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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당산 동학혁명군 위령탑 제막식 경상 남서부 동학군 5천명은 10월 14일 아침에 일본군 180명과 고승당산 일대에서 격전을 벌였다. 전투 반나절 만에 일본군의 월등한 화력에 밀려 많은 희생자가 속출하자 덕산쪽으로 물러났다. 고승당산 위령탑은 동학혁명 100주년(1994년)을 맞아 천도교 중앙총부의 주도로 추진해 이듬해 3월 건립, 매년 이곳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이 사진은 삼암 표영삼 선생께서 고승당산 위령탑 제막식에 참여, 직접 촬영한 소중한 기록사으로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했다.
고승당산 동학혁명군 위령탑 제막식경상 남서부 동학군 5천명은 10월 14일 아침에 일본군 180명과 고승당산 일대에서 격전을 벌였다. 전투 반나절 만에 일본군의 월등한 화력에 밀려 많은 희생자가 속출하자 덕산쪽으로 물러났다. 고승당산 위령탑은 동학혁명 100주년(1994년)을 맞아 천도교 중앙총부의 주도로 추진해 이듬해 3월 건립, 매년 이곳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이 사진은 삼암 표영삼 선생께서 고승당산 위령탑 제막식에 참여, 직접 촬영한 소중한 기록사으로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했다. ⓒ 동학혁명기념관

*경상도 지역의 기포와 항쟁

지금부터 전국 각 지역에서 기포한 내용을 중요부분만 요약하여 밝히겠다. 우리나라에서 동학하면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고부, 무장, 백산 등 전라지역을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동학사상의 태동지 즉 동학이 창도된 곳이 바로 경주였음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사상이나 문화는 한번 접하면 금세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비록 토착화되지 않더라도, 그 영향은 생활 속에 스며들어 있기 마련이다.

동학군, 항일 진주 대집회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김인배와 손은석은 호남과 영남이 연대하기로 했다. 손은석 대접주는 9월 2일 진주 지역 73개 리에 통문을 보내 8일 '동학의병진주대회'에 참석하라고 하였다. 9월 8일(양10.6) 진주대집회를 마치고, 손은석과 김인배의 동학군은 곳곳에 방문을 붙였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동토(東土)의 의사(義士)들이여, 피를 뿌리며 분개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가. 우리 동학도인들은 함께 죽기로 맹세하고 큰 분노를 일으켜 왜적의 세력을 없애고 그 남은 무리들을 초토(剿討)할 뜻으로 진주에서 대집회를 가졌다. 이는 그들을 아주 없애는 데 뜻이 있는 것이다.』

이필제의 동학혁명운동 좌절

경상도는 수운 최제우 대선생(대신사)이 경주를 중심으로 동학을 창도하고 포덕을 시작한 곳이지만, 수운 선생 순도 이후 급격히 교세가 위축되었다. 수운 최제우 대선생을 이은 해월 최시형 선생은 경상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동학의 교세를 회복해 나갔다. 그러나 1871년 이필제를 중심으로 해월 선생과 많은 접주들이 참여한 영해교조신원운동 즉 영해동학혁명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며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동학군 매장터 하동 약천사터 일본군이 고성산에서 학살한 동학군 100여명을 매장한 하동 약천사터이다. 이 사진은 삼암 표영삼 선생(동학혁명백주기념관 초대관장)께서 전주 동학혁명(백주년)기념관에 전시했었다.
동학군 매장터 하동 약천사터일본군이 고성산에서 학살한 동학군 100여명을 매장한 하동 약천사터이다. 이 사진은 삼암 표영삼 선생(동학혁명백주기념관 초대관장)께서 전주 동학혁명(백주년)기념관에 전시했었다. ⓒ 동학혁명기념관

동학군, 진주와 고성 등지에서 항쟁

영해동학혁명운동 이후 해월 최시형 선생의 노력으로 동학교세가 회복되면서 동학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수많은 지역에서 기포와 투쟁이 일어났으나 대표적으로 진주와 고성의 의병기포에 대한 짧은 설명을 하겠다. 경상도 곤양의 동학군이 고성의 동학군이 읍내를 점거하였다. 동학군들이 진주성을 점령하고 모여드니 총결집 인원이 5천여 명에 달하였다. 이들은 진주 인근 고성·사천·곤양·단성·합천 등을 오가며 이 지역을 9월 말까지 평정하였고, 동학군 수는 갈수록 불어났다.

