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기자말] |
겨울로 가는 녹동항이 분주하다. 오가는 배 사이로 지척인 소록도가, 바다보다 더 짙푸르다. 저 섬에 갇힌 한과 멸시, 저항과 의지로 피어난 삶에 대한 열망은 얼마였던가? 소설가 이청준이 <당신들의 천국>에서 그린 모습마저 저 섬이 겪은 아픔과 슬픔의 소소한 부분에 불과할지 모른다.
소록도 남쪽의 제법 큰 섬 거금도가 득량만을 향해 헤엄친다. 녹동항에서부터 바다를 가르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 섬인 듯 모호하기만 하다. 거금도 옛 이름이 절이도다. 折爾(절이)는 무슨 의미일까? 뭔가 꺾겠다는 의지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 섬에 녹도진 휘하 '도양목장' 중 하나로 말을 기르는 성(금산면 어전리∼석정리)을 쌓았다. 돌로 쌓은 말 목장이라는데 가치가 있다. 남쪽으로 열린 높은 적대봉과 용두봉 사이 계곡과 능선을 이어 길게 쌓은 성이다. 완만한 서쪽 구릉에서 시작되어 남쪽 끝 해안선까지 이어진 성벽은 그리 높지 않다.
조선 시대 말 목장은 주로 섬에 두었다. 서남해안 섬들이 목장으로 활용되었다. 대표적인 곳이 부산 영도다. 영도 본이름은 절영도로, 여기서 기르는 모든 말이 명마로 하도 빠르게 달려 '그림자가 잘려 나갈(絶影)' 정도라는 데서 섬 이름이 유래했다.
전라 좌·우수영에도 말 목장이 있었다. 우수영은 진도에, 좌수영은 절이도와 여수 화양면 끝자락에 목장을 두었다. 목장은 좌수영에서 큰 비중을 두어 관리했을 개연성이 높다.
절이도에 목장 성을 쌓은 연유가 세조실록(1466.02.17)에 자세하다. 전라도 점마별감(말을 점검하는 사복시 별감) 박식이 아뢰기를 "도내의 흥양 절이도는 주위가 2백 70리인데, 물과 풀이 모두 풍족하여 말 8백여 필을 방목할 수 있습니다. 청컨대 회령포·금갑포·돌산포·남도포·어란포 등 여러 포구의 선군(船軍) 하여금 (성을) 수축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고 기록한다.
이 목장에 364필을 방목(1470)했다니 상당히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 길이는 북쪽 미확인 유적을 제외하고 4652m이다. 너비는 하부 3.2m, 상부는 1.4m다. 3단의 성벽 1단은 넓게 막쌓기를, 2단은 넓적한 돌로 열을 맞춰서, 3단은 정연하게 쌓은 계단식이다. 하지만 지금 목장 성은 수풀에 휘감기고 곳곳이 무너져 내렸다. 그나마 온전한 성벽도 위태해 보인다.
정유재란, 이곳 거금도에서 벌어진 '절이도해전'은 명나라 도독 진린이 이순신 장군을 인정하는 계기가 된다. 난중일기는 유실되었으나, 선조실록엔 자세하다. 순천 왜교성에 쥐처럼 웅크린 고니시 유키나가를 잡으려는 전쟁을, 실록과 난중일기를 바탕으로 재구성해 보았다.
정유재란
<무술년(1598) 칠월 열흘>
정유재란은 순전히 전라도가 목적이다. 임진년 실패가, 전라도를 뺏지 못한 데에 있다는 것이다. 정유년 7월 칠천량에서 우리 수군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원통한 일이다.
왜놈들이 조선 백성을 보기만 하면 죽였다. 코와 귀를 베어가는 만행도 모자라, 잡아다 노예로 팔기도 했다. 정유년 8월 남원과 전주를 점령하고, 9월 충청도 직산에서 패해 남하했다. 9월 16일, 명량에서 나는 왜놈들을 격살시켰다. 신고를 다 했지만 천행이었다.
이때부터 왜놈들은 전라도 정복과 보급로 및 퇴로 확보에 맞닥뜨렸다. 순천-남해-사천-고성-거제-진해-부산-울산에 걸쳐 왜성을 쌓아 웅크리며 장기 농성에 들어갔다. 히데요시가 내렸다는'조선 하삼도를 깨끗이 비워 일본 관서 백성을 이주'하라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함이다. 순천엔 고니시 유키나가가 왜성을 쌓고, 마치 나라 다스리듯 한다. 민패를 발급하고, 농사를 지으면 세금 걷듯이 곡식을 빼앗아 간다.
올 중춘(2월) 열여드레 고금도로 통제영을 옮겼고, 큰 전함 수십 척과 구리와 쇠를 모아 대포와 포탄을 충분히 만들었다. 해로통행첩 발급으로 군량 1만 섬도 확보했다. 무엇보다 군사가 8천이 되었다. 칠천량 이전의 절반에 미치지 못하지만, 명량을 생각하면 충분한 전함과 군사다. 특히 노를 젓는 격군이 많아진 건 너무나 고마운 일이다. 전라도 백성에게 큰 빚을 졌다.
