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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백화산 동학혁명 추모문화제 기념사진은 태안 백화산 갑오동학혁명추모탑에서 2022년 10월 29일 추모문화제를 개최하고 기념좔영한 사진이다. 주선원(주영채)동학농민혁명유족회 이사장, 신순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이용길 충남동학농민혁명단체협의회 회장, 문영식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 명예관장(태안유족회장), 허채봉 부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등 많은 내외귀빈이 참석하여 추모식, 문화행사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거행했다. 이날 추모문화제 행사에서 필자(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은 격려사를 했다.
태안 백화산 동학혁명 추모문화제기념사진은 태안 백화산 갑오동학혁명추모탑에서 2022년 10월 29일 추모문화제를 개최하고 기념좔영한 사진이다. 주선원(주영채)동학농민혁명유족회 이사장, 신순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이용길 충남동학농민혁명단체협의회 회장, 문영식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 명예관장(태안유족회장), 허채봉 부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등 많은 내외귀빈이 참석하여 추모식, 문화행사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거행했다. 이날 추모문화제 행사에서 필자(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은 격려사를 했다. ⓒ 태안동학농민혁명유족회

태안 최후 항쟁, 도살장을 방불할 정도로 처참했다

「아래 글은 문영식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 명예관장(태안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의 증언과 설명을 토대로 이야기를 전개한 것이다. 동학의병전쟁 당시 태안읍 관아를 중심으로 북쪽에 위치한 백화산 교장바위는 선지피로 물들어 글자 그대로 시산혈해였다고 한다. 이 교장바위 부근은 마치 도살장을 방불할 정도로 처참했다고 전한다.」

태안 교장바위 추모문화제 태안 갑오동학혁명추모탑에서 희생된 갑오선열님들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문화제 행사이다. 이 사진은 문영식 태안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께서 제공하였다.
태안 교장바위 추모문화제태안 갑오동학혁명추모탑에서 희생된 갑오선열님들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문화제 행사이다. 이 사진은 문영식 태안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께서 제공하였다. ⓒ 태안동학농민혁명유족회

동학의병들이 무참하게 학살되다

태안 백화산(白華山)은 옛날부터 태안군의 진산이며 영산으로 태안팔경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이러한 곳에 비극적인 장소가 있어, 오늘에도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백화산 산기슭에 수많은 동학의병들이 무참하게 학살되어 천추의 한이 서린 유서 깊은 교장(絞杖, 목 졸려 죽고, 몽둥이에 맞아 죽음)바위가 그 현장이다.

갑오년 10월 1일 동학의병군이 태안성을 점령하고 처형 직전에 있는 동학도 30여 명을 구출하였다. 그 뒤 일본군과 관병연합군이 태안군내에 진주하여 극악무도하게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들에게 맞서고 대항하기 위해 동학의병군은 대오를 편성하고 전열을 정비하여 출전 준비를 완료하였다.

1894년 10월 15일, 동학의병군은 경이정(憬夷亭)에 모여 보국안민과 척왜창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태안에서 재 기포(起包) 즉 동학의병전쟁에 본격 나섰다. 이때 태안 10월 22일 서산시 해미에서 유진(留陣)하고 일부 병력은 작전상 그날 바로 서산시 운산면 여미벌(餘美坪)로 진군(進軍)하였다.

당진 승전곡 동학군 유적지 덕포 박인호 대접주와 예포 박희인 대접주가 인솔하는 동학의병군은 10월 24일 당진 승전곡(勝戰谷) 전투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동학의병전쟁사에서 길이 남을 대승을 거두었다.
당진 승전곡 동학군 유적지덕포 박인호 대접주와 예포 박희인 대접주가 인솔하는 동학의병군은 10월 24일 당진 승전곡(勝戰谷) 전투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동학의병전쟁사에서 길이 남을 대승을 거두었다. ⓒ 동학혁명기념관

당진 승전곡 전투에서 대승

다음날 10월 23일 덕포 박인호 대접주와 예포 박희인 대접주가 인솔하는 동학의병군에 합류하여 여미벌에서 집결하니 동학의병들의 사기가 의기충천하였다. 여기서 작전 계획을 세우고 흐트러진 전열을 재정비하고, 10월 24일 당진 승전곡(勝戰谷) 전투에서 일본군, 관군과 접전하여 동학의병전쟁사에서 길이 남을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26일에 예산군 신례원 관작리(觀爵里) 전투에서 승전하고, 27일 예산군 역촌 뒷뜰에서 하룻밤을 쉬었다.

동학의병들은 수운 최제우 선생 탄신일 10월 28일(음력)을 맞아 덕산군 역촌 뒷고개에 머물러 기도를 드리고 곧 홍주성(洪州城)으로 향하여 홍주성 공격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최신식 무기를 앞세운 일본군과 관군연합작전에 무려 1천여 명의 동학의병군이 무참히 희생되었다.

