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이 궁금해 마트를 한 바퀴 돌아도 마땅한 먹거리를 찾지 못하다가 한쪽 구석에 있는 씀바귀, 예전에 '속세'라고 부르던 나물을 발견했다(속세라고 했더니 누군가 씀바귀라고 한다. 포장엔 속세라고 붙어있다. 내가 어릴 때도 속세라고 불렀다). 씀바귀는 봄나물인데 한겨울 마트에 자리 잡고 있는 걸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 씀바귀 한 묶음을 집어 들었다.
먹거리가 풍부한 요즘 같은 시대에 씀바귀 같은 나물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어릴 때 밭에 지천이었던 씀바귀를 돈 주고 사면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 들어 한 번도 사 먹은 적이 없었는데 요 며칠 씀바귀를 자주 사 먹는다. 입맛 없는 요즘 입맛을 돋워주는 겨울철 별미기 때문이다.
"쓴맛 좋아하시나 봐요?" 마트 계산원이 씀바귀를 계산하는 내게 한마디 건넨다. "네 좋아해요" 하니 "잘 드시나 보다" 한다. 웃으며 "네 잘 먹어요" 했다.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오십 대 계산원과 씀바귀가 재배니 자연산이니 하는 짧은 대화를 나누다 헤어졌다. 어릴 때 먹던 씀바귀를 나이 오십이 넘어 처음으로 내 돈을 주고 샀다. 씀바귀는 보통 고추장에 생 걸로 무쳐먹어야 제 맛이지만, 요즘 씀바귀는 간장에 무쳐야 더 맛있다는 엄마의 말씀.
그래서 집에 와서 끓는 물에 살짝 데친 다음 고추장 대신 간장에 무쳐서 먹는다. 처음엔 고추장으로 무쳐봤는데 내가 생각했던 그 맛이 나지 않아 간장으로 바꾼 것인데 탁월한 선택이었던 거 같다.
엄마 말씀처럼 요즘 씀바귀는 옛날 씀바귀와 다른 것일까. 요즘과 다른 것이 어디 씀바귀 하나뿐이겠냐만은 옛날엔 씀바귀가 반찬으로 인기가 없었다. 쓴맛을 좋아할 어린이는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바구니 가득 채우기 딱 좋은 나물로는 제격이라 인기가 많았다. 잎은 냉이와 비슷한데 조금 더 작고 붉은빛을 띠며 군락을 지어 한번 캐면 실오라기 같은 뿌리라도 끝까지 뽑아 올리는 재미가 있어 뿌리를 끊지 않고 땅속 끝까지 파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기억이다.
씀바귀는 잎이 아닌 뿌리를 먹는 음식이기에 얼마나 굵고 긴 뿌리를 캐느냐가 묘미였다. 맛보다는 캐는 묘미가 좋았던 씀바귀를 까마득하게 잊고 있다가 몇 년 전 다시 보게 되었는데 씀바귀의 쓴맛이 나를 살렸던 시기였다.
심신이 지치고 힘든 나를 엄마가 고향으로 불러들였던 적이 있는데 생각해 보니 그때도 바로 지금 이 계절이다. 엄마는 그때 나를 위해 몸에 좋다는 음식을 열심히 해주셨지만 내 입맛을 살리지 못해 힘들어하셨다. 나도 거의 죽기 직전 일보라 신경이 날카로워 있었고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어디서 났는지 씀바귀를 무쳐 주셨다. 그때 나를 살린 씀바귀의 '맛'이 있다. 씀바귀의 맛을 아는 사람만 아는 그리운 맛.
엄마는 그날부터 매일 씀바귀를 무쳐주셨고 나는 매번 오일장에 나가 씀바귀를 잔뜩 사 왔다. 한 달 내내 먹었던 거 같다. 그때 내가 먹었던 씀바귀의 맛은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묘한 맛이었다. 쓰면서도 아리하고 부드러운 쓴맛. 희로애락이 담긴 맛.
희로애락을 품은 맛
엄마와 마트에서 사 온 씀바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어릴 적 아무개가 생각났다. 참 착한 친구였고 나보다 한 살 어리고 별명이 땅꼬마였던 친구. 어릴 때 고향친구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모두 친구다.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한 수많은 고향 친구들 중 유독 땅꼬마가 생각나는 건 땅꼬마는 못하는 게 없는 만능 탤런트였기 때문이다. 까만 눈동자에 다부진 체격의 당찬 땅꼬마.