경상도 남서부 지역 동학군은 부산에서 출병한 일본군과 대구 판관 이석영의 관군을 상대로 10월 10일(양11.7)부터 두 번에 걸쳐 진주 일대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전하였다. 다시 진주 수곡면에 집결한 동학군은 10월 14일 고성산에서 일본군에 맞서 사생결단으로 항전했으나,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내고 패하였다.

*강원도 지역의 기포와 항쟁

강원도 지역의 동학 기포와 항쟁은 그 뿌리부터가 깊고 역할 또한 만만치 않다. 동학경전을 출간한 역사에서는 1880년 인제 갑둔리에서 『동경대전』을 간행하고, 이듬해 1881년 인제 천동에서 『용담유사』를 간행하였다.

동경대전(東經大全) 이 사진의 동경대전은 1883년에 펴낸 동경대전(東經大全) 계미중하판(목판본)이다. 동경대전 원본은 현재 천도교중앙총부에 소장되어있다.
동경대전(東經大全)이 사진의 동경대전은 1883년에 펴낸 동경대전(東經大全) 계미중하판(목판본)이다. 동경대전 원본은 현재 천도교중앙총부에 소장되어있다. ⓒ 천도교중앙총부
동경대전(東經大全) 이 사진의 동경대전은 1883년에 펴낸 동경대전(東經大全) 계미중하판(목판본) 첫장 목록(目錄)이다. 동경대전 원본은 현재 천도교중앙총부에 소장되어있다.
동경대전(東經大全)이 사진의 동경대전은 1883년에 펴낸 동경대전(東經大全) 계미중하판(목판본) 첫장 목록(目錄)이다. 동경대전 원본은 현재 천도교중앙총부에 소장되어있다. ⓒ 천도교중앙총부

용담유사(龍潭遺詞) 이 사진의 용담유사는 1893년에 펴낸 용담유사(龍潭遺詞) 계사판(목판본)이다. 용담유사 원본은 현재 천도교중앙총부에 소장되어있다.
용담유사(龍潭遺詞)이 사진의 용담유사는 1893년에 펴낸 용담유사(龍潭遺詞) 계사판(목판본)이다. 용담유사 원본은 현재 천도교중앙총부에 소장되어있다. ⓒ 천도교중앙총부
용담유사(龍潭遺詞) 이 사진의 용담유사는 1893년에 펴낸 용담유사(龍潭遺詞) 계사판(목판본)내용중, '흥비가' 마무리 문장(무궁한 이울속에 무궁한 내아닌가)이다. 용담유사 원본은 현재 천도교중앙총부에 소장되어있다.
용담유사(龍潭遺詞)이 사진의 용담유사는 1893년에 펴낸 용담유사(龍潭遺詞) 계사판(목판본)내용중, '흥비가' 마무리 문장(무궁한 이울속에 무궁한 내아닌가)이다. 용담유사 원본은 현재 천도교중앙총부에 소장되어있다. ⓒ 천도교중앙총부

동학군, 강릉대도호부 점령

강원도에서 동학기포는 크게 두 세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영월·평창·정선·원주 등 남서부 지역의 동학군과 충청도 제천·청주 등지의 동학군과 연계되는 곳이다. 갑오년 9월 초 강원도 수천의 무리를 이룬 뒤 강릉대도호부를 일거에 점령하는 등 동학농민혁명과 동학의병전쟁에도 큰 역할을 했다.

