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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곡도서관은 부천역 남부(심곡본동 555-76)에 위치하고 있으며, 1985년 3월 25일 부천시 최초로 역사를 주제로 개관한 전문도서관이다. 지하1층과 지상4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공간이 넓고 역사를 중심으로 다양한 책들을 갖추고 있어 많은 시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심곡도서관의 모습 2024년 1월 17일 이른 새벽에 촬영한 심곡도서관의 모습, 원기둥의 본건물과 원뿔모양의 탑이 특징적이다.
심곡도서관의 모습2024년 1월 17일 이른 새벽에 촬영한 심곡도서관의 모습, 원기둥의 본건물과 원뿔모양의 탑이 특징적이다. ⓒ 박종선

심곡도서관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올라가는 길이 약간 가팔라 더운 여름에는 이용하기가 다소 힘들지만 부천 시민들의 생활의 중심인 부천역에서 가깝고, 산 중턱에 위치하여 도서관에서 부천역 남부지역을 바라보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심곡도서관을 중심으로 바라본 부천의 지도 심곡도서관은 부천의 남쪽에 위치한 대산(성주산)의 산줄기가 거의 끝나는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다음지도 이용)
심곡도서관을 중심으로 바라본 부천의 지도심곡도서관은 부천의 남쪽에 위치한 대산(성주산)의 산줄기가 거의 끝나는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다음지도 이용) ⓒ 박종선

그렇다면 왜 심곡도서관은 산 중턱에 위치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바로 대일항쟁기(일제강점기)에 소사신사가 위치했던 곳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해방이 된 후 소사신사는 부천시민들에 의해 바로 불태워졌고, 그 자리에 육각정이 위치하고 있다가 1985년 도서관이 개관한 것이다. 이곳의 역사를 알려주는 유적 또는 안내판이 없어 알기가 쉽지 않은 여건이기에 심곡도서관을 연결고리로 하여 소사신사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고자한다.

소사신사의 설립

소사신사는 1917년 12월 10일에 만들어졌다. 일제는 1910년 강제병합 한 이후 식민지배와 수탈을 원활하게하기 위해 대대적인 사업을 단행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이다. 이로인해 소사역(현 부천역) 남부에는 1917년 중리(中里)에 있었던 계남면사무소가 이전해왔으며, 1913년에는 조선으로 넘어온 일본인들의 자녀를 위해 소사공립심상소학교(素砂公立尋常小學校)가 만들어졌다.

1911년에는 경제자본을 잠식하기 위해 소사금융조합(素砂金融組合)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과정 중에 소사신사도 설립된 것이다. 즉, 계남면사무소의 면장과 구장 등의 인적체계를 통해 조선인들을 통치하였으며, 소사금융조합을 통해 경제를 잠식하였고, 소사신사를 통해 민족정신을 말살하려고 하였다.

소사신사에서 진행된 사업
소사신사에서는 셀 수 없을만큼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었다. 이를 시대순으로 살펴보아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어떠한 행위를 했는지 확인하고자한다.

첫번째, 1920년대
조선총독부는 산미증식계획을 세워 우리나라 쌀을 수탈하였다. 이로인해 소사역 남부에는 부평수리조합이 만들어졌다. 부평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을 소사역과 경인철도를 이용하여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한 것으로, 1923년 6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925년 3월에 완공되었다. 하지만 홍수로 인해 여러번의 보수공사가 진행되는데, 이럴때마다 고위직 간부들이 와서 소사신사를 참배하였다.

