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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멸의 화가: 반 고흐> 전
<불멸의 화가: 반 고흐> 전 ⓒ 전사랑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들이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 와 있다. 이번 <불멸의 화가 반 고흐> 전시는 반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 나눠져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흐만큼 자신이 '있었던 곳'에 집중한 화가도 드물다. 그에게 장소란 그를 품어주는 공간이자 작품의 주제 그 자체였다.

전시는 크게 네덜란드 시기(1881-1885), 파리 시기(1885-1888), 아를(Arles) 시기(1888-9), 생레미 (Saint-Rémy) 시기(1889-1890),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 시기(1890)로 나뉘어 있다. 이번 전시는 특별히 고흐가 어떤 공간과 장소에 있느냐에 따라 작품의 주제뿐 아니라 색채도 변화함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아쉽게도 미술관에서의 사진 촬영은 불가했다. 사진 촬영이 가능했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상주의 화가 반 고흐 전에 모인 인파가 이동하며 관람하기가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네덜란드 시기 반 고흐의 작품에는 주로 농부나 인부들의 삶이 투영되어 있어, 당대 네덜란드의 기근과 빈곤 그리고 북유럽 특유의 살벌한 추위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듯했다.

이어지는 파리 시기에는 정물과 자화상에 집중하면서 화가로서의 내면 세계를 확립해 나갔다. 이 시기 그려진 반 고흐의 자화상에서 거친 붓칠 안에 감춰진 그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거칠고도 예민한 성격에 가장 맑고 순수한 영혼이 보이는 것 같다.

프랑스의 남쪽 지방인 아를로 이주하면서 반 고흐는 남프랑스의 온화한 날씨와 다채로운 꽃들, 정감 있는 건축들이 시각적으로 다양한 영향을 받았다. 이번 전시에서도 반 고흐의 색채와 작품 구성이 '아를 시기'에 이르러 활개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를과 생 레미에 머물던 시기 반 고흐는 그의 삶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걸작인 <해바라기>, <별이 빛나는 밤>, <밤 카페테라스> 등을 그렸다(아쉽게도 이번 전시에는 오지 않았다). 이번 전시는 고흐의 작품만 260점 소장하고 있는 크롤러 뮐러 박물관의 소장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소장 품 중 원화 76점이 소개되었다.

반 고흐 하면 떠오르는 <해바라기> 시리즈는 세 점이 각각 일본 미술관, 암스테르담 미술관, 그리고 영국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별이 빛나는 밤>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 <밤 카페테라스>는 네덜란드크롤러 뮐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렇게 세계 각곳에 흩어져 있는 반 고흐 명작을 직접 보러 가는 길은 사실 쉽지 않은 여정이다. 하지만 아를과 생 레미 시기 그려진 반 고흐의 대표 작품이 가진 서사와 감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장소가 있다. 바로 아를, 생레미를 품은 휴양지 남프랑스다.

고흐가 있었던 장소에 따라 이동하는 이번 전시 기획에 걸맞게 3년 전 고흐의 여정을 따라가본 여행 이야기를 풀어내 볼까 한다.

아를에 도착한 반 고흐는 자신의 숙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했다.

햇살이 가득한 곳에 외관은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고 내부는 햇살 가득한 곳에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어.

1888년 9월 고흐는 자신의 숙소가 있는 <노란 집>을 그렸다. 모델이 된 건물은 전쟁 중 파괴되었지만, 아를에서 이런 따뜻한 색감의 건축물은 흔히 볼 수 있다.

<밤 카페테라스>도 마찬가지. 백 년이 지난 세월에서도 반 고흐가 그렸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게 놀랍다.

 반 고흐의 <밤 카페테라스> 의 모델이 된 카페
반 고흐의 <밤 카페테라스> 의 모델이 된 카페 ⓒ 전사랑

나는 내 안에 무언가 강렬한 불꽃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계속 그림을 그리게 해.

아를에 머물던 1888년, 고흐의 '강렬한 불꽃'은 <해바라기>의 강렬한 색감으로 타올랐고, 잠시나마 그의 불안함과 우울은 사그라드는 듯했다. 폴 고갱을 초대하면서 그의 삶에 대한 기대감도 차 올랐으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일까. 폴 고갱과 갈등이 생기자 귀를 자르는 등의 자해를 하는 고흐를 보고 고갱은 파리로 도망가고 말았다. 그 후 고흐는 정신적으로 더욱 쇠약해졌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곧 그의 구원이었다. 고흐가 귀를 자른 후 치료를 받았던 병원도 자신의 불안한 정신 상태를 쓰다듬듯이 아름답게 그려, <아를의 병원 정원>이란 작품으로 남았다.

 고흐가 다친 귀를 치료 받으러 간 아를의 병원
고흐가 다친 귀를 치료 받으러 간 아를의 병원 ⓒ 전사랑

이후 정신 발작이 심해지자, 아를에서 가까운 곳인 생 레미 정신 병원에서 요양한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고흐는 주변의 장소들, 꽃들, 사물들을 화폭에 담았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털어놓는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칠까. 보잘것없는 사람, 괴벽스러운 사람,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 사회적 지위도 없고 앞으로도 사회적 지위를 갖지도 못할, 한 마디로 최하 중의 최하급 사람(...) 언젠가는 내 작품을 통해 그런 기이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여 줄 거야.

 셍 레미 정신 병원 내부
셍 레미 정신 병원 내부 ⓒ 전사랑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있는 동안 그린 풀과 나무, 꽃들은 생명력에 요동친다. 그냥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감각이 살아 숨 쉬는 듯하다. 그는 이 병원에서만 150점의 그림을 그리며 창조적 에너지를 그야말로 불살랐다.

화가가 발자취를 따라 생레미 병원의 정원을 거닐었다. 올리브 나무로 둘러 쌓인, 더없이 온화하고 평화로운 이곳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한 그가 안타깝다. 그럼에도, 사시사철 따뜻한 남프랑스의 태양이 그나마도 그를 지켜주고 있었던 것일까. 파리 근교인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옮긴 후 두 달 만에 그는 권총으로 삶을 마감했다.

 셍 레미 정신 병원 정원. 반 고흐는 이 곳의 정원에서 올리브 나무와 꽃, 소나무 등을 그렸다
셍 레미 정신 병원 정원. 반 고흐는 이 곳의 정원에서 올리브 나무와 꽃, 소나무 등을 그렸다 ⓒ 전사랑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살았던 기간 중에도 고흐는 <까마귀가 있는 밀밭>, <오베르-쉬르-우아즈의 교회>와 같은 걸작을 탄생시켰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는 그의 동생 테오와 함께 반 고흐의 무덤이 있고 그의 작품 무대가 된 밀밭과 교회도 그대로 남아 있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파리에서 시작되어 아를과 셍 레미를 거치는 고흐의 미술여행이 그의 무덤이 있는 파리 근교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끝나는 셈이다.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을 정확히 표현하기 보다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내 방식대로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해, 나는 색채에 심취했다.

고흐의 고백처럼, 그의 작품은 분명 그가 지나쳐 간 장소들을 담고 있지만, 강렬한 색채는 바로 고흐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는 언어이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 색채의 언어를 따라, 그의 내면 세계를 따라 이동하는 여행이 어떤 미술 여행보다 더 삶에 대해 감사하고, 겸허해지는 과정이 되는 이유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반고흐전#남프랑스#예술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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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을 공부하러 영국에 갔다 미술에 빠져서 돌아왔다. 이후 미술사를 전공하고 미술에 관련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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