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5.01.08 09:46최종 업데이트 25.01.08 09:46

서울의 봄

집에 머물면서 컴퓨터를 켜지 않는 날은 하루도 없지만, 어제는 종일 켜지 않고 책을 읽었습니다. 책 좀 읽다가 베란다에 서서 풍경을 보고, 다시 책 좀 읽다가 괜히 주방을 어슬렁거려도 보고, 또 책 좀 읽다가 폰을 켜서 유튜브 실시간 중계를 지켜보다 다시 책 좀 읽다가 그렇게 잠에 들었습니다.

매년 12월과 1월은 문청들에겐 축제와 같은 신춘문예 시즌이고, 새해면 당선작을 읽는 기쁨이 무엇보다 컸는데 2025 신춘문예는 접수 무렵부터 당선자 발표가 난 지금까지도 온전히 축제를 즐기기엔 어수선한 시국입니다. 그 모든 게 내란의 시발점인 비상계엄의 여파였고, 지금도 내란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본문을 다하는 게 중요하다 배웠기에 저는 오늘도 여전히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지만, 글쎄요. 어제는 잠자리에 누워서도 '키세스 시위대'라고 불리는 사진 속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더군요. 키세스는 은박으로 포장된 원뿔 모양의 초콜릿인데 은박담요를 뒤집어쓴 시위대의 모습이 그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윤석열 체포 촉구 시위 5일 눈보라가 휘날리는 추위에도 윤석열 체포 구속을 촉구하며 밤샘 농성을 한 시민들이다.
윤석열 체포 촉구 시위5일 눈보라가 휘날리는 추위에도 윤석열 체포 구속을 촉구하며 밤샘 농성을 한 시민들이다. ⓒ 윤석열퇴진비상행동

좌파, 우파, 진보, 보수, 극우 등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지겹도록 이 같은 말을 들어왔고, 앞으로도 수없이 들을 테지만, 누구도 자신의 삶이 타인의 극단적인 행동으로 전복되길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2030이라 불리는 젊은 세대들은 독재라는 이름을 역사책에서나 읽었을 뿐, 독재정권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체감하지 못할 겁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가장 먼저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AD
그들은 영화 <서울의 봄>을 통하여 그날의 봄이 얼마나 장밋빛 꿈이었는지 여실히 알았을 겁니다. 실제로 당시 신문 기사를 찾아보면 온통 꿈에 부풀었다죠.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김영삼, 김종필을 비롯해 모든 이들이 민주화의 시작이라며 서울의 봄을 노래할 때 김대중만이 지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두렵다고 했더군요. 결국 그의 예감대로 김대중은 사형선고, 김영삼은 가택연금, 김종필은 재산몰수... 그리고 5.18.

정치관과 종교관은 저마다 다르기에 옳고 그름으로 나눌 수야 없겠지만,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면 법치주의는 상식 중의 상식입니다. 그러니 정치적 성향을 따지기에 앞서 그 밤의 계엄은 내란이 분명하기에 윤석열은 법적인 책임을 피하지 않겠다는 본인의 말을 지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초지일관 헌법과 법률을 무시하는 태도도 그렇거니와 헌법 위에 경호법이 있다는 듯이 행동하는 경호처장을 보면서 그들이 원한 건 '그들만의 봄'이었겠다 싶더군요.

문청 중에는 정치라면 지긋지긋해서 귀를 막는 이도 있을 테고, 누구보다 가슴이 뛰는 이도 있을 테고, 저처럼 한 줄 글이지만 뭐라도 적어야 속이 풀리는 이도 있을 겁니다. 또한 유명인의 SNS로 몰려가 이럴 때 한마디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닦달하는 팬들도 있고, 반면에 침묵할 자유도 있는 거라고 옹호하는 팬들도 있죠.

다 좋습니다. 그런데요. 귀를 막는 것도 자유고, 침묵하는 것도 자유지만, 그 같은 자유조차 민주주의여서 가능하다는 걸 알고는 있는지 묻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한 가지 생각만으로만 굴러갈까요. 탄핵 찬성이 있으면 탄핵 반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 우려스러운 건, 입틀막도 억울한데 스스로 입을 닫고 침묵하는 겁니다.