강원도 지역의 동학 기포는 동학 초기 역사와 연결된다. 수운 최제우 선생과 함께 체포된 이경화가 1864년 영월로 유배되면서, 소밀원을 중심으로 동학을 포덕해 나갔다. 또 해월 최시형 선생을 중심으로 1870년대 후반 영월·정선 등지에서 교단의 위기를 극복하며 포덕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강원도 평창 동학유적지 강릉 관원이 동학도를 탄압하자 성두환 대접주는 평창, 제천, 충주, 청풍 동학도 천여 명을 평창에 모아 (1894년) 9월 4일 강릉을 점령하고 폐정개혁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원회의 역습으로 강릉에서 철수하였다. 이 사진은 삼암 표영삼 선생께서 1994년 동학혁명1백주년 쯤 평창유적지를 촬영하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했다.
강원도 평창 동학유적지강릉 관원이 동학도를 탄압하자 성두환 대접주는 평창, 제천, 충주, 청풍 동학도 천여 명을 평창에 모아 (1894년) 9월 4일 강릉을 점령하고 폐정개혁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원회의 역습으로 강릉에서 철수하였다. 이 사진은 삼암 표영삼 선생께서 1994년 동학혁명1백주년 쯤 평창유적지를 촬영하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했다. ⓒ 동학혁명기념관

일본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

강원도 동학군은 1893년 보은취회에 적극 참여하였고, 1894년 8월부터 11월까지 동학 기포에 참여하였다. 또한 동학 교단 조직을 배경으로 성두환 대접주와 연계하여 손병희 통령의 동학군과 합류하려다 실패하였으나, 일부 동학군은 공주 우금티전투에 참여하였다.

강원도 지역의 북접 동학군은 백성들의 정당한 소송들을 신속하게 처리하여 남접 동학군 못지않게 폐정개혁안을 강력하게 실천했다. 그러나 9월 7일(양10.5)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관군과 민보군의 습격을 받아 수십 명의 희생자를 내고 대관령을 넘어 평창으로 퇴각했다.

동학군은 재집결하여 평창·영월·정선 등의 대관령 남부 지역을 다시 장악하면서 강릉대도호부를 공격하였다. 이렇게 동학군이 끈질기게 공격하자, 11월 4일 일본군 1개 중대와 관군이 동학군을 집중 공격하여 1백여 명의 희생자를 냄으로써 결국 강원도 남서부 지역의 동학군은 무너졌다.

동학군, 자작고개에서 1천여 명 희생

특히 차기석의 동학의병군은 10월 21일(양11.18) 홍천 장야촌에서 선공감 맹영재가 이끄는 민보군을 맞이하여 전투를 벌였으나 패전하고 서석면 자작고개로 퇴각했다. 이들은 자작고개에서 22일에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관군과 다시 싸웠으나, 1천여 명의 큰 희생자를 내고 패전하였다. 동학군은 11월 11일에 봉평·내면까지 후퇴하여 일본군과 14일까지 치열한 접전을 벌였지만 크게 패하여 강원도 지역의 최후 항쟁을 마감하였다.

*경기도 지역의 기포와 항쟁

경기도 지역의 동학을 말할 때 필자는 제일 먼저 안교선을 말한다. 동학혁명지도자 안교선 접주. 그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전해오지 않는다. 다만 평생 잊지 못할 충격적인 기억이 하나 있다.

영국 여류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이 목격했다는, 일본 사진작가 무라카미 코지로가 촬영한 사진 한 장. 이 사진은 1895년 2월 8일자 '메사마시'신문에 보도되었고 세상은 깜짝 놀랐다. 그 사진은 참형으로 처형된 동학접주 안교선과 최재호의 수급을 효시한 장면이었다.

훗날 우리들은 그 사진 한 장을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무서움에 떨어야 했고, 어떤 사람들은 주먹을 불끈 쥐면서 분노에 떨어야 했다. 무라카미는 또 다른 인물도 렌즈에 담았다. 바로 전봉준 장군의 마지막 모습! 즉 들것에 실려 가는 강렬한 눈빛의 사진 한 장, 그 전봉준의 눈빛은 오늘도 형형히 우리를 쏘아보고 있지 않은가!

