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킁킁... 이게 무슨 냄새지?'
얼마 전,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시큼하면서 쿰쿰한 냄새가 코 끝을 확 스쳤다. '어디서 나는 냄새일까' 하며 냉장고를 뒤적거리니 구석 한켠에 조용히 숨어 있는 김치통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아 범인이 저거였구나.'
몇 달 전, 엄마로부터 전해 받은 '이모표 김장김치'가 내 눈을 피해 조용히 잠복근무를 하고 있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며 공기 속에서 겨울 내음이 날 때쯤 이모는 어김없이 김장김치를 보내주신다. 커다란 김치통이 넘칠 만큼 꽉꽉 채워.
텃밭을 가꾸며 직접 재배한 고춧가루, 배추, 파, 양파 등을 아낌없이 넣은 김장김치는 산해진미가 따로 없다. 입에 넣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아삭아삭하고 입맛이 돈다.
한동안은 수육을 해서 함께 곁들이기도 하고, 김치 한 가지만 있어도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울 만큼 담근 김치만의 신선함과 아삭함을 즐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김치는 익고 물리는 시점도 찾아오고… 자연스레 멀어지는 김치.
하지만 김치는 나를 미워하기는커녕 조용히 혼자만의 숙성의 시간을 가지면 더 깊고 그윽한 맛을 선보일 준비를 한다. 여러모로 참 기특하고 감사한 김치다.
냉장고에 시큼하고 쿰쿰한 냄새가 들이치기 시작했다는 것은 새로운 '묵은 김치'의 세계로 돌입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뚜껑을 열어보니 새빨간 김치가 맛있게 익어 있었다. 한데 곰팡이가 허옇게 핀 부분도 있어 이렇게 더 두었다가는 아까운 김치를 버릴 수도 있겠다 싶다. 오늘은 김치요리를 해야겠다.
김치처럼 다채로운 변주곡을 가진 음식이 또 있을까. 갓 담근 김치는 갓 담근 대로, 익으면 익은 대로, 묵은 김치는 또 묵은 김치 대로, 하나같이 풍성하고 맛깔스러운 맛을 자랑하는 김치! 잘게 썰어 들기름에 송송 볶아도 맛있고,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 칼칼하게 끓여 낸 김치찌개는 또 얼마나 맛있는지.
김치볶음밥, 김치전, 두부김치 등 만들 수 있는 요리도 무궁무진하다. 얼마 전, 엄마가 돼지고기를 듬뿍 넣어 김치찌개를 만들어주셨는데 밥도둑이 따로 없었다. 그 자리에서 한 그릇 뚝딱 해치워 버렸다.
오늘은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김치볶음밥을 만들기로 했다. 푹 익어 시큼한 맛이 나는 김치를 잘게 썰고, 함께 넣을 스팸도 준비했다. 진한 맛이 일품인 이모표 명품 들기름을 팬에 두르고 송송 썬 파를 아낌없이 투척해 파기름을 넉넉히 만들었다.
그 다음으로 채 썬 당근을 준비했다. 제철을 만난 겨울철 당근은 당도가 높다. 얇게 채 썰어 김치볶음밥에 넣어주면 은근한 단맛을 끌어올리며 김치볶음밥의 감칠맛을 더한다. 절대 빼놓아서는 안 되는 필수 재료다. 신맛을 중화시키며 김치의 부족한 단맛을 끌어올리는 천연 조미료 역할을 하기 때문에 당근을 꼭 넣어주는 것이 맛있는 김볶의 중요한 '킥'이다.
다음으로 스팸을 넣고 노릇하게 구워질 때쯤 김치를 투하한다. 김치 국물도 약간 넣어주고 설탕과 간장으로 간을 해주면 다른 조미료 없이도 입맛 도는 김치볶음이 완성된다.
그제야 밥을 넣고 비벼준다. 김치 국물도 한 국자 넣어주고, 매콤새콤한 김치볶음과 밥이 잘 섞이도록 부지런히 비벼준다. 감칠맛 나는 김치볶음과 고슬고슬한 밥이 만나 만들어진 매콤달콤한 김치볶음밥.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정말 맛있다.
여기에 꼭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달걀 프라이다. 달걀 프라이 빠진 김치볶음밥은 그야말로 앙꼬 없는 찐빵과 같다고 할까. 꼭 필수로 넣어줘야 완벽한 김치볶음밥이 완성된다.
"와! 너무 맛있다."
한 그릇 덜어 내어주니 김치볶음밥 마니아 남편은 기분이 좋아서 덩실덩실 엉덩이춤을 추고 난리가 났다. 혼자서 두 그릇을 싹 해치웠다. 아직 냉장고에 묵은 김치가 두둑이 남아 있어 다행이다. 돌아오는 주말에도 김치볶음밥으로 든든히 한 상 차려 남은 묵은김치도 심폐소생술하고 남편의 흥을 돋워줘야겠다.
김치통을 열고 김치를 썰다가 가끔 울컥할 때가 있다. 타지에 있을 조카의 안위를 생각하며 힘들게 김치를 담았을 이모 생각에. 손맛 좋은 '이모표 김치'가 더욱 귀하고 맛있게 느껴지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정성과 사랑이 가득 담긴 마음까지 든든히 채워주는 '영혼의 김치'다.
오늘도 나는 김치를 썰고 손끝에서 나는 김치 냄새를 맡으며 이모의 사랑을 실감한다. 작은 체구로 무거운 김치를 이고 강원도 산골에서 경기도 끄트머리까지 힘들게 달려왔을 엄마의 지극한 사랑을 생각한다. 맵싸하면서도 달콤한, 따뜻한 삶의 맛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