김수영 시인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고요.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안다고요.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지,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김대중 육성 회고록> 709페이지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나는 후배 정치인들에게 두 가지 내용을 당부하고자 합니다. 첫째, 정치인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함께 가져야 합니다. 둘 중 하나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정치하는 데에는 원칙과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좌표를 잃고 권력만 추구하는 정치인이 됩니다. 무엇보다 원칙과 철학이 중요합니다. 동시에 정치는 실질적인 결과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을 이뤄내기 위한 현실적인 수단과 전략적 사고를 갖춰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개혁과 진보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를 이어가는 데에 어려움이 발생합니다. 내가 정치인은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문득 작가에게 대입해봤습니다.

"나는 작가들에게 두 가지 내용을 당부하고자 합니다. 첫째, 작가는 '작가적 문제의식'과 '경제적 현실감각'을 함께 가져야 합니다. 둘 중 하나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글을 쓰는 데에는 원칙과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좌표를 잃고 작가적 명성만 추구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원칙과 철학이 중요합니다. 동시에 작가는 실질적 삶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을 뒷받침할 현실적 수단과 전략적 사고를 갖춰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글을 꾸준히 써나가는 데에 경제적 어려움이 발생합니다. 내가 작가는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여야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어떠한 경우에라도 헌법과 법률은 지켜져야 합니다. 법이 만 명에게만 평등해서는 안 됩니다. 윤석열 관저로 몰려간 국민의힘 의원들은 헌법과 법률을 무시한 윤석열을 보호할 게 아니라 당당하게 나와 법적인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는 게 국회의원의 자세일 겁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인 2024년 12일 7일,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작가 한강은 수상자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그리고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이 두 질문 사이의 긴장과 내적 투쟁이 글쓰기의 오랜 동력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1980년 광주가 이런 고민을 더 치열하게 만들었다면서, 자신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쓰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죠. 이러한 글쓰기를 통해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 사실은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더군요.

그녀의 말을 전해 들어서였을까요. 비상계엄이 해제된 날의 기사와 탄핵을 외치는 영상에는 인상적인 댓글이 달렸는데 그중 몇 가지를 메모해둔 게 있어 옮겨봅니다.

'1980년 오월이 2024년 12월의 대한민국을 살렸다.'
'광주 시민분들... 그때 정말 외로웠겠다 ㅠㅠ'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빛을 가지고 나왔다.'
'외국에선 시위현장 주변 상점은 폭망하는데, 대한민국 시위현장 주변 상점은 대박난다.'
'결국 국민의 힘이 국민의 힘을 이겼습니다.'
'계엄 방송을 보자마자 여의도 국회로 뛰쳐나와 군인들을 막은 시민분들 정말 고맙습니다. 그분들 아니었으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군인이 국회 창문은 깼지만 화분을 옆으로 치우는 거 보셨죠? 정말 따뜻한 장면이에요.'
'카페 선결제가 지금의 모습이라면 광주 5.18 때 주먹밥과 물을 나누어주면서 했던 공동체의 모습이 처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번 계엄으로 다시 한번 광주시민들의 저항의식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들은 외롭게 자유를 지켰더라구요.'
'간디가 울고가것다.'
'대한민국 사람은 평소에 서로 욕하고 치고 박고 싸우고 하더라도 나라가 위기일 때 뭉치는 건 세계 1등이다 어느 나라 부럽지 않는 대한민국 국민이 자랑스럽고 가슴이 뜨겁다. 자유민주주의 영원하라.'

마지막 댓글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글자가 유독 크게 보이는 이유는 그간 빼앗긴 들에 봄이 오기까지 수많은 죽은 자가 있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부디 2025년 서울의 봄은 그 어떤 계절보다 맑고 화창하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학 카페와 문학 밴드에도 실립니다.개인적으로 가입한 문학 카페와 밴드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올립니다.


#서울의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최형만 (ra68673) 내방

글쓰기를 좋아해서 꾸준히 쓰는 사람입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또 당했습니다, 제목 낚시

독자의견0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