경기지역 광범위한 동학세력

경기 지역의 동학 활동은 1880년대 초반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갑오동학혁명 때 지도자로 적극 활동한 경기도의 안교선을 중심으로 안교백, 안교강 등은 해월 최시형 선생의 지도를 받으면서 동학을 널리 전파하였고, 또 그의 영향으로 안승관, 김내현 등이 수원의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경기 지역 지도자들은 손병희, 박인호 등과 밀접하게 지내면서 공주, 광화문 교조신원운동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특히 1893년 광화문 복합상소 집회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그 후 1894년 해월 선생의 9월 기포에 손병희 대통령의 충청도 세력과 합류하여 항일전에 적극 나섰다.

갑오년 당시 경기도 지역의 동학의병군은 9월 초부터 죽산·안성·용인·직곡·금량·음죽·이천 등지에서 기포하여 일본군과 관군을 공략하면서 큰 세력으로 성장해 나갔다. 하지만 9월 20일, 경기 지역 동학군 수천 명은 이두황 부대의 기습을 받고 2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해산을 했다.

일본군의 공격으로 심한 타격

경기도 동학군은 9월 25일(양10.23) 다시 음죽관아를 포위 점령하고 무기와 물건 등을 탈취했다. 그러나 이천 지역 동학군은 27일 일본군 병참소 병력의 공격을 받아 30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지도급 10여 명이 즉결 처형을 당했다.

한양과 인접한 경기도 지역의 동학의병군은 일본군과 이두황 경군의 표적이 되어 집중 공격을 당하면서 충청도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경기도 안성·이천의 동학군 수만 명이 재결집하여 충청도 진천을 점령하였고 관사와 관속을 포박하고 무기고를 부수어 군기를 탈취하는 등 그 여세가 꺾이지 않았다.

*황해도 지역 기포와 항쟁

황해도 지역 동학을 말한다면 단연코 약관의 나이 18세에 동학 장수인 두령의 위치에 오른 김구(김창수) 선생이 떠오를 것이다. 김구 선생은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엄청난 인물로 성장하였기에 당시 그 역할과 비중을 찾아내어 제대로 된 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동학군, 민권에 의한 혁명자치

전라도에서 전주성을 점령한 완산전투 후 전주화약과 집강소 통치라는 민관상화의 협치가 이루어진 반면, 황해도 동학군이 9월에 본격적으로 기포하여 10월 초에 해주성을 점령했을 때는 민관화약이나 집강소 협약이 없었다.

그러나 황해도 동학군은 전라도에서 민관이 협약한 12개조, 27개조 폐정개혁안을 그대로 받아들여 황해도 전역에 혁명자치를 실시하여 황해도민 대다수가 동학의 새로운 물결을 체감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접한 일본군과 관군은 크게 당황하여 이들을 본격적으로 진압하고 토벌하기 위해 나섰다.

동학군 유적지 황해도 해주성 김구(김창수) 장군이 동학군을 이끌고 점령했던 황해도 해주성 전경이다. 이 사진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동학군 유적지 황해도 해주성김구(김창수) 장군이 동학군을 이끌고 점령했던 황해도 해주성 전경이다. 이 사진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동학군, 황해도 해주성 점령

갑오년 당시 황해도 지역에서는 9월부터 본격적으로 기포하여, 10월 6일(양11.3) 동학의병군 수만 명이 황해도 감영 부근 해주의 취야장터에 집결하여 동학군 폐정개혁안을 제출하고 일단 물러났다. 해주성에서 반응이 없자, 임종현과 김구는 동학군을 두 부대로 나누어 재집결해서 강령현에 쳐들어가 무기를 탈취해 무장을 강화했다. 이후 치밀한 작전과 치열한 전투 끝에 해주성을 점령했다.

감영을 함락한 동학군은 관청 일부를 박살냈으며, 감영 무기고를 헐었다. 또 빼앗은 문서를 불태우고, 판관 등 고위직 관료들을 체포하고, 협조하지 않는 관료들을 처결하는 등 동학군의 막강한 위력을 과시했다. 해주성을 점령한 동학군은 한 달여간 머물다가 11월(양12) 초순경에 물러났다.

