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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악의가 없기에 서운한 말들을 듣곤 한다. 악의가 있었다면 차라리 화가 날 텐데, 악의가 없기에 괜히 더 섭섭해지고 뭐라 할 수 없는 말들이다.
가령 이런 말이다.
"전 가리는 거 없이 뭐든 잘 먹어요."
너무 뜻밖의 말일까.
실은 나 역시 가리는 거 없이 잘 먹기로 자타공인 일등이었다. 장담하는 거 좋아하지 않지만 감히 일등이라고 말해 본다. 살면서 나만큼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오죽하면 취향이 없다는 것이 부끄러워 억지로 만들어내야 할 지경이었다.
편식이 눈곱만큼도 없는 부모 밑에서 먹성 좋게 나고 자라며 일찍부터 모든 음식을 섭렵했다. 소, 돼지, 닭은 말해 뭐하겠는가. 지금은 흔하지만 당시에는 흔치 않던 양, 오리, 칠면조 등등도 종종 먹었다. 살코기뿐 아니라 머리와 내장, 핏물 뚝뚝 떨어지던 간, 기이하게 생긴 천엽도. 물론 이름 모를 풀들도 사시사철 먹었다.
덕분에 뭐든 고유한 맛이 있다는 것을 몸으로 배웠다. 쌉쌀하기도, 은은하게 달콤하기도, 부드럽게 녹아내리기도, 삼키는 순간까지 쫄깃하기도 하던 갖가지 맛들. 오죽하면 지금도 누군가 내가 경험하지 못한 음식을 먹었다 하면, 대번에 나오는 질문이 이거다. "어때요? 맛있어요?" 습관이란 무섭다.

▲채식으로 바뀐 뒤 들을 때마다 서운해지는 말들이 있다(자료사진). ⓒ edgarraw on Unsplash
그렇게 즐기던 음식들을 이제는 먹지 않는 이유를 묻는다면, 그건 명확하다. 그 동물에게도 얼굴과 개성이 있었고 그 몸통과 사지와 내장은 누군가 손에 피를 묻혀가며 산 동물의 숨통을 끊어버렸다는 것이니까.
동물의 사체를 고리에 걸거나 물에 빠뜨리고 토막 내 먹기 좋게 만든 것이니까. 그 사실을 알아 버렸으니까. 예전이라고 아주 몰랐겠느냐마는 실은 내심 모르고 싶었고, 모르는 데 성공했던 거 같다.
내 채식의 이유를 모두가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모두에게 알리려고 한 적도 없지만, 가까운 사이라고 여겨서, 또 상대 역시 비인간동물의 착취와 학대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믿음으로 내 뜻을 전했음에도, 예의 그 말을 들을 때면 순간 섭섭해진다. 졸지에 내가 편식하는 어린이가 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음식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음식과 음식이 아닌 것을 구분하게 된 것이므로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왠지 까다롭거나 미성숙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특히 그 대화가 식당을 정하다가 나왔다면 더욱 위축되기도 한다. 채식인이 갈 식당은 많지 않으므로.
채식인들에게는(특히 비건에게는) 도덕 선생 노릇을 하려 든다는 누명이 쉽게 씌워지기에 나는 다르게 보이기 위해 무척 노력했지만, 여러 불편을 겪을 때면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진정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우리는 다른 존재의 고통에도 공감할 수 있는 인간 아니던가.
악의 없이 섭섭해지는 말엔 이것도 있다.
"네가 음식을 가리니까 (식당이나 메뉴를) 네가 정해야지."
음식을 가린다는 말에 이어, 원펀치 한 대 더 추가다.
누군가 키가 크거나 작아서 어딘가에 못 들어간다면, 덩치가 커서 또는 작아서 아무 데나 못 들어간다면, 혹은 영어를 못해서 외국 여행을 못 간다면, 그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네가 아무 데나 못 가니까 (갈 곳을) 네가 정해야지."
그의 잘못이 아니지만 행여 미안할까 봐, 행여 상처받을까 봐, 차마 면전에서는 하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자주 듣고 있고 어쩌면 오래 전의 나 역시 종종 해왔던 말인지도 모르겠다.
이 사소한 말들에 악의가 없다는 거, 잘 안다. 어쩌면 배려라는 것도. 하지만 때로 악의가 없는 말들이 더 아플 수도 있다는 것을, 소수에 속하게 된 뒤에야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채식인에게는 말을 더 신중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나의 요지는 아니다.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나는 불완전한 채식인으로서 비채식인들과도 이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어울리고 싶다. 고립되고 싶지 않다. 내게 악의 없는 말을 건넨 지인들 역시, 나를 아끼고 나와 함께 하는 순간을 좋아한다고 믿는다.
다만 우리가 함께 어우러지기 위해서는 소수자뿐 아니라 다수자 역시 작은 노력들을 같이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제안하고 싶다.
나는 내 채식을 못마땅한 눈으로 흘겨보던 육식파 친구가 틈틈이 비건식당을 즐겨찾기 해 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감동으로 뒤로 넘어갈 뻔했다. 채식인이 까다롭다고? 이렇게 쉽게 넘어가고 마니, 천만의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