지금은 한겨울도 따뜻한 날이 많아 땅만 얼지 않으면 나물을 캘 수 있다지만 어릴 때는 봄이 돼야 나물을 캘 수 있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친구들과 바구니와 호미를 들고 산이나 다름없는 밭으로 향했는데 그때 밭은 일하는 공간이 아니라 놀이터였다. 냉이보다 흔한 씀바귀 찾아 밭을 이동하다 보면 어느새 다른 동네까지 가기도 하는데, 종일 밭에서 놀다가 집에 돌아와 다음날 아침 눈뜨면 다시 또 친구들과 밭으로 향했던 기억이다.
당시 내 친구 땅꼬마는 나물도 남들보다 잘 캐서 바구니를 금방 채웠다. 씀바귀 밖에 캘 줄 모르는 나와 달리 당시 귀한 달래를 많이 캤는데 그 모습이 멋져 보여서 어느 날은 나도 씀바귀는 일부러 안 캐고 달래만 찾아 헤매다 아무것도 담지 못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땅꼬마는 내게 자신이 발견한 달래 무리를 캘 수 있게 선심을 쓰기도 했다.
여름은 또 어떤가. 깊은 물에서 수영을 할 때도 겁이 없었다. 냇가에서 돌집 짓는 놀이에도 무거운 돌을 척척 옮겨 가장 튼튼하고 멋진 집을 짓는 아이였다. 구슬치기 할 때도 최고였다. 멀리 있는 구슬을 정확히 맞춰 또래와는 게임 상대가 되지 않아 선배들 구슬치기에 참여할 정도였다. 여기저기 굴러가 오 미터가 넘는 구슬을 맞춰야 해서 구경꾼들도 손에 땀을 쥐게 하며 긴장했던 구슬치기의 명장면은 여전히 생생하다.
구슬치기 할 때 반칙 하는 나를 봐준 것도 땅꼬마였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반칙을 해도 너무 못해서 그냥 내버려 뒀다고 하는 말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었다.
가을 볏짚 놀이할 때도 제일 높이 쌓았고, 알밤을 주울 때도 가장 많이 주웠다. 공기놀이도 척척. 겨울 눈사람을 만들 때도 최고였다. 그냥 뭐든지 다 잘하는 친구였다. 반면 나는 제일 못하는 사람으로 반칙을 봐줄 만큼 눈감아줄 만큼 최약체였다. 그럼에도 서로 잘 어울려 계절을 놀았던 거 같다. 그때는 그냥 모든 계절이 그 친구와 함께였다.
어린 계절에 멈춰진 채 스무 살 성인이 되어 처음 서울을 갔을 때 나를 반긴 것도 땅꼬마였다. 땅꼬마는 서울 명동거리를 구경시켜 주며 어느 식당에서 밥을 사줬다. 돌이켜보면 노동자의 삶을 살던 땅꼬마가 시골에서 올라온 고향친구를 위해 두툼한 지갑을 보이며 어렵게 시간을 낸 것이리라. 생각하면 아리다. 그 후, 어느 해 명절 때 다시 한 번 보고 그 뒤 서로 살 길이 바빠 영영 볼 수 없었다.
휴대폰이 없는 시절이었다 해도 각자의 시간이 너무 달랐던 것일까. 그 소문조차 흐릿하고 기억조차 희미해질 즈음, 그 친구가 어쩐 일인지 세상에 더는 존재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하지만 여전히 믿을 수 없고 믿고 싶지 않아 외면한다. 확인하지 못했으니 헛소문에 불과하다고 부정한다. 언젠가 확인해 줄 사람을 만난다면 묻고 싶지만 차마 묻지는 못할 거 같다. 내 기억 속 땅꼬마는 까만 눈동자가 반짝이는 예쁜 소녀였으니까.
끓는 물에 살짝 데친 씀바귀를 바라보며 끌려온 기억까지 버무려 버린다. 끓는 물에 데쳐내도 쓴맛이 여전한 씀바귀일 텐데. 씀바귀의 쓴맛이 좋아지는 것이 계절도 나이 탓도 아닐 텐데.
희로애락을 품은 조화로운 맛 씀바귀로 감정이 허해진 마음을 채운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가끔 고향에서 씀바귀의 공간을 바라보면 삭막하다. 우리가 언제 저 먼 밭을 걸어 다녔을까. 능선을 따라 호미와 바구니를 들고 씀바귀를 찾던 아이들을 품었던 산치곤 너무 쓸쓸하다. 우리가 누렸던 푸르고 푸른 숲은 너무 멀고 너무 높다. 씀바귀의 추억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