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창숙의 초상화. 1927년 중국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을 때 모습을 둘째아들 김찬기가 그린 그림. ⓒ 심산 김창숙 평전
이승만의 폭압정치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영구집권의 길을 트고 친일파를 중용하여 헌정유린의 척후로 삼았다. 독재권력의 사병화된 국립경찰이 방패막이 역할을 맡았다.
김구를 비롯 독립운동가들은 암살되거나 칩거하고 다수의 지식인들은 침묵을 미덕으로 삼는 듯 1인독재에 대한 비판을 찾기 어려웠다. 한국사회는 거대한 공동묘지처럼 되었다.
이승만의 패악질은 정치분야 뿐만 아니었다. 역사의식이나 민족정신과 같은 국가원수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기본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하나의 사례가 1957년 최남선이 사망하자 조사를 지어 그를 지극히 칭찬한 일이다. 최남선의 친일행위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만큼 차고 넘친다. 올곧은 선비 김창숙이 나섰다.

▲김창숙의 생가.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 심산 김창숙 평전
심산 김창숙.
1879년 경북 성주의 개화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8세에 <소학>을 읽었으나 놀기만 일삼다. 뒤늦게 곽종석, 이승희, 장석영 등에게서 배우고 학자의 길을 걸었다.
을사늑약 체결 뒤 "지금은 글만 읽을 때가 아니다"면서 고향에 대한협회 지부를 세우고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시작하였다. 3․1혁명 뒤 '제1차 유림단사건'의 원인이 된 <파리장서>를 작성했으며, 상해임시정부를 조직하는 데 참여하고, 침체된 국내 독립운동을 고무하기 위해 나석주 의사의 거사를 도모하였다. 1927년 밀정의 밀고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두 다리를 다쳐 앉은뱅이가 되었다.
해방 후 이승만의 단정 수립에 반대한 이후로 이승만 정권 내내 반독재 투쟁으로 일관하여 심한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1953년 전국의 향교 재단을 규합하여 성균관대학을 인가받고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으나, 이승만 정권의 보복으로 '성균관 분규'가 발생하면서 총장직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다. 그 후 집 한 칸 없이 여관이나 친척집을 전전하다 1962년 병상에서 외롭게 숨을 거두었다.
불꽃처럼 타오르다가 가랑잎처럼 조용히 스러진 그를 가리켜 사람들은 '한국의 마지막 선비'라 부른다.
대표급 친일파 최남선에 대한 이승만의 조사를 본 심산은 노기를 억제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쓴 것이 <경무대에 보낸다>라는 격문과 같은 글이다. 심산은 이 글을 경무대(전 청와대)에 보내고, 대구매일신문에도 발표하였다.

▲성균관대 안에 있는 김창숙 동상.성균관대 안에 있는 김창숙 동상. ⓒ 김종성
경무대에 보낸다
아아, 우남(雩南) 늙은 박사여
그대 원수(元首)로 앉아
무엇을 하려는가
고금 성현(聖賢)의 일
그대는 보았으니
응당 분별하리
충역(忠逆) 선악 갈림길을.
진실로 올바른 세상
만들려거든
우선 역적(逆賊)들
주살(誅殺)하라
생각하면 일찍이
삼일 독립 선언 때
남선(南善) 이름 떠들썩
많은 사람 기렸지.
이윽고 반역아(反逆兒)
큰 소리로 외쳐
일선융화(日鮮融和) 옳다고
슬프다. 그의 대역(大逆)
하늘까지 닿은 죄
천하와 나라 사람
다 함께 아는 바라.
그대 원수(元首)의 대권(大權)으로
차노(此奴) (주석 1)를 비호터니
노제(路祭)에 임해선
애사(哀詞)를 보냈도다
충역 선악의 분별에
그대는 어그러져.
나라 배신, 백성 기만
어찌 다 말하랴
이 나라 만세의 부끄러움
박사 위해 곡(哭) 하노라. (주석 2)
주석
1> '이 종놈이란 뜻'
2> <김창숙문존>, 78~79쪽.
덧붙이는 글 | [광복80주년명문80선]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