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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신사 최시형 사진 해월 최시형 선생 사진은, 단성사 뒤편 고둥법원 감옥서(監獄署_교형장)에서 1898년 6월 1일 사형 판결을 받고, 6월 2일 순도(순국) 직전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가 찍은 72세의 해월신사 모습이다. 사진 상단 오른쪽에 '처교죄인 동학괴수 최시형'이란 팻발이 보인다. 이 사진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해월신사 최시형 사진해월 최시형 선생 사진은, 단성사 뒤편 고둥법원 감옥서(監獄署_교형장)에서 1898년 6월 1일 사형 판결을 받고, 6월 2일 순도(순국) 직전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가 찍은 72세의 해월신사 모습이다. 사진 상단 오른쪽에 '처교죄인 동학괴수 최시형'이란 팻발이 보인다. 이 사진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해월신사 최시형 상(像) 동학 천도교 제2세 교조 해월신사 최시형은 동학혁명(2차 기포)을 주도하다가 포덕 39(1898)년 4월 5일(음) 원주 송골에서 관헌에 피체되었다. 해월신사는 동년 6월 2일 향년 72세로 경성감옥에서 순도(순국)하였다. 이 좌상은 순도 직전의 최후 모습으로, 천도교 동학혁명1백주년기념사업회에서 동학혁명 100주년을 기하여, 동학혁명(백주년)기념관에 천도교 종법사 김창업 선생의 특성금으로 세웠다.
해월신사 최시형 상(像)동학 천도교 제2세 교조 해월신사 최시형은 동학혁명(2차 기포)을 주도하다가 포덕 39(1898)년 4월 5일(음) 원주 송골에서 관헌에 피체되었다. 해월신사는 동년 6월 2일 향년 72세로 경성감옥에서 순도(순국)하였다. 이 좌상은 순도 직전의 최후 모습으로, 천도교 동학혁명1백주년기념사업회에서 동학혁명 100주년을 기하여, 동학혁명(백주년)기념관에 천도교 종법사 김창업 선생의 특성금으로 세웠다. ⓒ 동학혁명기념관

해월, 사람섬기기를 한울님 같이

「필자는 그동안 삶에 있어서 국내외 여러 위인과 성인들의 면모를 숭상해왔으나, 솔직히 고백하면 해월 최시형 선생을 가장 존경한다. 해월 선생은 한울님이 사람으로 현신하신 것처럼 사람이 한울님이라는 사상을 실천하신 분이다. 그래서 해월 선생님을 뭐라 표현하기가 쉽지 않아 '거룩한 성자 해월 최시형 선생님' 즉 해월 스승님이라 부른다. 해월 스승님은 사람이 어떻게 살 것인가의 가르침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알려주신 분이다. 해월 스승님의 가르침대로 행한다면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인류와 자연만물이, 지옥과 같은 전쟁을 벗어나고 천국과 같은 평화가 열리게 될 것이다. 그것이 개벽, 다시개벽, 후천개벽의 세상이다.」

한편 해월 최시형 법헌과 의암 손병희 통령 일행은 보은 북실과 음성 되자니의 최후 전투 이후, 충청도와 강원도 일대의 깊은 산속을 전전했다. 전봉준·손화중·김덕명·최경선·성두환·안교선 등이 사형을 당하던 3월 30일(양4.24)경에, 해월 선생은 수제자들과 함께 음성 이춘백 제자 집에 있었다. 해월 선생은 곧 동학군 지도자들의 사형 소식을 듣고 식음을 전폐하여 비통해 하였다.

갑오년과 같은 운수가 다시 올 것이니

그런데 일부 제자들은, '전봉준의 반란으로 우리 동학이 이처럼 고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자 해월 선생은 차분한 목소리로 '수운 대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천도(天道)·동학(東學)은 5만 년 이어진다고 하셨네. 그런 망언은 다시는 하지 말라. 갑오년의 일은 사람의 사심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천명으로 일어난 것이네. 민심이 곧 천심이니 그 누구도 전봉준을 욕하지 말라. 앞으로 갑오년과 같은 운수가 다시 와서 갑오년과 같은 일들을 다시 하게 되면, 세계 인민들의 정신을 불러일으킬 것이니라'고 말씀하였다.