동학군, 홍주성 전투에서 대패

홍주성에서 대패한 동학의병군은 일본군과 관병연합군에 쫓기면서 11월 7일 해미성(海美城)에 입성하여 항전하다가 패주, 인근에 있는 귀밀성(貴密城)과 저루성(猪樓城)에 합류하였다. 일본군과 관군 1개 소대는 귀밀성을, 2개 소대는 저루성을 오후부터 공격하였다. 여기서도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동학농민군이 완패하고 말았다.

매현 전투에서 패하고 백화산으로 집결

다음 날인 8일 매현(梅峴)전투에서 또다시 패전하여 재기할 여력을 잃은 채 최후로 11월 11일에 백화산으로 집결하였다. 11월 16일까지 동짓달 설한풍의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 가면서도 끝까지 항전하였다. 동학의병군들은 비록 진퇴양난으로 궁지에 몰렸어도 일본군들에게 투항하지 않았다. 죽을 각오로 의연하게 끝까지 항전하다가 순국하였다.

태안 교장바위 동학혁명 추모문화제 태안 갑오동학혁명추모탑에서 희생된 갑오선열님들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문제이다. 이 사진은 문영식 태안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께서 제공하였다.
태안 교장바위 동학혁명 추모문화제태안 갑오동학혁명추모탑에서 희생된 갑오선열님들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문제이다. 이 사진은 문영식 태안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께서 제공하였다. ⓒ 태안동학농민혁명유족회

교장바위 부근, 그야말로 아비규환

특히 백화산 중턱에 있는 큰 바위에서는 동학의병군을 붙잡아다 놓고 목을 졸라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였다. 목이 잘린 시체가 쌓이거나 여기저기 흩어졌다. 일본군들은 시체를 일일이 헤쳐 보면서 혹 산 사람이 있으면 거침없이 확인사살을 하였다.
특히 교장바위는 선지피로 물들어 글자 그대로 시산혈해였다고 전한다. 이 교장바위 부근은 도살장을 방불할 정도로 처참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훗날 비극적인 이 바위를 교장바위라고 후손들은 전하고 있다. 즉 목을 졸라 죽인다는 교살(絞殺)과 몽둥이로 때려죽인다는 장살(杖殺)을 줄여서 교장(絞杖)이라 하여 이 바위를 태안 사람들은 '교장바위'라고 이름 지어 현재까지 부르고 있다.

야라무라와 사이토, 초멸작전 돌입

11월 14일(陽 12.10), 일본군 후비보병 제6연대 제6중대장 야마무라 타다마사(山村忠正산촌충정) 대위는 동학의병들의 집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현장에서 타살해 버릴 계획으로 해미를 거쳐 바로 태안 방면으로 출동하였다. 서산을 들렀다 가면 태안 동학의병군들이 기미를 차리고 도주할 염려가 있다하여 별도로 소탕조(掃蕩組)를 만들어 서산에 파견하였다.

한편 수많은 태안군의 동학도들을 뿌리를 뽑기 위하여 사이토(齋藤溫) 일본군 소위가 신무기로 무장하고서 일본군 수백 명을 데리고 홍주성에서 출발하여 태안성에 도착하였다. 눈(雪) 내리는 자정(子正)무렵, 칠흑(漆黑)같은 야간에 바닷가로 이동했던 것이다.

김용희와 김용산, 동학군 학살에 앞장

11월 15일에 조선 사람 순검(巡檢) 김용희(金龍喜), 해미 민병장(民兵將) 김용산(金龍山)이 이끄는 민병 수백 명으로 조를 이루어 서산 동학의병군 84명을 체포하여 태안으로 끌고 와서 백화산에서 잔인하게 타살 내지 총살형에 처했다. 그리고 일본군은 동학의병군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백화산을 포위하고 있는 관군과 합류하여 동학의병들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한편, 5명~10명씩 여러 조를 짜서 마을마다 출동시켜 유회군을 앞잡이로 하여 수색하게 하였다.

일본군과 관병연합군은 1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체포하였는데 이 중에는 접주 및 지도자가 30명이나 되었다. 이에 앞서 일본군과 관군은 동학도를 초멸하려면 간부급인 접주들을 체포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웠던 것이다.

