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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이미지 초상화 이 사진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인 김개남 장군 이미지 초상화이다.
김개남 이미지 초상화이 사진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인 김개남 장군 이미지 초상화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천하무적 의병장 김개남의 최후

「도쿄 아사히신문 등 일본 언론은, 전봉준을 비롯하여 '김덕명, 손화중, 최경선, 성두환 등이 옥에 갇혔다는 소문을 듣고 일본영사관 앞으로 몰려든 인파가 산을 이뤘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천하무적 김개남은 살아서 경성에 가지 못하고 죽어서 머리부위만 압송되었다.

김개남은 동학의 직책이 공식적·비공식적 여러 번 바뀌었다. 김개남은 보통 김개남 장군으로 통칭되나, 처음에는 동학 접주에서 대접주로, 동학농민군 총관령, 남원대회 전후 전라좌도 대도소(大都所) 사령관 직위인 중도통장(中都統將), 동학농민혁명 2차 기포 때 독자세력 구축 후 영호남 의병사령관 직위인 총도통장(總都統將) 등을 역임하였다.」

김개남, 친구인 임병찬의 밀고로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혁명·동학의병전쟁을 주도한 천하무적 의병장 김개남 역시 휘하 동학의병군의 해산을 명하고 피신을 거듭하며 재기를 도모하게 된다. 김개남은 측근 세 명과 회문산의 깊은 산골인 종송리(종성리) 느티마을 매부 집에 피신해 있었다. 그때 아랫마을에 사는 재산이 많은 옛 친구 임병찬에게 구명을 부탁했는데, 임병찬은 "자네가 숨어 있는 곳보다 이곳이 안전할 것이니, 우리 집으로 오라." 하여 김개남과 수하 세 명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였다.

조선 최고 정예군사 강화군 출동

임병찬은 후한 대접을 하면서 김개남을 안심시켜 놓고, 전주감영에 신고하였다. 전라감사 이도재는 강화병방 황헌주에게 군사 2백 명을 급하게 요청했다. 이도재는 요청한 군사 2백 명이 도착하자 1백 명씩 두 부대로 나눠 한 부대는 황헌주로 하여금 압송하는 길목에 매복시키고, 다른 부대는 대관 박승규로 하여금 인솔케 하여 군사 1백 명과 포졸들을 급파했다. 김개남과 그 동학군들을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박승규 대관과 1백여 군사들은 김개남이 숨어 있는 임병찬의 집을 포위하고 함성을 지르며 들이닥쳤다. 김개남은 뒷간에서 똥을 누다가 위급한 상황임을 직감하고, 뒷간 앞 두엄자리에 꽂힌 쇠스랑을 재빨리 들고 나와 자신을 경호하던 호위병 세 명과 함께 극렬하게 저항하며, 탈출을 시도했다.

[목판화]김개남상(像) 농민화가 박홍규가 그린 목판화 김개남상(像)이다.
[목판화]김개남상(像)농민화가 박홍규가 그린 목판화 김개남상(像)이다. ⓒ 박홍규

김개남, 끝까지 저항하다 피체

김개남과 군사들이 뒤엉켜 일대 혈투가 벌어지면서, 집을 둘러싼 관군 저격수들은 허공에 대고 위협적인 사격만 해댔다. 비명과 고함, 총소리가 온 동네에 울려 퍼지며, 마당에는 서로가 뒤엉켜 누가 관군인지 누가 의병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결국 김개남은 심한 부상을 입고 12월 1일(양12.27)에 호위병 세 명과 함께 피체되었고, 강화 군사들도 일부 부상을 당했다. 김개남을 생포한 군사들과 포졸들은 김개남과 호위병이 움직이지 못하게 밧줄로 수십 겹을 묶고 소리도 내지 못하게 입을 수건으로 틀어막았다. 혹시 벌어질지 모를 김개남의 구출 작전을 대비하여 삼엄한 경계를 하고, 아무도 김개남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짚둥우리를 씌워 전라감영으로 압송했다.