1926년 10월 10일에 제등총독이 참석한 후 소사신사를 참배하였고, 1929년 7월에는 아옥총감(兒玉總監)이 소사신사를 참배하였다.
아옥총감(兒玉總監)의 부평수리조합 보수공사 준공식 참석 부평수리조합 보강공사 준공식 1929년 7월 12일 오후 1시반 소사공립보통학교에서 열린 후 아옥총감은 소사신사를 참배하였다. (1929년 7월 13일 경성일보)
아옥총감(兒玉總監)의 부평수리조합 보수공사 준공식 참석부평수리조합 보강공사 준공식 1929년 7월 12일 오후 1시반 소사공립보통학교에서 열린 후 아옥총감은 소사신사를 참배하였다. (1929년 7월 13일 경성일보) ⓒ 박종선

두번째, 1930~40년대
1930년대 일제의 침략전쟁이 본격화 되면서 소사신사에서 이루어진 행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그 유형을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침략전쟁의 정당성 홍보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면 본격적으로 침략전쟁을 진행하게된다. 이로인해 국제 정세 뿐만아니라 국내 정세도 많이 바뀌게되는데, 민심 이반과 전쟁에 대한 공포를 줄이기 위해 소사신사에서 대대적인 전첩봉고제(戰捷奉告祭)를 진행하였다. 1937년 10월에는 상해침략 승리, 동년 12월에는 남경침략 승리, 1938년 10월에는 한구(漢口) 침략 승리 봉고제를 진행하였다.
남경함락을 홍보하는 1937년 12월 15일의 조선신문(朝鮮新聞) 남경함락을 축하하는 전국적인 행사를 소개하고 있다. 부천군 소사(素砂)에서 12월 12일 소사면 주최로 행사가 진행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남경함락을 홍보하는 1937년 12월 15일의 조선신문(朝鮮新聞)남경함락을 축하하는 전국적인 행사를 소개하고 있다. 부천군 소사(素砂)에서 12월 12일 소사면 주최로 행사가 진행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 박종선

② 각종 친일단체의 결성식 및 행사 진행
일제는 조선인들을 전쟁에 이용할 수 있도록 각종 단체를 만들어 정신교육을 시켰으며, 실제로 전쟁에 강제로 끌고갔었다. 대표적인 단체가 바로 청년단(靑年團) 결성이다. 소사에는 남과 북의 두 청년단이 있었는데, 1938년 7월 21일 소사신사에서 양(兩) 청년단의 연합결성식이 진행되었다. 이외에도 소사면방공본부, 국민정신총동원부천연맹, 부천군사후원연맹 등 다양한 단체의 행사가 진행되었다.

③ 지원병후원회
가장 아픈 역사 중 하나가 바로 군인으로 끌려가는 것이다. 일제는 '지원병(志願兵)'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강제로 가야만 했다. 일제는 일본인 중심으로 군대를 운용하다가 1930년말 침략전쟁 범위가 많아짐에 따라 조선인들을 강제로 끌고갔다. 1938년 2월 22일 육군 특별 지원병령을 공포하였고, 한 달 후인 4월 3일부터 시행하였다. 일제는 지원병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여기에 참여한 지역 유지들은 강연회, 좌담회, 인쇄물 간행 등을 통해 지원병을 모았다. 이렇게 모인 지원병들은 소사신사에서 최종적으로 참배하고 전쟁터로 끌려갔다.

지원병응모자가 부천군에서 10명이라는 기사 장영한부천군수와 인천경찰서장이 소사북소학교에 출장하여 10명의 지원병을 받았다는 1939년 1월 29일의 매일신보 기사
지원병응모자가 부천군에서 10명이라는 기사장영한부천군수와 인천경찰서장이 소사북소학교에 출장하여 10명의 지원병을 받았다는 1939년 1월 29일의 매일신보 기사 ⓒ 박종선

제8대 부천군수였던 장영한은 인천경찰서장과 함께 소사북소학교로 가서 청년단원 50여 명을 소집하고 그 자리에서 10명의 지원자를 받았으며(1939년 1월 29일 매일신보), 1940년에는 부천군 대부면 이승업(李承業), 소래면 안병희(安炳熙), 오정면 박승순(朴承順) 세 명이 지원병으로 끌려갔다(1940년 12월 15일 조선신문).

이렇듯 심곡도서관에는 우리가 모르는 가슴 아픈 역사가 많이 남아있다. 다시는 이 땅에 어두운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과거의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콩나물신문에도 실립니다.


#부천시립심곡도서관#심곡도서관#소사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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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의 항일독립운동을 기념하고 일제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역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약사로서 한약 처방, 야생화, 한약재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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