고금도로 이진하자, 왜놈들이 흥양 앞바다로 나와 분탕질 치고 있다. 이는 필시 나를 시험하려는 수작일 것이다. 흥양 현감 최희량이 용맹하다. 3월 스무날부터 스무나흘까지 1백여 왜적을 베었고, 3명을 생포했다. 희량 같은 이가 있어, 나라 기틀이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왜놈들이 여자만이나 순천만에서 함부로 분탕질 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칠월 아흐레에 남당포에 상륙한 왜적을 무찌르고, 왜선 2척을 불태웠다. 희량이 사로잡은 포로들을 통해 순천 왜교성 실상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다.
조명연합군의 '4로병진작전'은 그나마 다행이다. 순천으로 진군하는 '서로군'은 권율 도원수와 전라병사 이광악의 1만, 명 제독 유정의 2만 6천이다. '수로군'은 진린 대도독과 우리 수군이 연합한다. 육·해상에서 왜교성을 공격할 것이다. 여기서부터 차례로 왜성을 무너뜨려 나갈 예정이다. 이로써 기나긴 전쟁을 부디 끝냈으면 한다. 백성의 마음이다.
절이도해전
<칠월 열이틀>
열엿새 진린이 고금도 통제영에 당도한다. 군사적 예를 다할 것이다. 성대한 잔치도 베풀 것이다. 하지만 신뢰하지는 않는다. 그는 성정이 포악하고 거만하다고 들었다. 한양을 떠나는 유월 스무엿새에, 찰방 이상규의 목에 새끼줄을 얽어매어 끌고 다닌 일은 그가 어떤 자인지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성심을 다할 것이다. 5천 수군과 대소 5백 척 전선이 새로 생기는 일이다. 왜놈을 제압할 수만 있다면, 무엇인들 못 하겠는가?
<칠월 열엿새>
고금도 앞바다가 호수처럼 잔잔하다. 좋은 징조다. 더위도 꺾이기 시작했다. 진 도독이 좋아한다는 향기로운 술과 맛난 음식을 마련했다. 사(巳)시에 통제영을 나섰다.
마량포구에 다다르자, 멀리 진 도독 함대가 보인다. 깃발을 흔들어 신호를 보냈다. 물때가 맞아 빠른 속력으로 다가온다. 신호를 바꾸어 바닷길을 안내했다. 통제영에 이르러, 5천의 명 수군을 배불리 먹였다. 도독에게 향기로운 술을 대접했다. 바다와 육지의 산해진미를 곁들였다. 흡족해하는 것 같았다.
<칠월 열여드레>
통제영이 갑자기 술렁거렸다. 왜선 백여 척이 녹도진을 침공해 왔다. 잘 되었다. 어차피 큰 싸움을 위해서는 명 수군의 허실을 파악해야 한다. 진 도독과 녹도에 이르니 적이 도주한 뒤였다. 남아있던 적 정탐선 2척이 재빠르게 도망친다. 진 도독과 함께 금당도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모처럼 전장에 나와서인지, 도독이 자못 위엄을 뽐내려 하였다.
<칠월 열아흐레>
절이도에 8척 전함으로 녹도만호 송여종이, 금당도엔 명군 30여 척을 매복시켰다.
<칠월 스무날>
새벽에 송여종이 보낸 전서구가 날아왔다. 소록도와 절이도 사이 바다로 크고 작은 왜선 100여 척이 몰려오고 있다는 전갈이다. 매복 중인 함대를 급히 발진시켰다. 명군은 금당도에서 나오지 않았다. 적선 중군이 소록도 아래에 이르렀을 때, 양쪽에서 함포를 쏘아 적을 둘로 갈라쳤다. 앞의 50여 척을 불사르고, 6척을 나포했다. 뒤에서 오는 적선은 함포를 쏴 쫓아 버렸다. 송 만호의 공이 컸다. 큰 승리였다.
진 도독과 운주당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한창 흥이 오를 무렵 명 군관이 보고하기를 "조선 수군이 절이도에서 적선 50여 척을 불태우고 6척을 나포했습니다. 수급이 71이옵니다. 명군은 바람이 좋지 못해 싸우지 못했습니다"라고 변명했다.
이에 진 도독이 술잔을 깨뜨리고 화를 내며 보고한 군관의 목을 베려 하였다. 급하게 도독을 제지하며 "대인께서는 수군 대장으로 왜적을 무찌르기 위해 여기 계십니다. 따라서 진중 모든 승첩은 장군의 것이지요. 이렇게 이른 시일에 황제께 승리를 아뢰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하고 송 만호가 베어온 수급 40을 주었다.
이에 도독은 "본시 장군이 조선의 명장이라고 들었는데, 과연 그 말이 틀림없습니다." 하였다. 이로써 나를 대하는 진린의 태도가 일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선 백성에 대한 태도까지 바뀐 건 아니었다.
1598년 가을, 서로군 총지휘관 유정은 고니시의 뇌물에 공격을 멈춘다. 진린도 뇌물과 (조선인) 수급에 반나마 회유당한다. 이순신만 고군분투한다. 그러함에도 노량과 관음포 해전에서 진력하다 최후를 맞는다.
군사용 말을 기르던, 허물어져 가는 절이도 목장 성에서 새삼 숙연해진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