[동학당 수령의 효수] 김개남 장군 참형으로 순국 1910년 일본의 신반도사에서 발행된 사진첩에 수록된 사진이다. 사진의 표제가 '동학당 수령의 효수'라고 명기되어있다. 또한 이 사진과 관련 된 내용이 고종실록과 갑오군정실기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사벨라 버드의 비숍(한국과 그 이웃나라) 기행문 목격담(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경험담)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사진이 발견된 처음에는 전봉준 장군의 효수(효시) 모습으로 추정하였으나, 얼굴 형태도 다르고 또한 전봉준 장군은 교수형으로 순국하였으므로, 이사진의 주인공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특이한점은 사진에서 보이는 꼬리표에 金(김) 등의 글씨가 보임에 따라, 특히 얼굴 형태가 김개남 장군의 모습과 흡사하여 김개남의 효수(효시)된 모습으로 추정되었다. 동학혁명1백주년 전후에 이이화 역사학자, 표암삼 동학연구가 등 다수 학계에서 본 사진의 주인공이 김개남으로 추정된다는 결론이 있었다. 이 사진은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했다가 방문객이 놀라는 등 너무 비통해 하는 상황을 감안하여 효시사진을
[동학당 수령의 효수] 김개남 장군 참형으로 순국1910년 일본의 신반도사에서 발행된 사진첩에 수록된 사진이다. 사진의 표제가 '동학당 수령의 효수'라고 명기되어있다. 또한 이 사진과 관련 된 내용이 고종실록과 갑오군정실기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사벨라 버드의 비숍(한국과 그 이웃나라) 기행문 목격담(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경험담)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사진이 발견된 처음에는 전봉준 장군의 효수(효시) 모습으로 추정하였으나, 얼굴 형태도 다르고 또한 전봉준 장군은 교수형으로 순국하였으므로, 이사진의 주인공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특이한점은 사진에서 보이는 꼬리표에 金(김) 등의 글씨가 보임에 따라, 특히 얼굴 형태가 김개남 장군의 모습과 흡사하여 김개남의 효수(효시)된 모습으로 추정되었다. 동학혁명1백주년 전후에 이이화 역사학자, 표암삼 동학연구가 등 다수 학계에서 본 사진의 주인공이 김개남으로 추정된다는 결론이 있었다. 이 사진은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했다가 방문객이 놀라는 등 너무 비통해 하는 상황을 감안하여 효시사진을 ⓒ 동학혁명기념관

김개남, 전주 서교장에서 참형으로 순국

김개남은 전주에 끌려간 즉시 전라감사 이도재의 지시로 판자 위에 손과 발을 고정(못에 박혀)하여 구금되었으며, 12월 3일(양12.29) 서교장(西敎場)에서 즉결 참형으로 순국하였다. 이때 호위군 세 명도 따로 처벌을 받았다.

전라감사 이도재가 김개남을 체포한 즉시 한양으로 압송하지 않고 임의로 전주에서 참형에 처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한양으로 압송하는 과정에서 막강한 김개남의 수하 동학군이 공격해 빼돌릴 가능성이 있었고, 흥선대원군이 김개남에게 의병 창의에 대한 밀지를 보낸 사실이 탄로 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교장에서 효수된 김개남의 머리는 남문 밖 천변의 초록바위에 효시되었다가, 다시 궤짝에 넣어 한양의 양호도순무영으로 압송되었다.

김개남 집안, 임병찬 집안과 혼인 금지령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말할까. 훗날 임병찬은 정읍일대 의병장이 되었고, 김개남 의병장의 집안에서는 임병찬 의병장의 집안과 혼인 금지령을 내렸다. 친구가 아닌 원수가 되었으며, 양쪽집안은 가문 대대로 결혼을 금지하는 가슴 아픈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교훈으로 다가온다.

