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2년 한국광복군 환송기념사진. 첫번째 줄 김구를 중심으로 이시영, 차리석, 박찬익, 조완구 지사가 자리해 있다. 맨 뒷줄에 조성환, 조소앙, 지청천, 이범석, 양우조 지사가 서 있다. ⓒ 국사편찬위원회
이승만의 독선과 아집은 헌법에 따라 선출된 부통령의 존재를 홀대하고 배척하였다.
1948년 이시영은 초대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6.25 전쟁을 전후하여 거창사건을 비롯하여 도처에서 10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군경과 우익단체에 의해 학살되었다. 특히 1950년 6~8월에 자행된 국민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수법이나 희생자 수에 있어서 천인공노할 만행이었다.
이시영부통령은 이승만의 권력욕과 자신에 대한 견제, 끝없이 이어지는 동족상쟁과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정부의 은폐조작 등을 지켜보면서 1951년 5월 1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서한을 신익희 국회의장에게 보내고 부통령 사임서를 피난 국회에 제출했다.
성재 이시영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보기 드문유형의 지도자이다. 조선왕조에서 태어나 대한제국의 한성재판소장·고등법원판사 등을 지냈으며, 국치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의정원의원·법무총장·재무총장 등 임정의 중축을 담당하고, 해방 후에는 대한독립촉성회위원장에 이어 초대 부통령에 선출되었다.
대한제국→대한민국임시정부→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삼대한(三大韓)'의 고위직을 역임한 인물은 그가 유일하다. 우리나라의 정통성과 법통의 정맥을 이은 인물이다.
성재는 '삼대한'의 법통을 씨줄로 삼아, 대한제국에서는 외교부 교섭국장으로서 을사늑약 저지에 사력을 다하다가 세불리 역부족하자 관직을 내던지고 재야에 나서 안창호·신채호 등과 신민회를 만들어 구국운동을 펼쳤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6형제가 뜻을 모아 전재산을 팔고 60여 명의 가솔과 함께 만주로 망명,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 독립군기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3,500여 명의 독립군관을 양성하였다. 국내의 3·1혁명에 뒤이어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헌법기초위원으로 민주공화제 헌법(약헌)을 제정하고 법무총장으로서 임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피눈물나는 풍찬노숙 망명 35년 만에 환국하여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참여하고,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독선독주에 맞서다가 부통령직을 내던졌다.
국민에게 고함
단기 4282년(1948) 7월 20일 뜻밖에도 나를 초대 부통령으로 선임했을 때에 나는 그 적임이 아님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이것이 국민의 총의인 이상 내가 사퇴한다는 것은 도리어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심사원려(沈思遠慮) 끝에 받지 아니치 못하였다는 것을 여기에 고백한다. 그 뒤 임연 3년 동안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대체로 무엇을 하였는가.
내가 부통령의 중임을 맡음으로써 국정이 얼마나 쇄신되었으며 국민은 얼마나 혜택을 입었던가. 뿐만 아니라, 대통령을 보좌하는 것이 부통령의 임무라면 내가 취임한 지 3년 동안에 얼마만한 익찬(翼贊)의 성과를 빛내었던가. 하나로부터 열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야말로 시위소찬(尸位素餐)에 지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 책임이 오로지 나 한 사람의 무위무능에 있었다는 것을 국민 앞에 또한 솔직히 표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매양 사람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답게 일을 하도록 해줌으로써 사람의 적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니, 만약에 그렇지 못할진대 부질없이 허위(虛位)에 앉아 영예에 도취될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 자리를 깨끗이 물러나가는 것이 떳떳하고 마땅한 일일 것이다.
그것은 정부에 봉직하는 모든 공무원 된 사람으로서 상하 계급을 막론하고 다 그러려니와 특히 부통령이라는 나의 처지로는 더욱 그러한 것이다. 내 본래 무능한 중에도 모든 환경은 나로 하여금 더구나 무위케 만들어, 이 이상 고위에 앉아 국록만 축낸다는 것은 첫째로 국가에 불충한 것이 되고, 둘째로는 국민에게 참괴(慚愧) 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 국가가 흥망간두(興亡竿頭)에 걸렸고 국민이 존몰단애(存沒斷崖)에 달려 위기간발(危機間髮)에 있건만, 이것을 광정(匡正)하고 홍구(弘救)할 충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동량지재(棟樑之材)가 별로 없음은 어쩐 까닭인가.
그러나 간혹 인재다운 인재가 있다 하되 양두구육(羊頭狗肉)인 가면 쓴 우국 위선자들의 도량(跳梁)으로 말미암아 초야의 은일(隱逸)이 비육(髀肉)의 탄식(嘆息)을 자아내고 있는 현상이니, 유지자(有志者)로서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뿐만 아니라 정부 수립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관의 지위에 앉은 인재로서 그 적재가 적소에 등용된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다가 탐관오리는 도비(都鄙)에 발호하여 국민의 신망을 표실(表失)케 하여 정부의 위신을 훼손하고 나아가서는 국시의 존엄을 모독하니, 이 어찌 신생 국민의 눈물겨운 일이 아니며 마음 아픈 일이 아닐까.
그러나 이것을 그르다 하되 고칠 줄 모르며 나쁘다 하되 바로잡으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의 시비를 논하던 그 사람조차 관위(官位)에 앉게 되면 또한 마찬가지로 탁수오류에 휩쓸려 들어가고 마니, 그가 참으로 애국자인지 나로서는 흑백과 옥석을 가릴 도리가 없다.
더구나 이렇듯 관기가 흐리고 민정이 어지러운 것을 목도하면서도 워낙 무위무능하지 아니치 못하게 된 나인지라 속수무책에 수수방관할 따름이니 내 어찌 그 책임을 통감 않을 것인가. 그러한 나인지라 나는 이번 결연코 대한민국 부통령의 직을 이에 사퇴함으로써 이 대통령에게 보좌의 직책을 다 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며, 아울러 국민들 앞에 과거 3년 동안 아무 업적과 공헌이 없음을 사(謝)하는 동시에, 앞으로 나는 일개 포의(布衣)로 돌아가 국민과 함께 고락과 사생을 같이하려 한다.
그러나 내 아무리 노혼(老昏)한 몸이라 하지만 아직도 진충보국의 단심과 열성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는지라, 여생을 조국의 완전 통일과 영구 독립에 끝긑내 이바지할 것을 여기에 굳게 맹세한다. 그리고 국민 여러분은 앞으로 더욱 위국진층의 성의를 북돋아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여 주시었으면 흔행(欣幸)일까 한다. (주석 1)
주석
1> 박창화, <성재이시영소전>, 126~129쪽, 을유문화사, 1984.
덧붙이는 글 | [광복80주년명문80선]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