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부터 주 1회 어르신들과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싣습니다.[기자말] |
나는 복지관에서 '내 인생 풀면 책 한 권'이라는 이름으로 어르신들과 글쓰기 수업을 한다. 주 1회 수업이 끝날 때마다 나는 어르신들에게 일주일 동안 생각할 소재를 숙제로 드린다.
그날의 숙제는 '나만의 인간관계 방법'이었다. 막내딸 뻘인 제가 배울 수 있게 그동안 쌓인 인간관계의 지혜를 나눠 주시라고 말하면, 다들 자신 있는 표정이 되기에 숙제를 드리는 나도 부담이 없다.
나만의 인간관계 방법이 있다면?
여든이 넘은 어떤 어르신은 무슨 글이든 세 줄 넘어가면 지루하다고, 뭘 써도 세 줄만 쓰시는 분이었다. 그분이 종이 한 장을 쓱 내미신다. 눈에 익은 달력 종이다. 여든 언저리 어르신들은 종종 달력 종이에 쓰신다.
"같이 차를 마신다. 그랬니?라며 잘 들어준다. 속말을 하지 않는다."
세 줄도 아니고 한 줄로 끝나버린 숙제다. 나는 소리 내어 이 숙제를 읽었다. 읽자마자 다들 맞장구를 치신다. 마지막 한 문장의 온도 차이가 커서 왜 이렇게 쓰셨냐고 물어봤다.
"속말을 하면 나중에 시끄러워져요. 차 마시면서 그랬구나, 그랬니?라고 하는 건 누구에게나 해도 좋고요."
아나운서 한석준의 책 <대화의 기술>에서 첫 번째로 강조하는 기술은 경청이다. 그의 책을 여든 넘은 어르신이 "그랬구나, 그랬니?"라는 생활어로 정리해준다.
다른 어르신이 시끄럽지 않으려면 정확한 숫자를 말하지 않으면 된다고 한다. 상대방이 구체적인 액수를 물어볼 때 '그냥 벌 만큼 벌'라고 눙쳐야지 푼수처럼(어르신이 '푼수'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정확한 숫자를 떠벌리는 것처럼 위험한 게 없단다.
자랑은 은근히 눙치고 얼른 입을 닫는 게 가장 지혜로운 모습이다. 자랑으로 쌓는 인간관계는 금방 허물어지니 자랑하고 싶으면 차라리 돈을 쓰라고 하신다.
정지우 작가의 신작 <사람을 남기는 사람>에서는 사람은 자신의 핵심을 인정해주는 관계로 인해 강해진다고 한다. 진짜 나인 것, 내가 진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인정받을 때 나 자신이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자랑은 아니지만 진짜 내가 가치를 부여하는 게 뭐가 있으시냐고 물어봤다.
다양한 대답이 나온다. 숫자를 눙치라는 그분은 남편과 서로 존중하는 관계를 1번으로 꼽으셨다. '삼식이'(하루 세 끼 집에서 밥 먹는 남편을 낮춰 부르는 말) 같은 말이 그래서 싫으시단다. 자식들 다 떠나면 둘만 남는데 삼식이라는 말은 그 관계를 스스로 망치는 길이라고 주장하신다.
삼식이를 다들 부정적인 말로만 쓰는 터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그분이 새삼 따뜻하게 느껴졌다. 삼식이를 들으니 우리집에서 밥을 자주 먹었던 아들 친구가 떠올랐다.
초등학생 아들도, 아들의 친구도 한참 크는 아이들이라 우리 집에 올 때마다 나는 식사에 버금가는 간식을 차려내곤 했다. 어느 날 내 아이는 그 친구가 자기 뒷담화 한 걸 알게 됐다며 집에 와서 울었다. 내가 그 아이 김치 볶음밥 몇 판을 했는데 그러나 싶어서 나도 화가 났다.
두어 달 후, 아이는 밝은 얼굴로 그 친구를 또 집에 데려왔다. 나는 성의 없는 간식상을 차려주고 방으로 들어왔다. 표정 관리 할 자신이 없어서다. 나중에 아들에게 물어봤더니 '그냥'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들이 그러는 게 호구 같아서 더 싫었다고, 아이 친구와의 인간 관계가 어려울 줄은 몰랐다고 나는 어르신들에게 투정 부리듯 말했다. 어르신들은 아이 일이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면서 거기서 화 안 낸 것만으로도 잘했다고 칭찬하셨다. 좀 부끄러워지려는 찰나, 달력 어르신이 말을 보태신다.
"애들이라 그랬구나, 그래도 자기들끼리 회복됐으니 다행이다, 그렇게 넘어가요. 애 더 크면 더 별일 생기는데 그럴 때마다 화나면 우리 고운 선생님만 더 늙어."
오래된 도자기 같은 어르신들의 조언
마지막 말에 다들 웃음이 터졌다. 그 웃음이 혼자 속앓이했던 나를 다독이는 것 같았다. 차를 나누며 "그랬구나, 그랬니?"로 마음을 덥히고 자랑 대신 입을 다물어 관계의 평화를 지키라는 그 지혜들이 마치 오래된 나무가 잎을 떨구며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모습처럼 담담하고 아름다웠다.
인간관계는 거대한 나비효과 같다. 한 마디의 말, 한 순간의 표정이 상대방의 마음에 닿아 예측하지 못한 결말을 가져온다. 어르신들이 들려준 이야기 속에는 작은 날갯짓 같은 선택들이 있었다. 그 날갯짓들이 바람이 되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것이다.
어르신들의 조언은 오래된 도자기 같다. 세월이 만든 균열과 자국들은 흠이 아니라 그릇의 진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증거였다. 인간관계의 비밀은 아마도 그런 도자기처럼 연약해 보이지만 강인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 아닐까.
관계를 어렵게만 생각했던 나는 어쩌면 지나치게 완벽한 원을 그리려 했는지도 모른다. 아이 친구가 그 원을 삐뚤게 만들어서 싫어했나 보다. 그런 내게 어르신들은 꼭 완벽한 원이 아니어도 된다고, 그저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천천히 곡선을 그려가면 된다고 하신다.
글쓰기 수업은 어르신들만 배우는 시간이 아니다. 나는 매주 그분들로부터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우리 삶에 필요한 가장 소중한 교과서는 바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SNS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