안교선, 최재호 효수(효시) 모습 이 사진은 1895년 2월 8일자 일본 메사마지, 일본 지지신보의 기사 삽화에 나온다. 사진 윗쪽 동학 대접주 최재호, 아래쪽 대접주 안교선의 효수(효시)된 모습이다. 또한 이사벨라 비숍 목격담에도 나온다. 최재호, 안교선은 김개남과 함께 서소문 밖에 3일간 효시된 후 김개남의 머리는 전라도와 충청도에 보내져 조리돌림을 당했고, 안교선과 최재호 머리는 수일간 방치됨에 따라, 이사벨라 비숍 목격담에 따르면 동네 개들이 물어 뜯는 등 비참한 모습에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백성들이 통곡하는 광경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 사진은 동학혁명1백주년기념으로 전주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했다가 방문객들의 침통한 모습 등 여러 상황들로 철거, 현재는 자료보관실에 모셨다.
안교선, 최재호 효수(효시) 모습이 사진은 1895년 2월 8일자 일본 메사마지, 일본 지지신보의 기사 삽화에 나온다. 사진 윗쪽 동학 대접주 최재호, 아래쪽 대접주 안교선의 효수(효시)된 모습이다. 또한 이사벨라 비숍 목격담에도 나온다. 최재호, 안교선은 김개남과 함께 서소문 밖에 3일간 효시된 후 김개남의 머리는 전라도와 충청도에 보내져 조리돌림을 당했고, 안교선과 최재호 머리는 수일간 방치됨에 따라, 이사벨라 비숍 목격담에 따르면 동네 개들이 물어 뜯는 등 비참한 모습에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백성들이 통곡하는 광경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 사진은 동학혁명1백주년기념으로 전주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했다가 방문객들의 침통한 모습 등 여러 상황들로 철거, 현재는 자료보관실에 모셨다. ⓒ 동학혁명기념관

김개남, 안교선, 최재호 머리 효시(梟示)

그때 동학의병군 지도자 중 성재식, 안교선, 최재호 등도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이들은 총리대신과 법무대신이 주청하여 임금의 윤허를 받아 12월 24일 전격 참수되었다. 참수된 동학 지도자 세 명과 김개남의 머리는 같은 날인 24일부터 서소문 밖 네거리에 3일간 효시되었고, 그 후 김개남의 머리는 조정의 지시로 전라도와 충청도에 보내져 조리돌림으로 고을을 전전하며 효시(梟示)되었다. 성재식, 안교선, 최재호 머리는 수일간 방치됨에 따라, 동네 개들이 물어 뜯는 등 끔직한 상황이 발생하였다. 선열님들의 비참한 모습에 가슴으로 통곡하며 고개숙여 명복을 빈다.

김개남 장군이 임병찬의 집에서 피체되어 짚둥우리에 씌워진 채 전주로 압송되어 비참한 참형을 당하고 시신조차 수습되지 않은 처참한 모습에 백성들은 그 애석함을 담은 다음과 같은 민요를 불렀다.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천 군사 어데 두고 짚둥우리가 웬 말이냐.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만 군사 어데 두고 전주야 숲에 시신이 버려졌노.

「김개남 장군이 피체 될 때 뒷간에서 대변을 누다가 저항 없이 스스로 체포되었다고들 하나, 이는 평소 김개남의 성격과 투지에 걸맞지 않는 일이라 사료된다. 이렇게 패자들에게 역사적 과소평가는 흔한 일로 알려진다. 그래서 피체 될 때도 김개남답게 극렬한 저항이 있었으며, 심한 부상으로 인한 처참한 모습으로 재현시켰다. 그리고 피체 후 살벌한 압송 장면과 열십자 나무에 손발이 대못에 박힌 것, 그들이 볼 때 위험천만한 인물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신속하고 강력하게 처형했다는 것은 여러 자료와 구전에 근거하였다.」

천하덕인 의병장 손화중과 천하용장 최경선의 최후

[목판화] 손화중 장군 모습 농민화가 박홍규가 그려낸 목판화 손화중 장군의 모습니다.
[목판화] 손화중 장군 모습농민화가 박홍규가 그려낸 목판화 손화중 장군의 모습니다. ⓒ 박홍규

