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들의 유언을 통해 삶의 지혜와 통찰을 배워보고자 한다. 의로운, 이상적인, 유유자적한, 때론 청빈한 선비들의 유언은 유언에 그치지 않고, 후대 사람들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침과 삶의 방향을 잡아주는 나침반이 되기도 한다.[기자말] |
"모진 고문으로 내 몸은 말이 아니었다. 그놈들이 달아매고 때릴 때는 박태보가 불에 달군 쇠로 몸을 지지는 형벌을 당하면서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너라"고 하던 구절을 외웠다."
백범 김구가 쓴 <백범일지>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청년 시절 서대문감옥에 갇혔던 김구는 조선 숙종 때의 의인(義人) 박태보에게 '빙의'라도 된 듯, 여덟 번의 가혹한 고문을 견디고 참아냈다.
김구가 그렇게 존중했던 박태보(朴泰輔)는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인 조선 후기 실학자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의 아들이다.
강직한 부자, 박세당과 박태보
서인의 소론계 영수 중 한 명이었으며 '사문난적'(斯文亂賊: 주자 해석에 벗어난 학설을 펼치는 사람에 대한 멸칭)으로까지 몰렸던 박세당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개인사로, 가족사로 보여준 조선의 대표적인 비판적 지식인이었다.
그의 아들 박태보는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유배를 가던 도중 노량진에서 사망했다. 선비 80여 명을 대표해서 직언(直言)으로 항거하는 상소문을 올려 임금을 능멸했다는 죄로 숙종이 그를 친국했다.
그 과정에서 박태보는 불에 달군 쇠로 몸을 지지는 형벌인 낙형(烙刑)에다 사금파리 더미 위에 꿇어앉힌 뒤 무릎을 바위로 짓이기는 압슬(壓膝)형까지 당했다. 박태보의 죽음을 기록한 숙종실록의 졸기(卒記)에는 "고문이 참혹하여 몸이 모두 문드러졌으나, 정신은 끝내 흐트러지지 아니하였다"고 나와 있다.
안진경체(당나라 명필 안진경의 서체)의 대가였던 첫째 아들 박태유가 죽고 나서 3년 뒤 둘째 아들 박태보마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 박세당은 극도의 정신적 공황 상태를 겪게 된다.
박세당이 벼슬을 버리고 양주 석천동(石泉洞, 지금의 의정부 장암동) 수락산 계곡 자락 아래에 기거하던 61세 때의 일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펴낸 <박세당의 서계유묵>이라는 책은 태유·태보 형제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비록 이들 형제는 정쟁에 휘말려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했지만 '안진경체'를 유행시킴으로써 한국 서예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당시 조선은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태유·태보 형제는 이러한 서풍을 일신시키는데 기여하였다."
박태보의 의로운 죽음은 박세당 집안과 대척점에 서 있던 '노론계 거두' 송시열의 마음까지 움직였다. 제주에서 유배 중이던 송시열은 박태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자손들에게 '박태보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경계했다. (숙종실록)
박태보 사망 6년 만인 1695년(숙종 21) 노량진에 사당이 세워졌고, 그 6년 뒤인 1701년(숙종 27)에는 숙종이 '노강(鷺江)'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여 사액서원이 들어섰다. 그를 죽인 숙종마저 그의 충절을 기린 것이다. 노강서원은 노량진에서 옮겨와 수락산 자락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필자가 수락산 산행을 마치고 의정부 장암 방향의 석림사로 하산한 건 지난해 12월의 일이다. 석림사로 향한 건 인근에 있는 반남(潘南) 박씨 박세당 고택(사랑채)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박세당 고택은 사전 예약을 해야 방문이 가능하다. 산행 전에 미리 연락을 해뒀다.
고택 입구에서 전화를 하니 70대 중반의 종부 김인순씨가 마중을 나왔다. 고택에 들어서면 서계 선생이 손수 심었다는 수령(樹齡) 450년 된 은행나무의 위용에 짐짓 놀라게 된다.
종부에 따르면, 고택 일대는 박세당의 아버지 박정(朴炡)이 인조반정에 참여해 공신에 책훈되면서 조정으로부터 받은 사패지다. 종부는 그런 박정과 아들 박세당의 초상화가 있는 영진각의 명인당을 개방해 주었다. 문중에서 보관하던 실제 초상화와 박세당에 대한 대부분의 자료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증했다고 한다.
날씨가 꽤 추운 날임에도 종부께서는 고택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의 묘소(박세당과 아들 박태보의 묘소)까지 직접 안내해 주었다. 박세당의 묘에 절을 올리는 동안 종부는 멀찌감치 떨어져 필자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박세당 묘에서 고택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아들 박태보와 박세당의 셋째 형 박세후의 묘가 나온다. 박태보의 묘에도 들러 예를 표했다.
박태보는 아들이 없는 박세후의 양자로 들어갔다. 박세후의 부인은 그 유명한 선비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동생이다. 그러니 박태보에게 윤증은 외삼촌이 된다.
박세당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로 시작하는 시조를 지은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과는 처남매부 사이였다. 박태보에겐 남구만도 외삼촌이다. 생부(박세당)와 양부(박세후)를 통해 당대의 거목들인 윤증과 남구만을 외삼촌으로 두게 된 것이다.
서계 박세당의 유언
묘소에서 고택으로 다시 내려오면서 종부에게 서계 선생이 남긴 대표적인 유언을 좀 일러달라고 부탁했다.
