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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의 길 농민화가 박홍규의 '전사의 길'이다. 갑오년 2차 동학농민혁명 즉 동학의병전쟁에 참여했던 이들은 모두 전사의 길에 동참했다. 그들은 삶과 죽음이라는 생각을 할 시간적 틈새도 없이 모두 전사가 되어 나라와 백성의 수호신이 되었다.
전사의 길농민화가 박홍규의 '전사의 길'이다. 갑오년 2차 동학농민혁명 즉 동학의병전쟁에 참여했던 이들은 모두 전사의 길에 동참했다. 그들은 삶과 죽음이라는 생각을 할 시간적 틈새도 없이 모두 전사가 되어 나라와 백성의 수호신이 되었다. ⓒ 박홍규

최후항쟁, 총살·분살형(焚殺刑) 잔인한 방법 동원

전국에서 동학의병전쟁을 주도한 의병장들의 최후, 앞서 거론한 전봉준, 김덕명,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성두환 등의 이야기가 있었다. 어찌 그뿐이겠는가. 전국 곳곳에서 최후 항쟁을 벌이다가 총살은 물론 분살형(焚殺刑) 등 잔인한 방법이 다 동원되었다. 동학의 뿌리까지 제거하고자 일본국의 지침대로 일명 초토화(焦土化) 작전 등을 끔찍하게 벌였다.

수운 최제우 선생 신원운동과 동학농민혁명에 적극 동참한 전주 지역의 서영도, 고문선 대두령을 비롯한 지도부 인사 1백여 명도 전투 중에 전사하거나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겨우 살아남은 자들은 산간 벽지로 떠돌았지만 결국 일본군과 관군의 끈질긴 추격으로 붙잡혀, 전주 초록바위 천변부터 다가산 천변에 이르는 곳에서 대부분 총살형을 당했다.

전주 곤지산 초록바위 초록바위는 전주 곤지산 자락에 위치한 초록색의 바위이다. 이곳에서 조선조말 동학지도자, 천주교 신자들이 순국, 순교를 당했다고 비문에 써있다. 동학지도자 김개남 장군의 순국터로 알려졌는데 김개남은 서교장에서 순국한 기록이 있으므로 이곳이 아닌 것으로 판명났다. 사실 이곳 초록바위는 동학 완산대접주 서영도 장군이 총살형을 당한 순국터이다. 그리고 이곳 초록바위 천변부터 다가산 천변까지는 동학농민혁명 좌절 뒤 수많은 동학군들이 처형 당한 동학혁명 유적지이다.
전주 곤지산 초록바위초록바위는 전주 곤지산 자락에 위치한 초록색의 바위이다. 이곳에서 조선조말 동학지도자, 천주교 신자들이 순국, 순교를 당했다고 비문에 써있다. 동학지도자 김개남 장군의 순국터로 알려졌는데 김개남은 서교장에서 순국한 기록이 있으므로 이곳이 아닌 것으로 판명났다. 사실 이곳 초록바위는 동학 완산대접주 서영도 장군이 총살형을 당한 순국터이다. 그리고 이곳 초록바위 천변부터 다가산 천변까지는 동학농민혁명 좌절 뒤 수많은 동학군들이 처형 당한 동학혁명 유적지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남접지도자들 비참한 최후

특히 서영도 대두령은 측근 접주들과 1~2월에 걸쳐 지리산, 회문산 등지에 피신해 있다가 일본군과 관군에게 피체되어, 1895년 3월 16일(양) 전주 남문 밖 초록바위에서 동학 거괴 이름으로 공개 총살당하여 순국하였다.

남접 지도자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경우가 많았다. 이방언 의병장은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이는 분살형을 당했으며, 전봉준의 측근 차치구 접주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서장옥 의병장은 그의 판결문에 의하면 동학의 거두로서 최시형·전봉준·김개남과 비등할 정도의 세력을 갖고 있었으며 동학의병전쟁 뒤 1900년 피체되어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김인배 의병장은 좌수영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협공에 후퇴, 광양의 최후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수접주 류하덕과 함께 피체되었다. 김인배는 "장부가 사지(死地)에서 죽음을 얻는 것은 오직 떳떳한 일이요 다만 뜻을 이루지 못함이 한이로다"란 말을 남기고 즉결 효수형을 당했다.