해월 선생은 천도·동학을 수십 년간 지도하면서, 수운 대선생 때 3천~5천(부인, 자녀 포함 1만)명 이던 동학도인을 1백만 명으로 포덕하여 조선 일대에 동학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선생이 동학농민혁명 때 무력 기포를 반대한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이필제 무력 혁명에 동참하여 엄청난 피해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전봉준의 의거처럼 피 흘리는 혁명에 의해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보다, 사람 개개인의 정신을 개벽하여 자연스럽게 사람이 하늘인 새 세상을 열어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침략을 당하게 되자 수운 대선생의 명교를 실천하기 위해 결국 동학군 총기포령을 내리게 되었다.

해월문집(海月文集 해월문집(海月文集) 해월신사 최시형 선생에 대한 글을 모은 필사원본이다. 해월문집(海月文集)은 동학혁명 이전의 1885~1892년에 걸친 해월선생과 관련된 문서로 구성되어있다. 동학교단의 주요의식, 동학지도자들에게 보낸 각종 통문, 동학조직 접주, 육임 등 임명, 동학의 포와 접 순회, 간난한자와 부자간의 서로 돕는 유무상자 내용, 갑오동학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여러 동향들이 망라되어 있다. 해월문집(海月文集)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해월문집(海月文集해월문집(海月文集) 해월신사 최시형 선생에 대한 글을 모은 필사원본이다. 해월문집(海月文集)은 동학혁명 이전의 1885~1892년에 걸친 해월선생과 관련된 문서로 구성되어있다. 동학교단의 주요의식, 동학지도자들에게 보낸 각종 통문, 동학조직 접주, 육임 등 임명, 동학의 포와 접 순회, 간난한자와 부자간의 서로 돕는 유무상자 내용, 갑오동학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여러 동향들이 망라되어 있다. 해월문집(海月文集)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 동학혁명기념관

해월, 역사에 길이 남을 법설

해월 최시형 선생은 동학혁명이 좌절된 후, 3년 동안 인제·원주·충주·음성·청주·상주·음죽·앵산동·전거론·방아재·옥천 등으로 피신해 다니며, 동학 재건에 힘쓰고 역사에 길이 남을 법설을 남겼다.

해월 선생께서 남긴 대표적인 법설에는, '천지가 곧 부모요, 부모가 곧 천지'라는 '천지부모설'과 '사람이 곧 하늘이요, 만물도 하늘 생명이니 사람과 자연을 한울님처럼 공경하고 대하라'는 '대인접물설'이 있다. 또 세상이 크게 변할 것이라는 '개벽운수'와 제사를 지낼 때 벽을 향하지 말고 자신을 향해 지내라는 '향아설위' 등이 있다. 그리고 여성과 아이들을 한울님처럼 섬기고 공경하라는 말을 자주 했다.

해월 최시형 피체지 강원도 원주 송골마을 해월 최시형 피체지 집터 복원 건물이다. 강원도 깊은 산골마을에 피신해 있던 그런 곳보다는 현재 마을 입구는 논밭들이 어느 평범한 서정적인 시골마을처럼 안옥하게 반겨준다. 마을 왼쪽 안길로 조금 들어가다보면 오른쪽 윗쪽에 아담한 집이 한 채 나온다. 어쩜 자그마한 수도원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이곳에서 해월 최시형 선생이 관헌들에게 살벌하게 잡혀가신 곳이다. 해월 선생 유적지 중에 다시 가고 싶은 그리운 마음에 고향이 되었다.
해월 최시형 피체지강원도 원주 송골마을 해월 최시형 피체지 집터 복원 건물이다. 강원도 깊은 산골마을에 피신해 있던 그런 곳보다는 현재 마을 입구는 논밭들이 어느 평범한 서정적인 시골마을처럼 안옥하게 반겨준다. 마을 왼쪽 안길로 조금 들어가다보면 오른쪽 윗쪽에 아담한 집이 한 채 나온다. 어쩜 자그마한 수도원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이곳에서 해월 최시형 선생이 관헌들에게 살벌하게 잡혀가신 곳이다. 해월 선생 유적지 중에 다시 가고 싶은 그리운 마음에 고향이 되었다. ⓒ 동학혁명기념관
해월 최시형 피체 집터 복원 건물 내부 전경 강원도 원주 송골마을 해월 최시형 피체지 집터 복원 건물 내부 전경이다. 금방이라도 해월 스승님이 인자한 웃음을 지으시며 힘들어 하는 현대인들을 포근하게 감싸주실 것 같다. "사람이 한울이다. 사람섬기기를 한울님 같이 하라. 자연만물도 한울이다. 만물을 한울처럼 공경하고 대우해주라" 이런 말씀이 들리는 듯.. 뒤로 돌아서 가다 보면, 아예 거기서 눌러 살고 싶어진다.
해월 최시형 피체 집터 복원 건물 내부 전경강원도 원주 송골마을 해월 최시형 피체지 집터 복원 건물 내부 전경이다. 금방이라도 해월 스승님이 인자한 웃음을 지으시며 힘들어 하는 현대인들을 포근하게 감싸주실 것 같다. "사람이 한울이다. 사람섬기기를 한울님 같이 하라. 자연만물도 한울이다. 만물을 한울처럼 공경하고 대우해주라" 이런 말씀이 들리는 듯.. 뒤로 돌아서 가다 보면, 아예 거기서 눌러 살고 싶어진다. ⓒ 동학혁명기념관