최경선 장군 모습 이 사진은 (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에서 공개한 것으로,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했었다.
최경선 장군 모습이 사진은 (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에서 공개한 것으로,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했었다. ⓒ (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전봉준이 인격에 있어 남달랐고, 김개남은 그 용맹에 있어 독보적이었으며, 손화중은 덕인으로서 뭇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손화중의 동학 직책은 접주에서 대접주, 동학농민군 총관령, 동학농민혁명 2차 기포 때 일본군 해안 상륙을 저지하는 임무의 해안경비사령관과 같은 총책의 역할을 최경선과 함께 담당하였다.」

손화중, 동학농민혁명 3대장군

동학농민혁명군 총관령이자 고창·무장·정읍·부안 등지의 광범위한 동학 세력을 지휘한 거두 손화중은 동학농민군 3대 지도자였다. 동학 대두령 손화중은 동지이자 의형으로 모셨던 전봉준, 김개남과 생사를 함께하자는 약속대로 운명을 같이했다. 또한 혁명군 총참모장이며 전봉준의 후원자인 김덕명 대두령과 전봉준의 오른팔 역할을 하던 맹장 최경선 두령도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손화중, 흥덕 안현리에서 피체되다

손화중은 전봉준과 손병희의 동학의병군 주력부대가 원평과 태인 전투를 끝으로 해산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포기하지 않았다. 남은 동학군을 이끌고 광주와 나주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 그러나 대세가 기운 탓인지 연속 패배하여 잔여 동학군을 해산시키고, 측근 부하 두 명만을 대동하고 옛 연고지인 흥덕 안현리 이씨 재실에 몸을 감추었다. 하지만 일본군과 관군들의 끈질긴 추적으로 손화중이 숨은 곳은 곧 알려지게 되고, 전봉준과 김개남의 체포 때처럼 극렬히 저항한 끝에 피체되고 말았다.

또한 손화중은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내 백성을 위해서 힘을 다하였는데 죽여야 할 이유가 있는가?'하고 크게 부르짖었다는 말도 전해온다. 이러한 모습에서 손화중은 가히 대인의 풍모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손화중 집안 쑥대밭이 되다

손화중은 일본군에 인계돼서 나주로 압송되어 초토영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그곳에서 체포된 몸으로 전봉준과 잠시 조우했다. 손화중도 결국 전봉준과 같이 한양에서 재판을 받고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손화중의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으며, 그의 동생 손익중과 처남 유공선도 잡혀 처형되었다. 또한 같은 손씨만 21명이 처형되었고, 그 많던 재산도 모두 빼앗겨 흔적 하나 남지 않았다.

최경선, 동복 벽성리에서 피체되다

손화중과 함께한 최경선 두령도 나주 공격의 최후 항쟁에서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내고, 동복 벽성리에 피신해 있다가 일본군 추격대에 의해 피체되어, 나주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최경선도 전봉준·손화중과 함께 재판을 받고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최후의 순간, 구부러진 역사가 없었는지

「손화중이 피체되기 직전에 재실지기인 이봉우에게 '네가 나를 고발하여 큰 상을 받아라. 너에게 진 은혜를 갚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반봉건 혁명과 반외세 전쟁을 포기하고 스스로 피체되었는가는 곱씹어봐야 한다. 흔히들 역사는 승자의 편에서 기록된다고 한다. 동학의병장들의 최후의 순간들도 혹시 구부러진 역사가 없었는지 의심이 가는 것은 감출수가 없다.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동학군 3대 장군이 그렇게 맥없이 체포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승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로 들린다. 물론 동학의병장들이 목숨 따윈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천하를 호령했던 대두령들의 피체 과정과 사형집행 과정에서 스스로 체포되고, 죽으러 가면서 너털웃음으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최후의 모습에서 일면은 인정하나 그 외, 일면은 감추어진 역사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천하맹장 최경선 장군은 전봉준의 평생 동지이자 또한 팔다리로 표현될 만큼 봉준의 최측근이었다. 일본군과 항일전쟁의 전략상 손화중 의병장과 함께 해안경비에 나섰으며, 나주성 전투와 남평에서 최후항전을 끝으로 격렬한 저항 끝에 관군에게 피체되어 담양의 일본군에 인도되었다. 최경선은 순국직전 사형선고를 받고 '불평하는 말 한마디 없이 유유히 걸어 나갔다.'고 일본신문에서 보도하였다. 천하용장다운 모습으로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최후 모습에서 과연 그랬겠는가 싶은 생각도 든다. 아마 큰 소리로 일본 침략자에게 호통을 치며 죽음을 맞이했던 것은 아닐까?」

