는 먹고살기 위한 수단이 될 뿐이다. 청년들이 마음껏 지식을 사랑하며 양껏 공부할 수 있는 사회는 언제쯤 펼쳐질 수 있을는지 갈 길이 참 멀다.
위와 같은 이야기를 도란거리면서 우리는 교내 도서관으로 향했다. 가득한 책 내음 사이에 수많은 지식이 숨죽이고 있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분야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서가를 보고 아이들은 고요하게 흥분을 표했다.
"(속삭이며) 선생님, 우리 여기서 얼마나 있을 수 있어요?"
"오늘은 이제 해변만 보러 가면 되니까 시간 충분히 있어."
"아, 진짜요? 좋아요."
아이들은 순식간에 책꽂이의 숲 사이로 스며들었다. 평소 관심사가 그대로 반영되어, 과학을 좋아하는 아이는 우주를 탐구하고 있었고 연기 수업을 받고 있는 학생은 연극과 배우에 관한 책을 찾아내었다. 어떤 학생은 뚜렷한 주제 없이 다양한 책을 뒤적거렸는데, 어려운 책의 내용이 압도됨과 동시에 도전 정신이 생겼다고 했다.

▲어떤 책을 볼까위 학생은 이튿날 저녁 나눔회에서 도서관 방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초, 중, 고의 수준과는 확연히 다른 서적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 안사을
서해와는 확연히 다른 동해의 물빛
해가 질 즈음이 다 되어서야 한동대 탐방을 끝맺었다. 3년 만에 만난 A와 아쉬운 이별을 했다. 올여름 공식적으로 예비 대학생을 위한 캠프가 열리니 그때를 기약하자는 말도 나누었다. 본교 학생들은 감사한 마음을 담아 선배를 향해 군무와 같은 인사를 남겼다.
내일 방문할 포스코의 공업단지를 조금 벗어나 한적한 해변으로 향했다. '이가리 닻 전망대'라는 곳이었다. 바로 옆에 간이 해변이 있어서 잠시 시간을 보내기에 좋아 보였다. 가져간 필름이 흑백이라 표현이 안 되지만 물이 정말 맑았다. 갯벌을 품은 바다만 보다가 투명한 옥빛 바다를 본 아이들은 갑자기 수다스러워졌다.
"우와. 물 완전 맑다."
"물 색깔이 어떻게 이래요?"
"추워요. 근데 예뻐요."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사진도 찍고 대화도 나누면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정해진 시간 없이 우리끼리 자유로우니 참 좋았다. 누구보다도 뛰어난 물수제비 실력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며 나 또한 아이처럼 즐겁게 놀았다. 함께 온 수석 선생님과 진지하게 인생을 논하는 아이도 있었다.

▲바다를 보며 대화 중 ⓒ 안사을

▲흐림 효과로 표정이 보이지 않지만, 언제 어디서나 우리는 서로 반가워한다. 청소년들에게는 이런 시간과 관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 안사을
숙소에 짐을 놓고, 식사를 하고선 다시 밤바다를 거닐었다. 이번에는 인공의 빛이 찬란하게 빛나는 영일대해수욕장이었다. 저 멀리서 버스킹하는 두 남녀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잔잔하게 왕복하는 파도의 경계가 발끝에 닿을락 말락 했다. 바람이 제법 싸늘했지만 젊음이 한창인 아이들의 양 볼을 더욱 뜨겁게 만들 뿐이었다.
밤이 깊도록 걷고, 말하고, 생각하고, 웃었다. 원래 계획했던 일매듭 나눔회는 다음 날 저녁으로 미루었다. 바닷바람이 우리 사이를 수없이 오가며 이미 많은 것들을 공유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지척으로 보이는 포항제철소의 빛을 바라보며 내일의 여정을 기대했다.
덧붙이는 글 | 주왕산, 도산서원, 이육사문학관 탐방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