해월 최시형 선생 피체되다

해월 최시형 선생은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며 '천명이 가까워진다'는 말과 함께 손병희에게 동학의 종통(3세 교주)을 넘겼다. 선생은 일본군과 관군의 수년에 걸친 추적 끝에 결국 원주 송골에서 피체되었다. 그날은 1898년 4월 5일(음) 수운 대선생 득도기념일로, 해월 선생은 청수를 모시고 조용히 기도하면서 주문을 읊고 있었다. 손병희 등 동학 지도부에게 '이번 향례는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지내라' 하고 제자들을 떠나보낸 후였다. 해월 선생은 기다렸다는 듯이 전혀 반항하지 않고 체포에 응하였다.

해월 선생은 4월 6일 새벽에 여주 문막에서 배편으로 한양에 압송되었다. 즉시 광화문 경무청에 구금되어 10일 동안 조사를 받고 서소문 감옥으로 옮겨졌다. 72세 노구인 해월 선생은 병까지 겹쳐 혹독한 감옥 생활을 했다. 서소문에서 평리원까지 재판을 받으러 목에 큰칼을 차고 10여 차례 내왕하는 심한 고초를 겪었다. 해월 선생의 제자 이종훈 대접주가 평민으로 변장을 하고 옥바라지를 신청하여 스승을 만나 뼈가 저리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심경으로 통곡하였다.

원주 송골 마을 전경(해월신사 최시형 피체지) 해월 최시형 선생은 1898년 4월 5일(음) 수운 최세우 선생 득도기념일에 원주 송골에서 피체되었다. 송골마을 앞 도로가에 세워진 비문에 '모든 이웃의 벗 최보따리 선생님을 기리며'가 참으로 인상적이다. 이 한마디가 해월 선생의 거룩한 삶을 함축적으로 담은 것 같다. 이 사진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원주 송골 마을 전경(해월신사 최시형 피체지)해월 최시형 선생은 1898년 4월 5일(음) 수운 최세우 선생 득도기념일에 원주 송골에서 피체되었다. 송골마을 앞 도로가에 세워진 비문에 '모든 이웃의 벗 최보따리 선생님을 기리며'가 참으로 인상적이다. 이 한마디가 해월 선생의 거룩한 삶을 함축적으로 담은 것 같다. 이 사진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밥이 하늘이다

해월 선생이 이종훈에게 죽음이 곧 닥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면서 몇 말씀 부탁을 하였다. '쌀을 몇 말 구해 떡으로 해 오시게. 이곳에 있는 모두가 배고픈 사람들이니 그 어떤 죄를 묻지 말고 떡을 골고루 나눠주시게나'라고 하였다. 도대체 떡이 무엇이기에 죽음의 순간에도 떡 이야기를 하셨을까. 동학에서는 '밥이 곧 하늘'이라는 수운 선생 때부터 밥 사상이 전해오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면 밥이 하늘이지 무엇이 하늘이겠는가.

이종훈이 해월 선생의 말씀을 전하고 떡을 골고루 나눠주었다.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모두 해월 선생께 큰절을 하고, 허기진 배를 채우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해월 선생도 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사람이 배고픈 것은 한울님이 배고픈 것이라. 사람 한울님이 굶주리지 않는 세상을 보고 싶네'라고 말씀하였다.

