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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옥천군에 위치한 정지용 문학관
충북 옥천군에 위치한 정지용 문학관 ⓒ 주간함양

해방을 맞아, 광복을 맞아, 압제에 시달렸던 그리고 밝은 햇볕을 기다렸던 문민에는 정지용도 있었다. 1902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휘문고보를 거쳐 일본 동치사대학에서 공부하고 박용철·김영랑 등과 시문학동인에 참여했다. <향수>, <백록담> 등 빼어난 시를 쓰고, 해방 후 이화여대와 서울대 등에 출강하고 <경향신문> 주간을 역임했다.

해방공간에서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이 시기(1946년)에 쓴 작품 <애국의 노래>, <그대들 돌아오시니>, <추도가> 등은 독립운동과 순국선열께 드리는 시문이다.

천재 시인 정지용은 우리 근현대시사에서 한 큰 거봉이 아닐 수 없다. 1920년 초의 많은 시인들이 외래문학적 사조의 영향을 받아 남의 목소리를 빌려 노래한 것이라면 그 중반에 이르러 등단한 정지용은 우리의 목소리로 노래한 것이다. 우리말의 세포적 기능을 추구하여 그 속성을 파악하고 언어의 감각미를 개척한 시인이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 근대문학의 '개화기'라 할 수 있는 1930년대의 시단을 주도하기로 한 점이다.

정지용은 전생애를 통하여 오로지 시만을 위해 살다간 것이다. 그는 가장 순수했던 시인이었기 때문에 너무나도 고된 시적 행각이었다. 따라서 그가 남긴 시에서 특이한 호흡과 체온을 느끼게 된다. 이 모두가 우리 자신의 것으로 강득될 때 비로소 그의 시 세계에서 유영할 수 있을 것이다. (주석 1)

정지용은 1950년 6.25 당시 설정식 등과 북한 정치보위부에 붙잡혀 남북되고, 1987년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작품이 해금되었다. 소개하는 <그대들 돌아오시니>는 1946년 10월 <혁명>이란 잡지에 실렸다.

그대들 돌아오시니

백성과 나라가
이적(夷狄)에 팔리우고
국사(國祠)에 사신(邪神)이
오연히 앉은지
죽엄보다 어두은
오호 36년!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연히 돌아오시니!

허울 벗기우고
외오 돌아섰던
山하! 이제 바로 돌아지라.
자휘 잃었던 물
옛 자리로 새소리 흘리어라.
어제 하늘이 아니어니
새론 해가 오르라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연히 돌아오시니!

밭이랑 문희우고
곡식 앗어가고
이바지 하울 가음마자 없어
금의(錦衣)는 커니와
전진(戰塵) 떨리지 않은
융의(戎衣) 그대로 뵈일밖에!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연히 돌아오시니!

사오나은 말굽에
일가 친척 흐텨지고
늙으신 어버이, 어린 오누이
낮 서라 흙에 이름 없이 굴으는 백골(自骨)

상긔 불현듯 기달리는 마을마다
그대 어이 꽃을 밟으시리
가시덤불, 눈물로 헤치시라.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연히 돌아오시니! (주석 2)


주석
1> 김학동, <정지용 연구>, <책 머리에>, 민음사, 1997(개정판).
2> <정지용 전집> (1)시, 159~160쪽, 민음사, 1988.

덧붙이는 글 | [광복80주년명문80선]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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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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