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여기는 '기'가 없어!"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뇌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냄새, 맛, 촉각, 청각 등 모든 감각에는 삶이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엄마는 늘 충청도에 '기'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알고 보니 '게'를 엄마는 '기'라고 발음하셨다. 아랫지방으로 시집을 간 엄마는 장에 갈 때마다 눈에 불을 켜고 그 작은 게를 찾아보았지만, 꽃게, 돌게, 털게뿐, 다른 게는 없었다.
그리운 '기'를 찾아
사는 게 뭐가 그리 바쁘다고 그 '기' 한 마리 못 찾아드리다 결국 나는 언니, 엄마를 앞세우고 광주에 있는 말바우 장으로 향했다. 수십 년 지난 지금도 기억에 또렷한 숫자, 2, 4, 7, 9. 엄마의 '기'가 별나서가 아니라 그 그리움이 무엇인지, 엄마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매한가지 일 테다.
전국에 오일장이 서는 곳이 어디 말바우뿐이겠는가만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그냥 장이 아니다. 3시간이면 냉큼 갈 수 있는 곳이건만그 말바우 장 나들이에 수십 년이 걸렸나 보다.
'기'도 사고, 장날에만 먹을 수 있었던 당시 2천 원짜리 팥칼국수도 먹을 생각에 우리는 들떠 있었다. 어릴 적 살았던 집도 보고, 발바닥에 불이 나게 싸돌아다녔던 시장 골목과 어르신들이 촘촘하게 앉아 물건을 내다 판 좁디좁은 골목들을 볼 생각을 하니 설레기도 했다.
말바우 시장은 나의 유년 시절의 주 무대였다. 맞벌이하는 부모님 덕에 언니와 나는 짝지처럼 늘 붙어 다녔다. 아침, 저녁에만 볼 수 있는 부모님이라 오전, 오후반으로 초등학교 수업을 나눠 할 때도 나는 껌딱지처럼 언니를 졸졸 따라다녔다. 언니가 오전 수업이고 내가 오후 수업일 때, 언니 교실 맨 끝에 앉아 언니를 기다렸다 수업을 마치고 하교했다. 장이 서는 날이면 장이 파하기 전에 얼른 가서 엄마 심부름도 하고, 주전부리도 했다.
여름 방학이 되면 이른 아침에 장에 나가 푸성귀를 사다 날랐고, 오는 길에 내 이빨과 닮은 꼴인 얼룩배기 찰옥수수와 오란다, 뻥튀기 그리고 양 볼이 터지도록 큰 하얀 바탕에 무지개색 줄무늬가 있는 눈깔사탕으로 심부름 값을 모두 탕진하기도 했다. 후한 인심과 풍성한 먹거리, 그리고 상인들의 물건을 파는 곡조는 한 편의 뮤지컬 같기도 했다. 2, 4, 7, 9. 학교 숙제는 까먹어도 장날은 까먹지 않았던 나였다.
기억 속 '말바우 장'
1960년대 생긴 말바우 시장은 조선 중기 무등산을 배경으로 활약했던 의병 김덕령 장군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화살보다 빠른 용마를 만들기 위해 훈련을 하던 중, 활을 쏜 후 말을 타고 달렸는데 그때 말의 발자국이 바위에 찍혀 말바위 산이 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400개가 넘는 노점이 있고, 담양, 화순, 옥과 등 인근 지역에서 찾아올 만큼 큰 광주의 대표적인 장이다. 지금은 바위산은 흔적도 없지만, 어릴 적엔 말바우 언덕배기에서 한 시절을 보냈다.
겨울이면 납작한 돌을 모아 불을 피워 돌을 굽고, 집에서 가져간 달력을 돌돌 말아 주머니에 넣고 온종일 얼음판에서 뛰어놀았다. 해가 뜨면 말바우로 가서 돌을 굽고, 해가 지면 시커먼 손으로 집에 돌아왔다.
어린 우리에겐 아지트이자 훌륭한 놀이터였다. 언젠가 그 말바우 언덕이 평지가 되고 그 자리에 더 넓은 장이 생겼다. 지금은 그 형상조차 없지만, 기억 속의 그 돌 언덕배기가 투시도처럼 지금의 모습에 그대로 얹어진다.