단성사 터(좌 포도청 터) 조선조때 정선방에 있던 죄인을 다스리던 단성사(관청터)이다. 이곳 단성사 뒷편 고등법원 감옥서에서 해월신사 최시형은 1898년 6월 1일 사형 판결 직후 6월 2일 교수형으로 순도(순국)한다.
단성사 터(좌 포도청 터)조선조때 정선방에 있던 죄인을 다스리던 단성사(관청터)이다. 이곳 단성사 뒷편 고등법원 감옥서에서 해월신사 최시형은 1898년 6월 1일 사형 판결 직후 6월 2일 교수형으로 순도(순국)한다. ⓒ 동학혁명기념관

최시형 사형, 조병갑이 판사로 등장

해월 선생의 재판은 일본 측의 삼엄한 감시하에 고등재판소에서 이뤄졌으며, 검사 윤성보와 태명식, 검사시보 김낙헌, 재판장은 조병직, 판사에는 '조병갑'과 주석면, 예비 판사에는 권재운과 김탁, 주사에 김하건이 참여하였다. 고부군수였던 조병갑이 판결하고, 조병직이 평결하여, 1898년 5월 30일(음) 해월 선생에게 '혹세무민과 좌도난정'이라는 죄명으로 교수형이 내려졌다.

해월 최시형 선생의 사형은 6월 1일 의정부 찬정대신이 임금에게 재판 결과를 상주하였고, 조정으로부터 곧바로 형 집행 승낙이 떨어졌다. 해월 선생은 1898년 6월 2일 정오에 서소문 감옥에서 육군법원(전 좌포청)으로 이송된 후, 오후 5시경에 교수형으로 일생 동안 사인여천(事人如天)을 실천한 거룩한 성자의 삶을 마감하고 순도순국하였다.

최시형 순교터 ' 동학 제2세 교조 해월 최시형이 동학혁명을 지도하다가 순교(1898)한 터'라고 비문에 써있다. 이곳은 단성사 터(좌 포도청 터)로서 조선조때 정선방에 있던 죄인을 다스리던 관청터이다. 이곳 단성사 뒷편 고등법원 감옥서에서 해월신사 최시형은 1898년 6월 1일 사형 판결 직후 6월 2일 교수형으로 순도(순국)한다
최시형 순교터 '동학 제2세 교조 해월 최시형이 동학혁명을 지도하다가 순교(1898)한 터'라고 비문에 써있다. 이곳은 단성사 터(좌 포도청 터)로서 조선조때 정선방에 있던 죄인을 다스리던 관청터이다. 이곳 단성사 뒷편 고등법원 감옥서에서 해월신사 최시형은 1898년 6월 1일 사형 판결 직후 6월 2일 교수형으로 순도(순국)한다 ⓒ 동학혁명기념관

해월 스승 대신 죽으려고 한사람

해월 최시형 선생이 피체되기 전, 김낙철 대접주는 스스로 해월 최시형이라 자백하여 대신 죽으려고 하였다. 김낙철은 숱한 고문을 당하면서 끝까지 자신이 최시형 법헌이라 주장했다가 해월 선생이 피체되자 풀려났다.

해월 선생은 교형을 받기 전에 '나 죽은 후 서울 장안에 큰 교당을 짓고, 주문 소리가 하늘에 사무칠 날이 올 것이라'는 말씀을 남겼다. 선생의 예언대로 과연 서울 장안인 종로 중심에 1921년 동학·천도교의 큰 교당(천도교중앙대교당)이 들어서게 되었고, 전국의 수백 개 교구와 교당에서 수백만 명의 주문 소리가 땅에서 하늘까지 울려 퍼지게 되었다.

<최시형 재판 기록>

「고종실록 37권, 고종 35년 7월 18일(양력) 2번째 기사, 1898년 대한 광무(光武) 2년, 최시형을 교형(絞刑)에 처하도록 하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조병직(趙秉稷)이 아뢰기를, "방금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의 문의서를 보았습니다."

<판결 선고서(判決宣告書)>
『피고 최시형(崔時亨)의 공초에, 「병인년(1866)에 간성(杆城)에 사는 필묵(筆墨) 상인 박춘서(朴春瑞)에게 동학(東學)의 착하고 바른 도리와 병을 치료하는 주문(呪文)을 받아서 여러 고을과 행정구역을 두루 돌아다녔다.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13자의 주문과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8자의 강신문(降神文)과 동학의 원문인 제1편 〈포덕문(布德文)〉, 제2편 〈동학론(東學論)〉, 제3편 〈수덕문(修德文)〉, 제4편 〈불연기연문(不然其然文)〉과 궁궁(弓弓)과 을을(乙乙) 자를 새긴 부적으로써 백성들을 현혹시켰으며 동학의 도당(徒黨_무리들)을 체결하였다.

