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한 아동 문학을 소개합니다. 어른에게도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아동 문학을 통해 우리 아동 문학의 현주소를 살펴보고, 문학 속에 깃든 아이들의 마음과 어른의 모습을 들여다 봅니다.[기자말]

퓨전 사극이 대세인 시대에 '정통 대하 사극'으로 승부를 보겠다던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이 역사 왜곡이라는 오명을 쓰고 여론의 뭇매를 맞는 것을 본 적이 있다. SNS와 같이 개인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채널이 많아진 세상에서 정확한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는 그만큼 부담이 커진 것이 사실이다.

현대 사회는 세분화되고, 전문화 되어 있기에 어떤 분야든 전문가의 비판을 막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드라마를 준비한 제작진은 전문가 그룹의 자문은 물론이고, 고증을 거친 소품들까지 역사적 사실을 훼손하지 않는 사극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원작 소설의 작가는 물론 역사에 조예가 깊은 시청자들에게까지 실망감을 주고 논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제작진은 드라마를 '창작물'로 보아 달라는 부탁으로 논란의 상황을 일축할 수밖에 없었다.

창작 세계에서 역사적 사실은 '뜨거운 감자'다. 흥미로운 소재이지만 다루기 힘든 소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드라마나 영화, 문학을 통해 기록으로만 존재하던 역사적 사실은 생명을 얻는다. 기록된 사실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세계를 상상하며, 그 속에서 미지의 인물을 건져 올려 당대 인간의 삶과 고뇌를 찾아낸다.

더불어 그것을 현 시대의 삶과 접목시킨다. 난도 높은 창작 작업이지만 매력적인 작업일 수밖에 없다. 역사 동화도 이와 같은 길을 걷는다. 자칫 사실과 다르게 기술될 수 있는 역사의 길을 조심스레 걸으며 사뿐사뿐 이야기를 전한다.

장운이와 토끼 눈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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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정리 편지>의 주인공은 열두 살 장운이다. 장운이는 어리지만 집안 살림을 걱정해야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완전히 기력을 잃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양식거리를 얻어와야 하는 형편이다. 덕이 누이도 가끔 남의 집 일을 하며 집안 살림을 한다.

어느 날, 나무를 하러 간 장운이가 장정들 여럿이 지키고 있는 양반 할아버지를 만난다. 할아버지는 눈이 토끼 눈처럼 빨갰는데 눈이 아파 약수가 있는 '초정리'에 왔다고 했다. 이쯤 되면 어른 독자들은 이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다. 책을 너무 좋아해서 밤새 책을 읽다가 눈이 나빠진 임금, 세종 대왕이다.

세종실록에는 아버지 태종이 아들의 눈이 너무 나빠지자, 동궁전의 책을 모두 치우라는 명을 내렸다는 일화도 있다. 눈을 치료하기 위해 온천에 자주 갔고, 초정리 약수를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니까 세종, 눈, 온천, 약수 등의 단순한 키워드로 작가의 이야기 촉이 발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역사적 기록에서는 세종의 여러 가지 업적만이 존재한다. 한글 창제와 관련된 기록도 집현전 학자들을 다독인 일, 양반들의 반대에 부딪혔던 일 등 정치 권력을 가진 이들의 기록밖에는 없다. 정작 한글을 배워 썼던 평민들이 어떻게 한글을 접하게 되었는지는 기록될 수 없었다.

배유안 작가는 그 기록의 부재 속으로 살금살금 걸어 들어가 하늘과 같은 존재였던 세종과 평민 장운이를 만나게 한다. 누구보다도 글이 필요했던 장운이가 손을 뻗어도 절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던 '글자'를 만나게 된다.

역사 동화는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인물 그리고 가상의 인물을 동시에 만나게 한다. 덕분에 독자들은 알고 있었던 역사적 인물이 주는 현실감 속에서 가상의 인물을 진짜인 듯 실감나게 만날 수 있게 된다. 어른들도 함께 누렸으면 싶은 역사 동화의 매력이다.

토끼 눈 할아버지가 가르쳐 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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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눈 할아버지는 장운이에게 약수를 매일 떠다 주면 쌀을 주겠노라고 약속한다. 그리고 약수를 떠 온 장운이에게 한글을 가르친다. 이 작고 소박한 일 덕분에 장운이는 글을 몰라 땅을 빼앗겼던 아버지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갚지 못한 아버지 약값 때문에 멀리 종살이를 가게 된 덕이 누이도 장운이에게 배운 한글로 편지를 써서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편지를 받은 장운이는 누이가 어디 사는지 알게 되고 찾아갈 수 있게 된다. 힘들게 종살이를 하던 덕이도 편지 덕분에 버틸 힘을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해피엔딩을 맞는다. 토끼 눈 할아버지가 알려 준 '글' 덕분이다.