장 근처에 숙소를 정하고, 우리가 살았던 집이 그대로 있는지 가 보았다. 너무도 달라진 모습이지만, 금세 찾을 수 있었다. 신진자동차학원, 도연슈퍼, 아가페교회, 한일약국, 대창운수 그리고 우리 집은 모두 다 사라졌다.
그런데도 꼭 그 자리에 있는 것만 같았다. 사라져서 더 그리운 것인지 아니면 보낸 시간의 밀도가 너무 진해서인지 아련하다.
맛은 기억의 더듬이로 느끼는 것
다음 날 해가 쨍하기 바쁘게 팥칼국수 집을 향한다. 시장에 포장을 쳐놓고 장사했던 집인데 살림집을 터서 가게로 만든 모양이다. 세월의 오래된 흔적을 고스란히 가진 곳. 수십 년 세월이 흘렀는데 여전하다. 가격은 5천 원으로 곱이 올랐지만, 그 자리를 지켜준 그분들이 마치 고향에 두고 온 가족마냥 그리도 반갑다. 이런 마음을 뭐라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엄마, 같어?"
"응, 똑같어. 하나도 안 변했어."
설탕을 듬뿍 넣어 팥칼국수를 게눈 감추듯이 뚝딱했다.
제아무리 맛있는 팥칼국수라 해도 이 낡은 가게에서 먹는 맛을 따라갈 수 없다. 그런 걸 보면 맛은 혀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추억으로 간을 하고 기억의 더듬이로 보는 것 같다. 몇 시간을 운전해서 먹으러 온 참 비싼 팥칼국수다. 그런데도 비싸게 느껴지지 않는 이 아이러니함은 무얼꼬.
노천에 있던 시장도 현대화되고, 길 찾기도 편리해졌다. 생선이 보이는 곳을 향해 진격! 드디어 빨간 고무 대야에 한가득,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다리를 꼬무락꼬무락 쥐락펴락하는 게다! 엄마는 지금까지 이 게의 이름을 모른 채 그저 '기'라고만 하셨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저 도시락 반찬에 늘 올라왔던 게였을 뿐이다. 이름하여, '칠게'로 화랑게, 찔게, 찔룩게로도 불리는 게다. 간장에 조리거나 젓갈을 담기도 하고, 튀겨 먹기도 한다.
펄펄 살아있는 게를 한 봉지 사든 엄마의 발걸음이 가볍다. 한 바구니에 단돈 만 원이다. 만 원이면 살 수 있는 그 '기'가 무엇이라고 수십 년을 뭉그적거렸는지… 나중에 안 사실은 인터넷에서 주문도 가능했다. 엄마의 '기'가 말이다.
낭만은 그리움의 또 다른 이름
"엄마, 다시 광주에서 살고 싶어?"
"아니, 연고도 없는데 무슨…. 그냥 그때가 그리울 때가 있을 뿐이지."
그렇다. 이율배반적이지만 그리워하면서도 살고 싶은 마음은 없단다. 각자 삶의 여건이 다르니 그런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연어처럼 때가 되면 모두들 고향을 향해 가는지도 모른다. 그리운 부모 형제가 있어서도 그렇지만, 생활에 찢긴 상처를 아물게 하고, 새 살을 돋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혈육이 아니더라도 팥칼국수 집 주인장처럼 수십 년 세월을 지키고 있는 이들을 보면 힘이 나고 위로가 되기도 한다.
화려하지 않아도 화려함보다 더한 빛이 나고, 세련되지 않아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세월의 깊이가 있다. 그런 것이 바로 낭만이다. 누구에게나 그리운 곳이 하나쯤은 있다. 세월이 있고, 삶이 있는 곳, 시간을 가로지르는 추억이 만들어놓은 곳, 이러한 곳이 낭만도시는 아닐까. 그래서 낭만이란 추운 날, 따뜻한 국물처럼 우리의 마음을 데우는 그리움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요리는 소스 맛이라고들 합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추억'이라는 고물이 묻어야 비로소 맛이 나는가 봅니다.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추억이 그대로 남아있는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큰 축복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도시가 없어지면 찾아갈 수도 없으니까요. 저마다 마음속에 간직한 소중한 곳을 한 번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그곳이 곧 우리의 낭만도시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