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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청에서 24년간 근무했습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소설 쓰는 글쟁이가 되었습니다. 최근 작품으로 청소년 소설 <남극 펭귄 생포 작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침밥은 굶더라도 일기예보는 챙깁니다. 밥보다 중요한 날씨 이야기를 24년간 축적한 지식을 바탕으로 중·고등학교 교과서와 연계하여 최대한 재밌고 쉽게 풀어보았습니다.[기자말]

노을 소나무 숲 사이로 태양이 떨어지면서 퍼진 노을
노을소나무 숲 사이로 태양이 떨어지면서 퍼진 노을 ⓒ 허관

내 고향은 충남 서해안이다. 그곳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20여 년 살았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30여 년 떠돌이 생활하다가 다시 고향의 품으로 돌아와 6년 넘게 살고 있다. 30여 년 전 사람들은 늙고 죽었지만, 산과 하늘은 그대로다. 특히 짙은 저녁노을은 여전히 나의 머나먼 기억을 끄집어냈다.

지구에서 저녁노을이 가장 짙게 물드는 곳이 내 고향이다. 해가 기울면 햇빛이 아시아의 광활한 대륙을 가로질러 오면서 사라질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붉은색만 남기 때문이다.

특히 늦가을이나 겨울 저녁노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짙다. 흰색과 검은색은 관념의 색이며, 붉은색은 실존의 색이다. 당연히 기억은 붉은색에 잘 스며든다. 짙은 노을에 물든 텅 빈 들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오랫동안 심연에 잠자던 기억들도 쭈뼛거리며 깨어나는 이유다. 이런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노을만 보면 이따금 엄마의 뱃속 기억까지 생각나는 듯했다.

하지만, 노을 속에서 밀려온 기억의 대부분은 기쁨보다 슬픔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할머니의 죽음, 친구와의 헤어짐, 키우던 강아지의 죽음, 멀리 떠난 외삼촌의 기억처럼 말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할머니는 오래되어 닳아빠진 돌들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던지셨는데, 이제 노을빛은 탑 꼭대기만을 비추고 있었고, 이 빛이 비추는 지대 안 돌들은 갑자기 빛을 받아 부드러워지면서, 마치 한 옥타브 높은 '두성'으로 이어지는 노래처럼 단숨에 아득히 높고 먼 곳으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서산마루를 가득 채우며 노을은 붉게 번졌고, 수백 마리의 갈가마귀떼가 어지럽게 원을 그리며 노을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대장간의 불에 달군 시우쇠처럼 붉게 피어난 노을을 보자 엄마를 만나 가슴 뛰던 기쁨도 어느덧 사그라지고, 나는 그만 노을에 몸을 던져 한줌 재로 사위어 버리고 싶을 만큼 못견디게 울적했다. 죽고 싶었다. 죽음이 두렵기는커녕 죽는 순간이 지극히 평안할 것만 같았다. 나는 타박타박 걸으며 혼잣말로 외쳐 보았다.' - 김원일 <노을> 중에서

동양인이건 서양인이건 노을을 보면 깊은 그리움에 빠져들었다. 그리움이 너무 깊어 슬픔이 되기도 절망이 되기도 하면서. 슬픔과 절망의 노을에 나를 비롯한 작가들은 왜 그리 심취했을까.

머나먼 여정에서 살아남은 노을

햇빛에는 다양한 파장이 있다. 우리가 흔하게 접하는 자외선, 가시광선, 적외선도 파장이다. 이러한 파장 중에 인간이 볼 수 있는 파장을 가시광선이라고 한다.

가시광선 전자기 파장 중에 눈으로 볼 수 있는 영역
가시광선전자기 파장 중에 눈으로 볼 수 있는 영역 ⓒ 기상청

위 그림에서처럼 인간이 볼 수 있는 파장은 극히 일부분이다. 코끼리의 꼬리를 만지작거리는 장님처럼, 인간은 우주 만물의 대부분을 보지 못한다. 진리가 어쩌고저쩌고하는 인간을 한 번쯤 의심해야 하는 이유다. 모든 사실을 아우르는 진리는 인간이 볼 수 없다.