"계자손문(戒子孫文)에서 '늘 근신하고 천 사람 뒤에 종적을 감춰라'는 당부의 말을 하셨어요."
박세당은 병이 심해지던 68세 무렵에 자손들에게 유계(遺戒)를 내렸는데, 그게 계자손문(戒子孫文)이다. 필자는 박세당과 관련된 여러 책을 찾아보다가 '천 사람 뒤에 종적을 감춰라'는 말이 단순히 '나서지 말라'는 의미를 넘어 깊은 뜻이 숨어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의미를 하나하나 풀어 가보자.
먼저 한국고전번역원이 펴낸 <국역 서계집>(1~22권). 박세당이 아들 박태보에게 보낸 여러 편지가 실려있는데, 자주 나오는 문장을 추출하면 다음과 같다.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절대 근신하고 침묵해야 한다. 조급하지 말고, 경솔하지 말고, 진실로 말을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된다.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급하게 나아가서는 안 된다. 깊숙이 묻어두고 드러내지 않는 점이 있어야 멀리까지 이를 수 있다. 모든 일에 몹시 신중하고 신중하거라. 경계하고 경계하거라."
너무 잘나고 똑똑한 아들을 염려하는 아비의 심정이 읽힌다. 박세당은 그런 아들에게 "늘 너의 형(박태유)에게 먼저 상의하면 탈이 없을 것"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들에게 "부디 지조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박세당은 '태보에게 보이다'라는 시의 일부에서는 이렇게 당부했다.
한 걸음 갈 적에 한 걸음 천천히 감을 잊지 마라(一步無忘一步遲)
더디 감은 안온하고 빨리 감은 위태로운 법(遲行安穩疾行危)
<국역 서계집>(제2권, 강여진 옮김)
명나라 학자 홍자성이 지은 <채근담>에서도 박세당 유언('천 사람 뒤에 종적을 감춰라')의 진의를 엿볼 수 있다.
"(군자 또는 선비는) 지조와 처신을 바꾸어서는 안되고(固不可少變其操履), 그렇다고 결기와 모서리를 지나치게 드러내서도 안된다(亦不可太露其鋒芒)."
요약하면 지조를 지키되 결기를 드러내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에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의 晦箴(회잠)이라는 글을 읽어보면 '천 사람 뒤에 종적을 감춰라'는 의미는 더 분명해진다.
"말을 황금같이 아끼고(惜言如金), 자취를 옥처럼 감춰라(鞱跡如玉). 깊이 침묵하고 침잠하여(淵默沉靜), 꾸밈이나 거짓과는 접촉하지 마라(矯詐莫觸). 빛을 거둬 속에 감췄다가(斂華于衷), 오래 묵힌 뒤 밖으로 빛내라(久而外燭)."
- <채근담, 안대회 평역, 민음사>
이처럼 박세당의 유언은 천 갈래, 만 갈래의 의미를 담고 있다. 종부는 필자에게 또 박세당의 유언으로 "장례를 지낸 후에는 상식(上食: 아침과 저녁으로 올리는 음식)을 올리지 말라"는 말도 일러줬다. 이는 조선 성리학의 표준 에론(禮論)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었다. <국역 서계집>(제22권, 최병준 외 옮김)에는 박세당의 말이 이렇게 적혀 있다.
"사람이 죽었는데 3년 동안 상식(上食) 하는 것은 예가 아니다(...) 너희들은 비록 이 때문에 뭇사람들에게 죄를 얻더라도 경솔하게 내 훈계를 저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박세당이 죽은 뒤 집안에서는 그 유훈에 따라 졸곡(卒哭) 이후로 상식을 그만두고 오직 초하루와 보름에만 제사상 음식을 마련했다. 그런데 유훈을 따르다가 후손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실록엔 "박세당의 셋째 아들 박태한이 3년 동안 상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갇히게 되었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사문난적으로 몰린 박세당
농업에 대한 책 <색경(穡經)>을 짓기도 했던 박세당의 사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변록(思辨錄)> 시리즈다. 사변록이란 명칭은 <중용>의 "신사지(愼思之) 명변지(明辨之)"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신중히 생각하고 분명하게 변별한다"는 의미다.
육경을 주해한 이 책은 14년에 걸쳐 쓰여졌는데, 주자의 해석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여러 다른 견해를 종합하여 박세당 자신만의 독창적인 해석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주자학만을 맹신하던 당대의 학문적 풍토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던 것이다(한양대 정민 교수의 해석).
그런데 이 책은 화근이 되고 말았다. 박세당은 백헌(白軒) 이경석의 신도비문을 지으면서 이경석을 봉황에, 송시열을 올빼미에 비유했다. 이게 빌미가 되어 앞서 지은 <사변록>까지 소환되면서 사문난적으로 몰렸고, 결국엔 죽음을 재촉하고 말았다안타까운 73세의 인생 행로였다. 강직한 부자(父子),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었다.
고택을 나와 계곡을 따라 다시 걸었다. 수락산 서쪽 계곡이라는 박세당의 아호 '서계(西溪)'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박세당은 이곳에서 제자들을 길러내며 학문하는 자세에 대해 이렇게 가르침을 주었다.
학문이란 물 모으듯 쌓아야 함을 알아야 하니(蓄學須知如蓄水)
방울방울 끊임없이 모아야 큰물을 얻는다오(涓涓不息得泓渟)
<국역 서계집>(제2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