기록에 남은 납·북접 지도자들 열거

동학의병군 남북접 지도자들을 열거해 본다. 고명숙은 정읍에서 순국, 김도삼은 전주에서, 손익중도 정읍에서, 손여옥은 나주에서, 김병운(규일)은 무장에서, 손병수는 정읍에서, 손병선은 정읍에서, 고순택은 무장에서, 장경삼은 함평에서, 문덕중은 무장에서, 이사경은 벽사역에서, 이인환은 나주에서, 장사원은 전주 남문장터에서, 김덕운은 금구에서, 권형중은 전주 남문장터에서, 강영규는 논산 황화대에서, 강순모는 2차 의병기포 때, 김현익은 광양에서, 김양두는 고창에서, 이기면은 남원에서, 이사명은 오수에서, 김응칠은 전주에서, 이화진은 함평에서… 참형, 총살, 능지처참 등으로 순국하였다.

또한 김재득은 영암 회문천 천변에서, 장옥삼은 함평에서, 장공삼은 함평에서, 최성화는 자작고개에서, 민중삼도 자작고개에서, 김우원도 자작고개에서, 김진협도 자작고개에서, 이회인은 세성산에서, 김진구는 2차 기포시에, 엄우영은 자작고개에서, 엄하영도 자작고개에서, 엄세영도 자작고개에서, 이상협도 자작고개에서, 황찬오는 전주에서, 황채호는 나주에서, 서상은은 흥덕에서, 송주옥은 나주에서, 황홍모는 나주에서, 문선명은 태인에서, 정평오는 함평에서, 이용길은 장성 월평에서, 이용기도 장성 월평에서, 심풍택은 광주옥에서, 송두호는 나주에서, 최맹순은 평창에서, 최관도는 1898년 재기를 도모하다가… 참형, 총살형 등으로 순국하였다.

그리고 박내원, 김기병, 김성룡, 최영두, 류용수, 문재석, 한달문, 황화성, 하수태, 문구석, 백장안, 전유창, 배규인, 이태형, 김은곤, 윤치문, 조재하, 장복극, 전규선, 김현동, 강선희, 강기선, 이문교, 손치범, 현재서, 김선명, 전막동, 김준옥, 전성숙, 임벽화, 최선오, 조재용, 이순삼, 황판암, 김중현, 정윤행, 엄흥삼, 조판용, 김상흠, 오재봉, 양선태, 이석교, 김경철, 정치조, 박경진, 이관동, 김준홍, 유덕장, 이용구 등은 참형, 총살, 포살, 옥사, 고문후유증 등으로 순국하였다. 이밖에 전국에서 수많은 동학접주, 수접주, 차접주, 접사, 대접주, 교장, 교수, 집강, 도집, 대정, 중정 등 육임의 동학지도자급들의 희생과 순국이 있었다.

동학지도자들, 천인공노할 끔찍한 사형

특히 지도부 중 일부는 군중들 앞에서 산 채로 묶여 머리 위에 관솔 말뚝을 박아 불에 타들어 가도록 하여 머리를 폭발시키는 천인공노할 끔찍한 사형을 당했다. 지도급 인사뿐만 아니라 적극 가담자들도 공개 화형식을 통해 죽이는 일들이 다반사였다.

아, 동학 의병장들과 수많은 의병들은 적게는 3만, 많이는 5만여 명이 순국하였다. 또 일부 기록과 학자들의 견해는 30여만 명이 순국하였다고도 한다. 이렇게 숫자 차이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무명 동학군 즉 이름도 없이 쓰러져 간 의병들이 많다는 뜻이다.

현재까지 참여자 등록 숫자 3,908명

현재까지(2024.12.27.)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공식 인정 즉 등록된 숫자는 3,908명, 유족등록 13,445명이다. 참여자 숫자를 적게 잡아 30만, 최대 50만, 희생된 순국자는 3만~5만여 명이다. 동학의병에 참여한 숫자가 현재 등록된 3,908명이라면, 그때부터 현재까지 남몰래 숨죽이고 살아야 했던, 그래서 실질적 참여자 숫자를 파악할 수 있는 역사적 기록은 사라져갔다고 봐야 한다. 또 유족들이 후손들에게 조상님들이 동학에 가담한 일들에 대해 입을 꼭 다물어버린 증거라고 생각한다.

