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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동은 부천의 북쪽에 위치한 넓은 들녘으로 지금은 신도시 건설로 개발이 한창 이다. 5년 후인 2029년에 공공주택단지(1.9만세대)를 비롯해 도시첨단산업단지 등이 들어설 예정이며 개발이 되기까지 이곳은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논이 대부분으로 도시화된 부천에서 농촌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귀한 곳이었다.

대장동 개발을 위해 설치한 입구 부천대장 공공주택지구를 조성하기 위해 길을 닦고 도로를 만들고 있다(촬영 2025년 1월 2일)
대장동 개발을 위해 설치한 입구부천대장 공공주택지구를 조성하기 위해 길을 닦고 도로를 만들고 있다(촬영 2025년 1월 2일) ⓒ 박종선

농사철인 봄과 여름에는 멸종위기종인 금개구리와 맹꽁이가 집단으로 서식하는 대표적인 생태계의 보고였고, 겨울에는 멀리 시베리아와 몽골에서 날아온 철새들의 소중한 보금자리였다.

겨울을 나기 위해 대장동 찾은 철새들 대장동에서 부천 시내를 바라보며 촬영한 겨울 철새들
겨울을 나기 위해 대장동 찾은 철새들대장동에서 부천 시내를 바라보며 촬영한 겨울 철새들 ⓒ 박종선

또한 높은 산이 없는 부천에서는 일출을 볼 수 있는 명소이다.

겨울의 대장동 일출 2022년 1월 14일에 촬영한 대장동 일출로 멀리 서울을 배경으로 해가 뜨고 있다
겨울의 대장동 일출2022년 1월 14일에 촬영한 대장동 일출로 멀리 서울을 배경으로 해가 뜨고 있다 ⓒ 박종선

이처럼 도시의 개발과 생태환경적으로 중요한 대장동에는 이외에도 다양한 역사가 숨겨져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동부간선수로에 있다. 동부간선수로는 대일항쟁기(일제강점기) 일제가 식량을 수탈하기 위해 만든 부평수리조합의 일부였다. 동부간선수로는 한강에 맞닿아있는 김포 고촌면에서 시작해 김포공항을 거쳐 부천 대장동까지 이어졌다. 부천이 개발되기 전에는 상동과 중동까지 조성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복개되어 대장동에서만 그 모습을 오롯이 볼 수 있다.

동부간선수로를 통해 부평수리조합과 일제의 경제 수탈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부평수리조합(富平水利組合)이란?

일제는 1920년대 조선을 이용해 본토로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일제는 관개(灌漑)개선, 개간, 개척 등의 '토지개량사업(土地改良事業)'과 비료증대, 재배법 개선, 신품종 보급 등의 '농사개량사업'(農地改良事業)을 동시에 추진하였다.

이러한 계획에 의해 부천에는 1923년 4월 9일 부평수리조합(富平水利組合)이 만들어졌다. 즉, 한강물을 끌어와서 부평평야에 농업용수로 활용해 농업생산량을 증대하는 것으로 지금으로 보면 부천시, 인천 계양구와 부평구, 김포 고촌에 해당한다. 그 당시로 보면 부천군의 계남면·부내면·오정면·계양면, 김포군의 양서면·고촌면 등 35리(里)에 해당이된다.

부평수리조합 허가(조선총독부고시제128호) 조선총독부는 부평수리조합을 1923년 4월 9일 허가, 4월 13일 공지하였으며, 부천군 계남면.계양면.부내면.오정면, 김포군 고촌 등의 35리(里) 사업구역을 설정하였다
부평수리조합 허가(조선총독부고시제128호)조선총독부는 부평수리조합을 1923년 4월 9일 허가, 4월 13일 공지하였으며, 부천군 계남면.계양면.부내면.오정면, 김포군 고촌 등의 35리(里) 사업구역을 설정하였다 ⓒ 박종선

부평수리조합과 우리 선조들의 삶

그렇다면 부평수리조합이 만들어진 후 우리 선조들의 삶은 어떻게 변화하였을까?

첫번째, 자작농의 감소와 소작농의 증가

부평수리조합이 만들어지기 전에 일제는 대대적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진행하였다. 명목상으로는 토지의 소유자를 파악하는 것이지만, 문서에 기록되지 않은 토지들을 강제로 몰수하기 위해 진행된 사업이었다. 조선총독부가 정한 법제·제도적 신고 방식이 우리나라 전통적인 방식과 다르므로 신고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총독부는 이러한 토지를 몰수하고 저렴한 가격으로 일본인들에게 공급하였다. 이로써 부천에는 자작농이 줄어들고 소작농은 늘어났으며, 넓은 토지를 소유한 일본인들이 많이 증가하였다. 일본인 소유 농장은 한다농장(半田農場), 수진농장(水津農場), 삼호농장 등이 대표적이다.

두번째, 과도한 수세와 보수공사비 부담

수세가 얼마나 과도했을까? 이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기사가 있다. 바로 1926년 12월 10일 매일신보 기사로 1926년에는 수세가 추수의 4~5배나 되었다고 한다. 즉, 수확하여 얻은 이익이 비료비, 노동비, 가마니비 등을 모두 제하지 않았는데도 물세로만 4~5배나 달하였다고 한다. 농사를 지어도 1년치 식량을 얻지 못했을 뿐아니라 빚만 늘어난 것이다.

1925년 을축대홍수가 나자 부평수리조합은 막대한 비용으로 보수공사를 했는데, 이 또한 그 안에서 농사를 짓던 조선인들의 몫이었다. 조합비뿐만아니라 보수 비용을 내야만 했다.