동학군, 민권자치와 공화주의

황해도 해주성 점령 이후 체포된 동학군 지도부에서 압수한 문건 중에 황해도 감찰사와 각 고을의 수령, 판관, 방백 등을 정해 놓은 내용의 문건이 있었다. 이는 동학군이 관군과 협상하지 않고 황해감사와 관료들을 임명하여 혁명에 의한 지방정부를 계획했다는 증거이다. 무엇보다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마저 좌절된 이후 김구(김창수)가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동학의 민권자치와 공화주의에 대한 경험이 결정적인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군은 청일전쟁에서 아주 중요한 지역인 해주와 황해도 일대를 동학군에게 빼앗길 수 없었기에, 김천과 평산을 공격하면서 11월 10일에 해주에 들어가 친일 민보군 조직인 명의소를 설치했다.

동학군, 황해도 일대 평정

한편 해주성에서 물러났던 임종현과 김구의 동학군 주력부대는 각자 역할 분담을 하여 황해도 여러 곳의 관아를 점령하고, 11월 11일에 강령현을 공격하여 일본군과 밀고 당기는 접전을 벌였다. 또 신천의 동학군은 13일에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전개했으며, 13일에 송화현·문화현·평산부·조니진·오우진·용매진 등을 점령했다.

동학군이 해주성을 비우고 지방을 평정하는 사이 일본군이 해주성에 입성하여 민보군을 조직하고 동학군에게 위협을 가했다. 동학군은 다시 황해도 감영이 있는 해주성을 공격하기로 하고 대대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임종현과 김구의 주력부대는 11월 20일(양12.17) 취야장터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11월 24일에는 재령·신천·문화·장연·용진·강령 등지에서 동학군 1만(3만의 기록도 있음)여 명이 대연합하여 11월 27일 해주성을 총공격하기로 하였다. 해주성 제2차 공격은 동학군과 일본군의 일대 접전으로 불이 붙었다.

동학군, 일본군에게 목숨을 건 항쟁

거대 중국의 청군을 일거에 괴멸시키고 조선을 넘어 청나라 본토까지 쳐들어간 세계 최강의 일본군과 신식 무기 앞에서 수많은 동학군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갔다. 임종현 의병장과 김구 장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후퇴를 명령했다. 정신없이 멀리 도망쳐 나온 동학군은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도 없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각 지역으로 돌아간 동학의병군은 이듬해 1월까지 목숨을 건 항일 투쟁을 산발적으로 이어 갔다.

*일본군의 동학의병군 섬멸 작전

「일본이라는 나라, 이웃 나라라고 하기에는 우리나라에게 너무나 많은 피해를 끼쳤다. 오늘날까지 진정한 사과와 배상도 하지 않고 다시 군국주의의 나라로 성장하고 있다. 독도를 필두로 그들이 다시 한반도를 노리는 현상도 드러나고 있다. 그것도 일본보다 더 앞장서서 식민사관을 홍보하는 친일뉴라이트 인사들의 언행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밀정은 숨어서 암약하는 것인데, 이제 드러내놓고 밀정 노릇을 하는 반민족 친일인 사들이 활개치고 있다. 이들이 동학의병들의 역사를 조금만 알아도 부끄러움에 숨어들어야 할 것이다.」

일본군, 동학군은 조선식민지화에 큰 장애

을미년(1895) 초에 접어들면서 동학의병군의 조직적인 항쟁은 좌절되고, 일본군과 관군에 의한 동학군 섬멸 작전이 극에 달했다. 일본군과 그 예하 부대인 관군들은 물론 향촌 유림을 중심으로 조직된 민보군들에 의해 대대적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조선 전역에서 동학의병 잔여 세력을 소탕해 재기할 수 없게 하려고 동학군을 도왔거나 동학군이 주둔하고 지나간 일대의 주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이렇게 잔혹한 살육을 저지른 것은 동학을 뿌리 뽑지 않으면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데 큰 장애가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일본군, 짐승을 사냥하듯이 포위섬멸작전