태안 갑오동학혁명추모탑 동학농민혁명 추모문화제 태안 갑오동학혁명추모탑에서 희생된 갑오선열님들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문화제 행사이다. 이 사진은 문영식 태안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께서 제공하였다.
태안 갑오동학혁명추모탑 동학농민혁명 추모문화제태안 갑오동학혁명추모탑에서 희생된 갑오선열님들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문화제 행사이다. 이 사진은 문영식 태안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께서 제공하였다. ⓒ 태안동학농민혁명유족회

학살된 동학군은 제사조차 지내지 못하다

백화산에서 야음을 틈타 탈출한 동학의병군은 근흥면 수룡리 토성산(吐城山)에서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일본군과 관군은 작두로 목을 잘라 저잣거리를 행진하였다. 그리고 백화산에서 싸우던 동학의병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이 산 북서쪽 사현(砂峴_모래재)에서도 일본군의 복병(伏兵)들이 동학의병군 수백 명을 포위하여 학살하였다. 이 밖에도 태안여고, 개울, 샘골마을, 남문리 냇가, 정주내(碇舟川) 등 여러 곳에서 잔인하게 살육하고 부녀자를 겁탈하고 민가에 불을 질렀다.

아, 애석하게도 교장바위의 비극은 별다른 자체 기록이 없다. 모든 사실을 유족들과 촌로들의 구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구전조차 제대로 기록되지 못하였고, 동학의병전쟁에 가담했다가 죽은 사람에게는 제사조차 제대로 지내지 못하면서 숨기고 살아야 했던 비참한 현실이 이어졌다.

태안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전경 태안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2021년 건립한 태안 백화산 갑오동학혁명추모탑 아래에 위치한 기념관이다. 태안유족회 회장 문영식 선생이 기증한 수백개의 자료를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으며, 다양한 기념전시설과 역사문화가 어우러진 훌륭한 기념관으로 평가받고 있다.
태안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전경태안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2021년 건립한 태안 백화산 갑오동학혁명추모탑 아래에 위치한 기념관이다. 태안유족회 회장 문영식 선생이 기증한 수백개의 자료를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으며, 다양한 기념전시설과 역사문화가 어우러진 훌륭한 기념관으로 평가받고 있다. ⓒ 동학혁명기념관

순무선봉진등록에 의하면

또한 천대와 감시가 지속되어 사람들은 백화산 교장바위의 연유에 대하여 거의 함묵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동학의병군이 일본군과 관군을 상대로 백화산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하였다는 의병군 지도자 다섯 사람이 생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기록이 나왔다.

<순무선봉진등록(巡撫先鋒陣謄錄)>에 의하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12월 초 8일 서산에 머무르고 있는 순무영 선봉진 별군관이 보고한다. 이달 13일에 태안 백화산에 비류가 진을 친 일을 달려가 보고할 때에 괴수 유규희(兪圭熙)·최성서(崔聖西)·최성일(崔聖一)·안순칠(安順七)·피만석(皮萬石) 등 다섯 놈은 죄상을 열거하고 잡아서 압송하였다.

태안과 이곳 경내에는 비록 비류가 모여 있지 않았으나 저들의 흉화를 입어 온 마을에 사는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흩어졌기 때문에 즉시 각 면, 리에 명령을 내려 집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며, 백성의 마음을 정돈시키고 습성을 고쳐 귀화하게 하여 제각기 안정된 마음으로 본업에 충실히 하게 하였다.

그리고 난을 일으킨 괴수를 세세히 조사하여 하나하나 잡아 법대로 극형에 처치하고, 동학군을 따른 약간의 무리는 죄의 경중을 가려 별도로 징계하고 풀어 주었다. 죄인의 목록을 책자로 작성하여 올리거니와, 괴수를 섬멸하여 다시는 싹이 나지 않도록 잇따라 뒤좇아 잡는 사이에 날짜가 저절로 어긋나고 늦어져서 그 시행됨이 대단히 송구하고 민망하다. 이러한 사정을 아울러 보고하니 처분해 주시라." "제(題) 상부에 보고하겠다. 책자는 받았다."

11월 보름날이면 교장바위에서 진혼제를 지내다

오래전부터 이곳 동학교도들과 뜻있는 사람들은 11월 보름날이 되면 교장바위에 올라가서 순국하신 영령들의 진혼제를 지내다고 한다. 위령탑 건립을 추진할 때 유족들은 살육의 현장인 교장바위에다 위령탑을 세우고자 했으나 그 당시 열악한 재정 형편상 자재를 운반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부득이 교장바위 밑에다 추모탑을 세웠다고 한다.

동학의병전쟁 당시 태안읍은 관아를 중심으로 북쪽에 위치한 백화산 교장바위는 상징적인 바위이고, 또한 지리적 여건상 중심적인 장소였다. 태안에는 동학농민혁명·동학의병전쟁 참여자의 무자비한 학살 현장이 이곳저곳에 많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


#동학#천도교#동학혁명#동학농민혁명130주년#수운최제우선생탄신2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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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영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장」,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 평화민족통일원탁회의 공동의장,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문위원, 또 현(現)천도교선도사·직접도훈, 전(前)전주녹색연합 공동대표, 전(前)전주민예총 고문, 전(前)세계종교평화협의회 이사 등 종교·환경단체에서 임원을 엮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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