1926년 추수(秋收)의 4~5배나 되는 부평수리조합의 수세에 대한 기사 1925년 대홍수를 겪고 1926년 처음으로 수확하였으나 수확량은 예년과 같은데, 수세는 추수의 4~5배나 된다고 말하는 1926년 12월 10일 매일신보 기사
1926년 추수(秋收)의 4~5배나 되는 부평수리조합의 수세에 대한 기사1925년 대홍수를 겪고 1926년 처음으로 수확하였으나 수확량은 예년과 같은데, 수세는 추수의 4~5배나 된다고 말하는 1926년 12월 10일 매일신보 기사 ⓒ 박종선

이러한 상태에 놓인 소작인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기사가 있다. 바로 1926년 12월 9일 조선일보 기사로 야밤도주로 간도로 간다는 것으로 이때 이미 농촌사회는 파탄이 난 것이다. 즉, 부평수리조합이 만들어지고 불과 4~5년 만에 부천의 농촌 사회는 붕괴된 것이다.

육백석수입(六百石收入)에 만이천원과세(萬二千圓課稅)

남부여대하고 유리할뿐 만륙천 소작인 원성 창천(萬六千小作人怨聲漲天)

부평수리조합(富平水利組合)은 원래 설립 당시부터 일반 지주의 원망이 많아 그 조합구역(區域)인 부천군 계남,부내,오정(富川郡桂南富內吾丁)들 면과 김포군 고촌, 양서(金浦郡高村陽西)의 각 면의 토지를 가진 지주 일천일백삼십륙명과 그 토지를 소작하는 소작인 만여명의 원성이 창천하든 바 작년으로 말하면 지독한 수해로하야 소득은 커녕 모든 가산 즘불을 볼수히업샌 후 금년에 이르러는 뜻하자아니한 조합비가 실수입의 사오배로부터 십배나 넘어 어떤 지주는 육백석 추수가 될지말지한데 조합비는 일만이천여원에 달하야 삼천여원을 도리어 다른 수입에서 보충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현상에 잇고, 또 어떤 지주는 삼심두의 수확밖에 없는데 조합비는 삼백여원에 지나고, 또는 모두 추수한 것이 너말밖에 없는데 조합비는사십육원이라는 실로 거짓같은 참사실이 있다는바 이것도 금년 일년이면 모르거니와 앞로 25개년 동안을 이같이하여야 될 것이니 이같이하면 25년은 고사하고 삼사년 후이면 부평평야에는 주민 일만오륙천명은 할 수 없이 그 땅을 다 버리고 남부여대하여 고국산천을 등지고 유리표박하야 남북간도(南北間島)로 몰려가지 않으면 아니 될 형편에 있다더라

부평농민조합창립과 소작료 인하운동

이러한 상황에 내몰리자 소작인들은 지주와 부평수리조합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부당한 처사와 수탈에 반대한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1927년 지주들은 소작인들과 농사 전에 소작료로 구답은 6할, 신답은 5할로 약속을 한다. 하지만 풍년이 들자 지주들은 소작인들과 상의도 없이 구답은 6할 5부로, 신답은 6할로 올려버린다. 부평수리조합의 수세에 대한 부담을 지주들이 소작인들에게 전가한 것이다.

여기에 분노한 소작인들은 부평수리조합을 반대하며 부평농민조합을 창립하게 된다. 1927년 10월 28일 오후 소사역(지금의 부천역) 앞에 있는 정미소 창고 안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조지풍 씨를 의장으로 선출하고 소작료에 관한 건, 농업자금에 관한 건, 비료 및 농기구에 관한 건, 농업근본방침에 관한 건 등 소작인과 관련된 의제에 대해 논의한다. 결국 소작인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졌으며, 소작료는 예년과 같게 되었다. 부평수리조합을 반대하며 부평농민조합을 창립한 이 운동은 일제의 수탈에 맞서 일어난 경기도 최초의 소작항쟁이었다.

지주의 횡포에 맞서 소작인 궐기 소작인들이 부평수리조합과 지주들의 횡포에 맞서 부평농민조합을 창립해 소작료인하운동을 진행한 내용을 알리는 1927년 10월 30일의 매일신보 기사
지주의 횡포에 맞서 소작인 궐기소작인들이 부평수리조합과 지주들의 횡포에 맞서 부평농민조합을 창립해 소작료인하운동을 진행한 내용을 알리는 1927년 10월 30일의 매일신보 기사 ⓒ 박종선

부평농민조합운동 안내판 설치

부평수리조합 사무실은 현재의 부천역 남부(심곡본동 663)에 위치하였으며 부평농민조합 창립대회는 바로 옆(심곡본동651)에서 열렸다. 부평농민조합창립대회가 열렸던 그 곳에 지난 2018년 말에 경기문화재단이 안내판과 표지판을 세워 역사적 의미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있다.

부평농민조합 소작료인하 투쟁지 안내판 2018년 말에 경기문화재단이 심곡본동 651에 설치하여 경기도 최초로 일어난 소작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있다
부평농민조합 소작료인하 투쟁지 안내판2018년 말에 경기문화재단이 심곡본동 651에 설치하여 경기도 최초로 일어난 소작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있다 ⓒ 박종선

대장동의 동부간선수로를 통해 대일항쟁기(일제강점기) 일제의 수탈과 여기에 대항한 소작항쟁에 대해 알아보았다. 추후에 개발로 대장동의 풍경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아파트와 첨단공장이 들어서고, 사람들의 이동이 많아지더라도 동부간선수로의 형태는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혹시 동부간선수로를 보았을 때 일제의 수탈, 부평수리조합, 부평농민조합, 소작료 인하운동 등을 기억해 줬으면한다.

#부천대장동#동부간선수로#부평수리조합#부평농민조합#경기도최초소작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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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의 항일독립운동을 기념하고 일제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역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약사로서 한약 처방, 야생화, 한약재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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