일본군과 관군은 그동안의 첩보와 정보에 의해, 동학군의 기포 지역들과 주둔지 및 진격로를 정확히 파악하여 섬멸 작전에 들어갔다. 특히 동학군 잔여 세력들의 고향은 물론 숨을 만한 곳들은 짐승을 사냥하듯이 포위하여 섬멸 작전을 폈다. 남북접 동학의병군 전체 동원된 수가 최소 30여만 명이다. 그리고 1년여의 혁명과 전쟁의 과정, 수개월의 섬멸작전 기간에 희생된 동학군 수는 최소 3만여 명에서 5만 명에 이른다.

일본군은 희생자들을 바다로 몰아 수몰시키기도 했고, 개인과 집단을 가리지 않고 산 채로 화형식을 자행하기도 했다. 또한 일본군들에게 살인 연습을 시킨다거나, 마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드는 등 천인공노할 만행들을 서슴지 않았다. 일본군의 잔혹한 학살은 전국에 걸쳐 자행되었지만, 그 정도를 보면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 순으로 심했다.

일본군의 사격 모습 이 사진은 청일전쟁사진첩에 나오는 일본군 사격 모습으로,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했었다.
일본군의 사격 모습이 사진은 청일전쟁사진첩에 나오는 일본군 사격 모습으로,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했었다. ⓒ 동학혁명기념관

*일본군의 행위는 학살이나 다름없다

「사람이 너무 힘들고 슬프면 눈물도 나오지 않는 법이다. 일제의 동학의병 섬멸작전 즉 초토화 작전은 동학을, 뿌리까지 완전히 태워 다시는 싹트지 못하게 하려는 민족말살 살인병기들이었다. 남의 땅에 와서 만행을 저지르는 일본군도 그렇지만, 같은 민족인 조선군이나 일본군에 적극 협조했던 이들은 도대체 어떤 인간들이었을까? 무능한 조선정부는 도대체 무얼 하고 있었던가?」

일본군, 집단학살 자행

일본군과 관군연합군의 동학의병군 섬멸 작전이 끝나고, 그들이 물러간 자리는 가족들의 울부짖음으로 통곡의 눈물바다가 되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며 숨죽여 기다리던 동학군의 가족들은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 나섰으나 어디에 버려졌는지조차 알 수가 없어 여기저기 집단 매장지를 찾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목 놓아 울 뿐이었다.

동학의병군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동학군이 지나간 마을이나 근처에 사는 사람들도 단지 협조했다는 이유로 집단적으로 학살당하기도 했다. 하루 이틀도 아닌, 그 숱한 시간들을 백성들은 어떻게 견뎌야 했을까?

일본군의 학살, 제노사이드가 생각난다.

국민, 인종, 민족, 종교 따위의 차이로 집단을 박해하고 살해하는 행위를 제노사이드(genocide)라 한다. '제노사이드 협약'이라는 국제기구가 있는데, 이는 1948년에야 만들어졌다. 그 당시엔 이런 기구도 조약도 없었다.

제노사이드를 말할 때 흔히 나치의 유대인 학살, 튀르키에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세르비아의 코소보 알바니아계 학살, 그리고 일본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등을 떠올린다.

그렇다면, 동학의병군에 가담하지 않았어도 그 가족이나 마을 사람들을 하루에 수십 명씩 죽이는 행위 또한 제노사이드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참으로 부끄럽고 슬픈 역사이다. 다시는 이런 역사가 되풀이되어선 안 된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


#동학#천도교#동학혁명#동학농민혁명130주년#수운최제우선생탄신2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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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영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장」,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 평화민족통일원탁회의 공동의장,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문위원, 또 현(現)천도교선도사·직접도훈, 전(前)전주녹색연합 공동대표, 전(前)전주민예총 고문, 전(前)세계종교평화협의회 이사 등 종교·환경단체에서 임원을 엮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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