또 형벌을 받아 죽음을 당한 최제우(崔濟愚)의 「만년토록 뻗어 있는 가지에 천 송이의 꽃이 피고 사해(四海)의 구름 속에 달이 한 번 비친다.〔萬年枝上花千朶 四海雲中月一鑑〕」는 시구를 숭상하고 사모하여 법형(法兄), 법제(法弟)의 칭호를 법헌(法軒)이라는 칭호로 바꾸어서 불렀으며, 해월(海月)이라는 인장(印章)을 새겼고 교장(敎長), 교수(敎授), 집강(執綱), 도집(都執), 대정(大正), 중정(中正) 등의 두목에게 각 지방을 맡겨 두었다.

또한 취회·민회를 설치하였는데 모인 무리들이 수천수만 명을 헤아릴 정도였으며 최제우의 원통함을 푼다고 하였다. 지난 계사년(1893)에 그 스승과 제자 수천 명과 함께 대궐에 나아가 상소하고 곧바로 해산하였으며, 또 보은(報恩)의 포장회 안에 많은 무리들이 모였을 때는 순무사(巡撫使)가 임금의 훈유를 백성에게 알려, 각각 스스로 흩어져 갔다.

갑오년(1894) 봄에 피고 전봉준(全琫準)과 손화중(孫化中) 등은 고부(古阜) 지방에서 패거리들을 불러 모아서 기회를 틈타서 관리를 살해하고 성진(城鎭_성을 지킴)을 함락시키는 바람에 호서(湖西)와 호남(湖南) 지방이 결딴이 나고 뒤흔들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하였습니다. 피고가 이때 호응하고 지휘한 게 없다고 하지만 그 변란이 일어나게 된 근원을 따져 보면 피고가 주문(呪文)과 부적(符籍_영부)으로 백성들을 현혹시킨 데 있다.』

「광무(光武) 2년(1898년) 7월 18일(양력)에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검사(檢事) 윤성보(尹性普)와 태명식(太明軾) 및 검사시보(檢事試補) 김낙헌(金洛憲)이 입회(立會), 참관하였다.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재판장(裁判長) 조병직(趙秉稷)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판사(判事) 주석면(朱錫冕)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판사(判事) 조병갑(趙秉甲)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예비판사(豫備判事) 권재운(權在運)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예비판사(豫備判事) 김택(金澤)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주사(主事) 김하건(金夏鍵)」

"피고 최시형은 《대명률(大明律)》 〈제사편(祭祀編)금지사무사술조(禁止師巫邪術條)〉의 일체 유학에 어긋나는 도리 좌도(左道)로써 바른 도를 어지럽히는 술책과 혹은 도상(圖像_종교·신화적 인물 또는 사물의 그림)을 숨겨놓고 향을 피워 사람들을 모으고 밤에 모였다가 새벽에 흩어지며 거짓으로 착한 일을 닦는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데에서 우두머리가 된 자에 대한 형률에 비추어 교형(絞刑, 교수형)에 처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해당 범인 최시형을 원래 의율(擬律_법을 사건에 적용함)한 대로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조선왕조실록 국편영인본 41책 37권 42장 A면>

조작된 엉터리의 판결문

해월 최시형 선생의 재판과정과 판결 선고서를 보면 수운 최제우 선생의 재판과정이 생각난다. 이들은 결과를 미리 정해놓고 판결을 선고했으며, 동학의 위대한 사상과 항일의병전쟁을 총지휘한 역사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다. 지극한 평민으로 출발하여 민족과 인류의 큰 스승이 되신 해월 선생은 이렇게 형편없는 재판이었지만 또한 거룩한 순도와 순국의 희생을 당하였다.

특히 1차 동학농민혁명의 발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탐관오리의 대명사 고부군수 조병갑이 고등재판소 판사의 자격으로 동학의 최고 지도자 해월선생에게 사형판결을 내린 사실에 아연실색(啞然失色)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왕조의 멸망이 일본의 침략에 의한 결과라 하지만, 이렇게 탐관오리들을 재 등용시키는 등 민심이반과 매관매직의 망국적 현상도 한몫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해월 최시형 선생은 6월 1일(음력) 사형 선고 후 6월 2일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유해는 4일간 방치되었고 광화문 밖 공동묘지에 임시 매장되었다. 그 뒤 해월 선생 제자 이종훈(훗날 독립선언 민족대표) 등이 빗물과 눈물이 범벅되는 척박한 날씨에 입을 악물고 통곡도 삼키면서, 경기도 송파의 한 동학도인집의 뒷산에 매장하였다. 그후 1900년 5월 1일 경기도 여주(여주군 금산면 주록리) 원적산 천덕봉 아래 산마루로 이장하였으며, 해월 선생은 1907년 고종에 의해 억울한 누명이 신원되었다.