가시광선을 펼쳐놓은 게 무지개다. 무지개 색깔은 나라마다 시대마다 다르다. 우리나라는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깔로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오방색이라고 다섯 색깔로 보았다. 영미권에서는 남색을 제외한 여섯 가지 색을 쓴다. 하지만, 무지개는 일곱 가지 색깔도, 여섯 가지 색깔도, 다섯 색깔도 아니다. 빨간색에서 점차 보라색으로 변하면서 경계가 없다. 그러니까 수많은 색이 그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실제로 보통 사람이라면 100가지 이상의 색을 구별해 낼 수 있다고 한다.

수많은 색을 품고 있는 가시광선은 대기를 통과하면서 산란을 일으킨다. 맑은 날 하늘이 파란 이유는 파장이 비교적 짧은 파란빛이 산란하여 우리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무지개의 빨주노초파남보에서 빨간색이 파장이 가장 길고 점차 짧아져 보라색이 가장 짧다.)

노을은 주로 아침과 저녁에 발생한다. 태양 빛이 대기를 통과하는 거리가 가장 길기 때문이다. 파장이 짧은 보라색과 초록색 계열은 긴 거리의 대기를 통과하면서 모두 산란하여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남은 빨간색 파장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태양 빛이 대기를 통과하는 길이가 길면 길수록 노을은 더 붉다.

태양빛이 대기 통과하는 그림 태양이 머리 위에 떠 있을 때는 대기를 통과하는 길이가 짧다(굵은 푸른색). 하지만, 해가 기울면 대기 통과하는 시간이 길어져(굵은 붉은색) 대부분 색은 사라지고 붉은 색만 남는다.
태양빛이 대기 통과하는 그림태양이 머리 위에 떠 있을 때는 대기를 통과하는 길이가 짧다(굵은 푸른색). 하지만, 해가 기울면 대기 통과하는 시간이 길어져(굵은 붉은색) 대부분 색은 사라지고 붉은 색만 남는다. ⓒ 허관

위험표시는 대부분 붉은색이다. 도로공사를 알리는 표지판의 글씨도 붉은색이고, 위험물에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문구도 붉은색이다. 도로의 멈춤 신호도 붉은색이다. 이처럼 위험을 알리는 표시가 붉은색인 이유는 붉은색이 산란의 영향을 덜 받아 멀리까지 잘 보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이 다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생존한 붉은 노을처럼.

노을이 짙은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머나먼 기억까지 떠오르는 이유가 붉은 노을이야말로 모든 걸 탈탈 털어버린 원초적인 색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동양인이건 서양인이건 노을을 보면 깊은 그리움에 빠져들었을까. 과연 노을 속에는 죽음과 절망, 그리고 슬픔만 있었을까.

'그의 눈에 비친 하늘은 분명 어둠을 맞는 핏빛 노을이 아니라 내일 아침을 기다리는 오색찬란한 무지갯빛이리라.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현수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고향도 반드시 어둠을 기다리는 그런 상처 깊은 고향이기보다는 내일 아침을 예비하는, 다시 오고 싶은 고향일 수도 있으리라.' - 김원일 <노을>

죽어 썩은 잡초 사이로 봄만 되면 싹이 돋아나듯이, 죽음은 항상 생명을 잉태했다. 우리는 매일 노을과 함께 죽었고, 매일 일출과 함께 태어났다. 노을은 어제 죽은 자가 오늘의 삶에게 보내는 희망의 메시지다. 그리고 지난해를 힘겹게 살아온 당신이, 올해도 살아갈 수 있는 건, 노을 속에 죽은 그 무엇 때문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 스토리에도 실립니다.


#노을#무지개#가시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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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청에서 24년간 근무했다. 현대문학 장편소설상과 대한민국 콘텐츠대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최근작『남극 펭귄 생포 작전』(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블루픽션-85)은 2024년 경기문화재단 경기예술지원 사업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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