동학의병항쟁, 전국적인 기포

「동학농민혁명과 2차 동학농민혁명이란 역사용어에서 필자는 제1차 기포는 '동학농민혁명'이라 칭하고, 2차 기포는 '동학의병전쟁'이라 칭한다. 동학의 옛 연구자들 일부는 동학기포, 재차기포의 용어를 사용했다. 요즘은 기포(起包, 동학의 조직인 포가 일어났다)라는 말보다는, 봉기(蜂起, 민중들이 벌 떼처럼 일어났다)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한다. 전봉준 장군 재판기록인 「전봉준 공초」와 「전봉준 판결문」에는 봉기라는 용어는 나오지 않고, 모두 기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필자는 가능한 문헌의 중요성을 참고하여 봉기보다는 기포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남원 방아치(방아재) 전투지 이 사진은 남원 방아치(방아재) 전투지로서 이곳에 고창 답사팀이 방문하여 단체사진을 남겼다. 방아재 답사는 안경엽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안내 및 해설을 맡았다.
남원 방아치(방아재) 전투지이 사진은 남원 방아치(방아재) 전투지로서 이곳에 고창 답사팀이 방문하여 단체사진을 남겼다. 방아재 답사는 안경엽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안내 및 해설을 맡았다. ⓒ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남원 최후항쟁, 방아재 전투

남원 최후 항쟁에 대해 이런 이야기가 있다. 동학군들은 장태나 심지어 민가의 솥뚜껑과 부엌 문짝을 방패로 삼아 총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관군과 민보군의 월등한 무기, 더군다나 산 위에서 굴러떨어지는 돌과 바윗덩어리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뜨거운 정의감과 용맹도 첨단의 무기와 수적 우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거기 있게 하였을까? 거의 맨몸으로 맞섰던 그들의 항거에 숙연해진다.

남원 최후 항전인 방아재(방아치)전투는 김개남의 주력부대가 북상하여 11월 13일 청주성을 공격할 때 동시에 벌어졌다. 김개남 장군의 전라좌도 동학의병군 주력부대가 북진을 한 후, 김홍기·최승우 접주 등을 중심으로 동학의병군 1만여 명이 경상도 방향으로 진출하여 영남 지방의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남원 동학군은 11월 13일에 출진하였으나 14일 새벽부터 15일까지 운봉의 민보군과 영남의 관군 등에게 대패하여 수천여 명의 희생자를 내고 남원성으로 퇴각하였다.

동학군, 절대 불리한 상황

방아재 전투는 무기와 지형에서 동학군에게 절대 불리한 상황이었다. 영남의 관료와 토호들은 동학군 진입을 막기 위해 운봉의 거두 박봉양에게 무기, 병력, 물자 등을 지원하여 철저한 대비를 하였다. 동학군은 가파른 방아재를 기어 올라가야 하는 형편이었고, 관군과 민보군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전투를 하는 유리한 상황인 데다 성벽처럼 깎아지른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방어를 하기에 유리했다.

남원의 동학의병군은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려고 장태나 심지어 민가의 솥뚜껑과 부엌 문짝을 방패로 삼아 총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관군과 민보군의 월등한 무기는 물론 산 위에서 굴리는 돌과 바위 등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김개남의 주력부대가 청주 공격에 실패하고 남원으로 후퇴하여 재기를 도모하고자 한 계획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그렇게 김개남은 뒷날을 기약하고 우선 몸을 숨길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


#동학#천도교#동학혁명#동학농민혁명130주년#수운최제우선생탄신2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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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영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장」,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 평화민족통일원탁회의 공동의장,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문위원, 또 현(現)천도교선도사·직접도훈, 전(前)전주녹색연합 공동대표, 전(前)전주민예총 고문, 전(前)세계종교평화협의회 이사 등 종교·환경단체에서 임원을 엮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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