할아버지는 떠나시고 다시 볼 수 없었지만, 덕이를 좋아하던 오복이도 장운이에게 글을 배워 덕이에게 소식을 전한다. 약재 영감네에서 만난 할아버지의 손녀 딸 난이도 함께 글을 배운다. 돌 깎는 일을 함께 배우던 친구들도 하나 둘, 글을 배우게 된다. 글을 배우니 자꾸 잊어버리는 것을 적어 놓을 수도 있고, 보고 싶은 사람에게 소식을 전할 수도 있다. 글을 배우니 좋은 일이 자꾸자꾸 생긴다.

이야기는 훈민정음 반포 이전에 세종이 초정리에서 평민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쳤다는 설정으로부터 시작된다. "훈민정음 반포를 한다고 이제껏 글의 효용성을 몰랐던 백성들이 갑자기 글을 배우는 번거로움을 기꺼이 받아들였을까?" 배유안 작가는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적 사실 앞에서 자연스럽게 가졌던 이 의문에 대해 이야기로 답한 것이다.

난이는 장운이가 석공일을 배우러 한양으로 갈 때 종이책을 만들어 준다. 한양 가면 쓸 게 많을 것 같아서 만들어 주는 거란다. 쓰기의 효용을 깨달은 사람의 행동이다. 그리고, 혹시 배탈이 나거나 다쳤을 때 쓰는 약과 함께 약초 쓰는 법을 종이에 적어서 준다. 글이 미래의 위험도 대비하게 하는 셈이다. 난이는 이제 꿈도 생겼다. 약재 공부를 해서 의원이 되는 꿈이다. 글이 삶도 바꾸어 놓았다.

이야기 속에 그려진 한글이 퍼져나가는 과정은 이렇게 정겹다. 글이 사람을 잇고, 글이 꿈도 만들어 준다. 글이 결국 모두의 삶을 풍요롭게 한 것이다. '훈민정음'의 최초 목적이 이루어지는 이야기다.

역사 동화의 매력

"이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세종 대왕의 일화에서 건져낸 역사적 상상력이 하층민의 삶으로 파고들어 한글 창제의 참된 뜻을 일과 생활 속에 새겨 넣은 점이다. 한글이 백성에게 얼마나 이로운지 전하는 상식적인 주제 같지만, 그것이 장인과 중인, 나아가 양반층 여성까지 포함하는 조선 시대 하위자의 삶과 결부되어 있어 정치사회학적 의미까지 들어 올린다. 역사 의식과 이야기의 재미가 함께 어우러진 역작이다."

제10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원고 공모 수상작인 <초정리 편지>에 관한 심사평(윤태규·원종찬)이다. 창작 동화에서 우리가 바라고 기대하는 것은 소재의 참신함이다. 여태껏 다루지 않은 이야기를 다루거나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 독특할 때 이야기는 매력을 내뿜는다.

반면에 역사 동화의 매력은 소재의 신선함이 아니라 접근 방식의 신선함에 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 생생한 공간에서 실존 인물과 가상의 인물이 만나는 모습을 보며 현실과 판타지 사이를 오가는 듯한 짜릿함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배유안 작가의 다른 작품 <뺑덕>은 고전 심청전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뺑덕어멈'의 아들 '뺑덕'을 주인공으로 뽑아낸다. 덕분에 심청전의 주제인 '효의 가치'는 또다른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 된다. 작가의 작품 중 조선 시대 실존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는 <구멍 난 벼루>는 등장인물들의 관계에 주목하여 스토리를 엮어가는 접근 방식으로 삶의 열정과 소통의 소중함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독자에게도 충분히 가치 있는 다양한 방식의 삶을 수면 위로 살며시 들어 올린 것이다.

<초정리 편지>는 누구도 그 존재감을 부인할 수 없는 굵직한 역사적 인물인 세종 대왕을 이야기 속에 끌어들였지만,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슬그머니 등장했다가 빠져나가고 다시 슬그머니 등장했다가 어느새 퇴장한다. 이처럼 세종이 주인공 장운이의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구성은 책을 읽는 아이와 어른들 모두에게 위로를 선물한다.

아이는 어른들만큼 중요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되고 어른은 평범한 삶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세종으로부터 위로를 얻는다. 의로운 리더가 부재한 세상, 서번트 리더십(타인을 위한 봉사에 초점을 두고 자신보다 구성원들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리더십 - 출처 두산백과)이 필요한 현실에서 세종은 진정한 리더의 태도마저 알려 주는 괜찮은 조연이다.

어느 날 문득, 메마르고 차갑기만 한 세상에 온기를 느끼고 싶을 때 나는 어린이책을 읽는다. 특히 역사 동화를 읽는다. 거기엔 어른보다 더 씩씩한 아이들이 있고, 삭막한 현대 사회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좋은 어른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