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를 살아가는 4050 시민기자가 취향과 고민을 나눕니다.[편집자말] |
2024년이 언제 저물었나 싶은데 어느새 설날이다. 이맘때면 남편은 세뱃돈 장만으로, 나는 음식 장만(큰집이라 집에서 차례를 지낸다)으로 마음이 분주하다. 하지만 우리와 달리 세상 느긋한 이들이 있다. 바로 아이들이다. 아이들에게 설날은 대목이다. 세뱃돈으로 수입도 짭짤하고 연휴로 시간도 넉넉하기 때문이다.
취업한 자녀는 부모에게

▲설날이 다가오자 취업을 한 큰 아이가 뜻밖의 걱정을 털어놓았다. 세뱃돈을 받아야 하나, 드려야 하나. ⓒ 최은경
아이 셋 중 올해 설날을 유난히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는 첫째다. 취업 후 처음 맞이하는 설날이어서다. 대학을 졸업하고 정부 지원을 받아 창업의 길을 걸었던 첫째는 3년여의 시간을 지나 취업의 길을 택했는데 직장인이 되고 보니 연휴만큼 기다려지는 게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설날이 다가오자 뜻밖의 걱정을 털어놓았다. 저녁을 함께 먹던 어느 날이었다.
"세뱃돈을 받아야 하나 드려야 하나?"
안정적인 수입이 들어오다 보니 창업 때와는 달리 은근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글쎄, 주변 친구들은 어떤데?"
"그러게. 좀 알아봐야겠네."
며칠 후, 첫째는 고등학교 친구와 대학 친구들에게 들은 이야기라며 세뱃돈에 관한 이야기를 내게 전해주었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대부분 사회 초년생이어서 세뱃돈을 드리는 친구가 거의 없다고 했다. 연차가 좀 있어도 받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친구가 많다고 했다. 그러면서 준다 해도 조카에게 주거나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드리지 부모에게 드리는 경우는 없다고 했다.

▲세뱃돈 논쟁취업한 자녀에게 세뱃돈을 주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 전영선

▲세뱃돈 논쟁직장인은 세뱃돈을 받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 전영선
부모는 취업한 자녀에게
첫째의 말을 듣고 나도 문득 궁금해졌다. 다른 집들은 어떤지. 그래서 몇몇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지도 받지도 않아."
"세배 받는데 아무것도 안 주기 그렇지 않아?"
"그래서 덕담을 주지 ㅎㅎ"
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
"벼룩의 간을 내 먹지. 월급 얼마나 된다고 애한테 받어?"
"많이 받으면?"
"많이 받으면 많이 저축하라 해야지."
그중 이란성 쌍둥이를 둔 지인의 말이 인상 깊었다. 그녀는 나보다 서너 살이 많아 아이들도 취업 연차가 좀 된 편이다. 처음 취업했을 때는 세뱃돈을 주었는데 어느 순간 아이들이 부담스럽다며 세뱃돈에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주지 않으려 했는데 남편이 서운해 하더라고. 새해에 복은 받아야 한다면서 말야. 그러더니 만 원 신권을 한 장 봉투에 넣어서 주기 시작했지."
설왕설래하던 이들은 이 방법에 대부분 괜찮은 방법이라며 손뼉을 쳤다.
지인들은 아무도 자녀에게서 세뱃돈을 기대하지 않았다. 자식은 자식대로, 본인은 본인대로 앞으로의 삶을 잘 꾸리기만을 바랐다.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녹록지 않은 현실이 느껴졌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1980년대)만 해도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버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대학등록금이 비싸지도 않았고 대학생에 대한 처우도 좋았던 시절이었다(그때는 교통비를 비롯한 모든 경비에 대학생 할인 제도가 있었고, 예금 이자도 연 10%가 넘었다). 게다가 취업도 지금처럼 치열하지 않았던 듯하다. 졸업을 앞두고 단 한 번도 취업 걱정을 하지 않았던 걸 보면 말이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 젊은이들의 삶은 보는 것만으로도 빡빡하다는 생각이 든다. 등록금도 물가도 만만치 않고, 예금 이자마저도 인색하기 때문이다. 문득, 언젠가 수업 중 들었다며 첫째가 전해준 말이 떠올랐다.
"여러분은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 첫 세대가 될 겁니다."
그 말을 떠올리니 취업을 한 자식에게도 세뱃돈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자명해졌다. 지불해야 할 청구서만 즐비한 사회에 내던져진 자식의 세상에서 부모마저 청구서를 내밀 수는 없지 않나 싶어서였다. 그런 마음이 들다 보니 아무래도 쌍둥이를 둔 지인의 말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했다. 취업한 아이에게도 세뱃돈을 주기로. 대신 취업한 아이에게 줄 세뱃돈은 버리기 아까운 카드와 함께 내밀기로 했다. 깨끗한 만 원 한 장과 함께 "건강하고 원하는 일이 모두 성취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는 덕담을 담아서 말이다.

▲세뱃돈과 카드취업한 아이들에게는 버리기 아까운 카드에 깨끗한 만 원 한 장을 넣어 내밀기로 했다. ⓒ 전영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