해월신사 최시형 묘 경기도 여주(여주군 금산면 주록리) 원적산 천덕봉 아래 산마루에 '해월신사 최시형 묘'가 있다. 이 사진은 천도교 종학대학원 부산분원에서 해월신사 묘소 참배 후 기념촬영을 하였다. 기념촬영 플랑에 '땅울 소중히 여기기를 어머님의 살같이 하라'가 현재 자연환경의 문제점을 해결해줄 성인의 말씀으로 다가온다.
해월신사 최시형 묘경기도 여주(여주군 금산면 주록리) 원적산 천덕봉 아래 산마루에 '해월신사 최시형 묘'가 있다. 이 사진은 천도교 종학대학원 부산분원에서 해월신사 묘소 참배 후 기념촬영을 하였다. 기념촬영 플랑에 '땅울 소중히 여기기를 어머님의 살같이 하라'가 현재 자연환경의 문제점을 해결해줄 성인의 말씀으로 다가온다. ⓒ 천도교종학대학원부산분원

천덕산 자락에 편안히 잠들다

해월 선생의 묘소는 천덕산 자락 탁 트인 산마루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아래 부인 손시화(의암 손병희 선생 동생)의 묘가 있다. 평생 동안 고비원주(高飛遠走)·풍찬노숙(風餐露宿)으로 온갖 시련과 고생을 하였던 해월 선생은 세상을 하직한 뒤 그나마 안전한 곳에서 편히 쉬고 계셔서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해월 선생이 묻힌 그 산마루 바로 아래쪽부터 샘솟는 물이 개울을 이루며 청정계곡에 이르는, 천덕산 자락의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풍경, 그 누가 봐도 명산에 자리한 명당으로 느껴진다.

*동학, 그 불멸의 정신

동학농민혁명·동학의병전쟁에 참여한 수십만, 또 수만 명의 순국선열들의 희생정신은 항일의병전쟁이었다. 동학 2차 기포 뒤 살아남아 쫓기던 동학군들은 지리산, 회문산 등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백두대간을 근간으로 하여 만주에까지 넘어가는 등 국내외의 끊임없는 항일 무장투쟁으로 연결되었다. 조선은 결국 갑오년 동학의병전쟁의 좌절로 일제에 경술국치(1910)를 당하고 국권을 상실하였다.

해월 최시형 선생이 뿌려 놓은 포덕의 씨앗들이 자라나 손병희, 박인호 선생의 지도로 다시 제2동학혁명인 3·1운동이 일어났다. 천도교·기독교·불교 종단이 연대하여 기미년(1919) 3월 1일부터 전국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동학 천도교에서는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며 방정환 선생을 중심으로 어린이날을 제정하여 어린이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물론 학생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신문화운동, 출판운동 등을 펼쳐 동학농민혁명을 계승하였다. 특히 6·10만세운동, 무인멸왜기도운동 등의 끊임없는 민족운동, 독립운동의 정신을 이어 갔다. 1945년 해방 후 1948년에는, 동학혁명과 3·1운동 정신 그리고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동학혁명 정신은 끊임없이 계승되고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은 면면히 계승되어 해방 후에는 남북분단을 저지하는 통일정부 수립 운동과 독재와 부정선거에 항거한 4·19민주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등 자주·민주·통일운동으로 승화되었다.

그리고 2016~2017년으로 연결되는 국정농단 규탄 촛불집회 역시 그 역사적 기원은 1892~1893년에 걸쳐 일어났던 동학의 비폭력 평화 집회와 3·1독립만세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 정신은 남북 평화통일은 물론 지구촌의 생명·평화·상생·공존으로 계승될 것이다. 또한 민족과 인류의 미래를 밝혀 줄 위대한 정신과 사상, 실천 운동으로서 끊임없이 계승될 것이다.

동학혁명은 현재도 진행중이다.

- 계속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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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영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장」,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 평화민족통일원탁회의 공동의장,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문위원, 또 현(現)천도교선도사·직접도훈, 전(前)전주녹색연합 공동대표, 전(前)전주민예총 고문, 전(前)세계종교평화협의회 이사 등 종교·환경단체에서 임원을 엮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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