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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WCA 위장결혼식 사건 후 연행되는 함석헌 선생
YWCA 위장결혼식 사건 후 연행되는 함석헌 선생 ⓒ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승만의 폭압 통치에서 가장 용기 있게 할 말을 하고 언로(言路)를 튼 인물은 함석헌이다. 그의 저항과 비판은 이승만을 넘어 박정희 군사독재로 이어지고 우리나라 자유언론(인)의 상징처럼 되었다.

함석헌은 한 마리 '야생마'처럼 포악한 독재와 싸우면서 민주주의와 씨알의 권리를 지키는 등대지기이자 '저항인'이었다.

그는 태생부터 평안도 용천 바닷가 상민 출신의 야인이었다. 조선 왕조가 지역 차별로 소외시킨데다 한 번도 벼슬을 하지 못한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장기의 배경도 들사람의 상황이었다. 나라가 망할 무렵에 태어나 감수성이 예민한 19세 때에 3.1혁명을 겪었다. 오산학교에서 들사람 류영모·이승훈·안창호·조만식을 만나면서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에 눈뜨게 되었다.

도쿄 유학 시절에 겪은 간토대지진과 우치무라 간조의 야인 사상에 접하게 되면서 함석헌의 '들사람' 혼이 성장한다.

함석헌이 살아온 시대적 배경. 즉 분단, 6.25, 연이은 군부 독재 정치는 그의 야인 정신을 저항 정신으로 체화시켰다. 그가 걸어온, 걷고자 한 야인의 길은 권력·종파·세력·집단화를 거부하는 씨알의 길이었다.

따라서 그의 말은 무게가 있었고 글은 비중이 실렸으며 그의 노선은 민중이 따랐다. 폭압의 시대에 '싸우는 평화주의자'였던 함석헌은 척박한 이 땅의 들길에서 반독재와 평화통일, 그리고 씨알이 주인이 되는 민주화의 소금수레를 끄는 야생마의 역할을 다하였다.

함석헌이 자신의 존재와 <사상계>의 위상을 한층 돋보이게 한 글은 1957년 3월호에 쓴 <할 말이 있다>라는 글이다. '할 말'은 주권재민의 국가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권리이지만, 이승만 독재가 강화되면서부터 국민들은 '할 말'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국민의 입을 틀어막는 권력은 반드시 변칙으로 종말을 고하고 만다. 이승만 정권은 그렇게 하다가 망했다.

함석헌의 이 논설은 <사상계>를 통한 최초의 대사회 발언이었다. 앞서 발표한 몇 편의 글이 대부분 기독교와 종교, 윤리 차원의 문제 제기였다면 이 논설은 시사문제에 대한 함석헌의 본격적인 첫 번째 노호(怒號)이었다. 주요 부문을 골랐다.
'씨알의 소리(1970년 4월호)' 창간호 표지 70세 함석헌(주간) 선생이 사재를 털어서 펴냈다.
'씨알의 소리(1970년 4월호)' 창간호 표지70세 함석헌(주간) 선생이 사재를 털어서 펴냈다. ⓒ 오세훈('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할 말이 있다

밟아도 밟아도 사는 풀, 베어도 또 돋아나는 풀, 너는 무한의 풀 아니냐? 다 죽었다가도 봄만 오면 또 나는 풀, 심은이 없이 나는 풀, 너는 조물주의 명함 아니냐? 푸른 너를 먹고 꾀꼬리는 노래하고 사자는 부르짖고, 썩어진 물에서나 마른 모래밭에서나 다름 없는 향기를 너는 뿜어내니 너는 신비의 것 아니냐?

우리나라 역사는 벙어리 역사다. 무언극이다. 이 민중은 입이 없다. 표정이 없다. 사람인 이상 입이 없으리오만 있어도 말을 아니하고 자라온 민중이다. 할 말이 없어서일까? 아니 있다면 세계 어느 나라의 민중보다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입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을 가슴에 사무치게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는 발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버리집 같이 서 있는 학교 위에, 날아가는 돈 잡는다고 구더기 떼같이 밀려가는 군중들 위에, 그 군중을 또 박차고 먼지를 공중에 날리고 바람 같이 지나가며 뒤도 돌아보지 않은 미친 년 놈들 위에, 또 그 모든 것 다 보면서 나라 망하는 줄은 모르고 재미난 구경한다고 극장 앞에 입을 헤벌리고 줄지어 섰는 저 미친 젊은 놈 젊은 년들 위에 제발 구정물이라도 끼어 얹어 줍시사!

이렇게 되는 역사에 무슨 잠꼬대라고 언론 취채가 무어냐? 저와 조금 다르면 공산당이라, 비국민이라, 이단이라! 제발 그런 소리 맙시사! 시대착오다. 역사의 거꾸로 감이다. 하늘 명령 거스름이다. 그것으로 망한 우리나라 아닌가? 제발 이 민중이 할 말을 하게 하라! 마이다스야 벌써 죽은지가 오래지 않나? 나는 죽어도 말은 아니할 수 없다.

시시비비의 판단이야 없지 않지만 있는 소감을 발표했다가는 언제 판국이 바뀌어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것을 오랜 역사의 경험에 비추어 알기 때문에 구차한 목숨 하나를 보전하기 위하여 그들은 벙어리가 되기로 했다. 그러나 민중이 무표정이면 무표정일수록 구경하는 격이 되면 될수록 특권자들의 싸움은 점점 더 노골적이 되고 압박은 더욱더 꺼림없이 하게 된다. 그러면 비겁한 민중은 더욱더 무표정한 구경꾼이 됐다. 이리하여 원인이 결과를 낳고 결과가 원인이 되어 세계에서 다시 볼 수 없는 무언극의 역사가 엮어졌다. 참혹하지 않은가. 비통하지 않은가. (주석 1)

주석
1> <사상계>, 1957년 3월호.

덧붙이는 글 | [광복80주년명문80선]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광복80주년명문80선#광복80주년#명문8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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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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