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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재북 인사릉 정인보 묘지
평양 재북 인사릉 정인보 묘지 ⓒ 연합뉴스

위당 정인보(1893 ~ 1950)는 일제가 조선을 영구 지배할 목적으로 조선사를 왜곡하는 <조선반도사>를 편찬할 때, 이에 맞서 <5천년간 조선의 얼>을 집필하면서 첫 머리에 "누구나 어릿어릿하는 사람을 보면 '얼' 빠졌다고 하고 '멍' 하니 앉은 사람을 보면 '얼'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사람의 고도리는 '얼'이다. '얼'이 빠져 버렸을진대 그 사람은 꺼풀사람이다."라고 썼다.

<조선반도사>는 총독부가 거액을 투자하여 일본 어용사학자와 조선 친일사학자들을 동원하여 이른바 동조동근론, 타율성론, 사대주의론, 정체성이론을 폈다. 조선의 역사를 뿌리부터 왜곡한 것이다. '조선의 얼'이란 말이 애상적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통속어라는 비판이 없지 않았지만, 당시 상황을 알면 그 중요성과 절실함을 이해하게 된다.

위당은 "일본 학자의 조선사에 대한 고증이 저희 총독정책과 얼마나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을 더욱 깊이 알아 '언제든지 깡그리 부셔버리라'하였다."는 각오로 조선사를 '얼'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해석하려는 시도로 <5천년간 조선의 얼>을 썼다. 그리고 "나를 춥고 굶주리게 할 수는 있어도 나의 얼을 빼앗아가지는 못한다."고 결연한 의지를 피력하였다. 1910년 8월 17세 때에 국치를 당한 정인보는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하이에서 신규식·김규식·박은식·신채호·여운형 등과 동제사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았다. 출산중이던 부인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이후 국내에서 활동한 그의 역할은 실로 막중하였다.

다산 서거 100주년을 앞두고 안재홍 등과 <여유당전서> 펀찬간행위원회를 구성하여 방대한 다산의 저서를 인쇄본으로 간행하는 큰 업적을 남겼다.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 전신)의 교수로 초빙되어 한문학·국사학·국문학 등을 가르치고, <시대일보>와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으로 민족혼이 넘치는 논설을 썼다.

위당은 타고난 성품이 올곧고 매서워서 허위와 가식을 싫어하였다. 민족사학정신을 이어받은 단재 신채호가 여순감옥에서 옥사한 소식을 듣고 추도하는 글을 짓고, 육당 최남선이 만주괴뢰국의 건국대학 교수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집 대문 앞에 냉수를 떠놓고 곡(哭) 하였다.

처음으로 '국학(國學)'이란 용어를 쓰기 시작하여 이땅에 '국학'의 뿌리를 내리고, 품격이 높은 국한문 혼용의 각종 산문을 쓰고, 고아한 한국어로 수많은 시조를 지었으며, 도저한 사필 그리고 한문학, 국문학, 국사학 등 폭넓은 학문과 연구는 당대에 따를 자가 많지 않았다. 문·사·철 일체를 섭렵하는 학자이고, 특히 국학의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일제말 수많은 학자·언론인·작가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훼절하고, 위당에게도 위협과 회유의 손길이 닿을 때 홀연히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 이어 전북 익산군 황화면 시골로 내려가 은거하면서 청렬한 지절을 지켜냈다.

해방을 맞아 서울로 온 위당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을 앞두고 <봉영사>와 <순국선열 추념사>, <광복열사의 영령 앞에> 등을 지어 순국선열과 생존 독립지사들의 노고를 기렸다. 하나 같이 겨레의 '얼'이 깃든 명문이다.
1935년 동학과 함께  1935년 8월 동학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진 왼쪽부터 손진태, 이훈구, 정인보, 유진오다. 유진오는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설립에 관여하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이 초대 관장 손진태 앞에 '보전관장'으로 유진오를 표기하는 건 이 때문이다. 유진오가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건립 과정에 관여했지만, 초대 도서관장은 손진태가 맡았다.
1935년 동학과 함께 1935년 8월 동학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진 왼쪽부터 손진태, 이훈구, 정인보, 유진오다. 유진오는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설립에 관여하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이 초대 관장 손진태 앞에 '보전관장'으로 유진오를 표기하는 건 이 때문이다. 유진오가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건립 과정에 관여했지만, 초대 도서관장은 손진태가 맡았다. ⓒ 민속원

봉영사

우리 적의 기반(羈絆) 밑에서 우리 정부를 그리워함이 무릇 몇 해이뇨? 기미 3월 전민족의 뜻이 독립만세 소리로 터지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뭉친 지 27년 만에 오늘날 이 정부 주석 김구 선생 및 정부 제공을 이 땅에서 마중하게 되었다.

상해로 중경으로 그 가지로 겪은 바 고사(古史)에도 비례가 없건만 고심과 열혈 앞에 어려움을 모르시고 오늘에 이르셨다. 그동안 의지 없는 우리 민족이 바라고 향함이 이 정부 아니고 어디였으며, 고생으로 세월을 거듭하신 그분들의 꿈에도 잊지 못하심이 이 땅 이 민족이 아니고 누구였던가? 그러므로 비록 이역에서 사미(栖眉)하였을 망정 머문 곳마다 3천만의 정신은 항상 그리로 따랐었다. 적은 물러갔으나 우리 손으로 쳐쫓음이 아님은 한하신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 분들의 갈고 갈으신 그 칼이 마침내 천상의 가수(假手)하심을 보게 된 것이니 거룩한 이 돌아오심이야말로 무엇으로써 우리의 감격을 형용하리오?

오호, 그렇듯 그립던 정부로서 이 땅을 들어서는 즉시 국토의 장엄이 오히려 기다림을 느끼단 말가? 과거 27년 동안 적의 중압이 갈수록 더하여 포운(疱雲) 파월(巴月)의 상망(想望)조차 아득하였건만 어느 때고 우리나라의 독립이라고만 하면 곧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생각하였었다. 손이 묶이고 발이 채인 우리로서 헤어지지 아니한 원혼이 있어 해표(海表)로 날아다닌 그 날개 곧 이 정부가 아니었던가?

그 가운데 우방조차 무전(無前)한 성혈(腥血)로 덮으매 우리는 풍편에 귀를 기울려 초조를 하면서 연합제국의 모임만 있다면 이 정부의 참가를 궁금해하였다. 뜨거운 포호에 고마웠고 승인에 좋았고 내지 조우와 협보에 감사하여 왔다. 오늘 이 땅에서 이 마중을 하는 우리는 과거 아득했던 그 때 또 정신을 더 한층 솟구자. 그리하여 일체로 책임을 지자. 강산아, 나라는 다시 온다. 일월성진아,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앞길을 비추라. (주석 1)

주석
1> <위당 정인보 전집> 2, 324~325쪽,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3.

덧붙이는 글 | [광복80주년명문80선]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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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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