총참모장 김덕명과 의병장 성두환의 최후

「동학 대접주, 동학군 총참모장 김덕명 장군, 그는 인격과 용맹을 겸비한 탁월한 전략가였다. 그는 전봉준을 전면에 내세우고 뒤에서 인원동원과 식량 지원 등을 말없이 실천한 감추어진 큰 인물이었다. 전봉준이 청소년 시절부터 김덕명을 따르고 큰형님으로 모셨던 일화가 김제 원평 부근에서 최근까지 전해온다. 어쩌면 김덕명이 전봉준을 큰 인물로 키웠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김덕명은 평소에 말이 없다가 한번 작정하고 목표를 세우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 조용하면서 강력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또한 동학사상을 사회에 실현시키는 데 앞장섰던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다. 김덕명 장군은 일본군 침략에 모든 것을 던져 막고자 했고 결국 목숨을 조국에 바쳤다.」

김덕명 장군 이미지 초상화 김덕명 장군은 실재 사진이 전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후손들의 합성사진과 당시 모습을 생각하여 그려낸 초상화가 있다. 그 초상화를 이지지화 해서 동학혁명기념관 외부 벽면에 전시했던 사진이다.
김덕명 장군 이미지 초상화김덕명 장군은 실재 사진이 전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후손들의 합성사진과 당시 모습을 생각하여 그려낸 초상화가 있다. 그 초상화를 이지지화 해서 동학혁명기념관 외부 벽면에 전시했던 사진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김덕명, 해월선생이 아꼈던 인물

김덕명 대두령은 손화중 대두령과 같이 동학의 최고 지도자 해월 최시형 선생과 각별한 사이였다. 그러나 손화중이 해월 선생의 지시에 순응하면서 따른 반면, 김덕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경한 입장으로 전봉준과 함께했다.

1892년 대선생 신원운동인 전주 삼례집회 때 수천 명을 동원하였고, 1차 반봉건, 2차 반외세의 기포 때도 적극 나서서 전봉준의 자문역할을 하면서 혁명을 주도하였다. 또한 전주화약과 집강소 설치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원평도소를 집강소로 전환하여 도집강의 자격으로 폐정 개혁과 혁명 자치에 큰 업적을 남겼다.

김덕명, 십자가에 묶여 압송당하다

김덕명은 결국 원평과 태인의 동학의병전쟁 최후 항전을 끝으로 도피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근거지인 원평 일대가 불바다로 변해 주민들은 거의 모두 피난길에 올랐다. 원평에서 전봉준과 헤어진 김덕명은 안정 절골에 있는 산지기 집으로 측근 몇 명과 함께 몸을 숨겼다. 같은 김씨 집안 사람들에게 구명을 요청한 것인데, 그들의 밀고로 태인의 수성군이 출동하였다.

김덕명은 격렬하게 저항하다가 결국 을미년(1895) 정월 초하루(음1.1)에 피체되었다. 수성군은 김덕명 대접주를 체포하여 어깨에 굵은 나무를 가로 얹고 십자형으로 팔을 벌려 묶었다. 그리고 상투를 뒤로 젖혀 나무에 묶고 얼굴이 하늘을 향하도록 하여 끌고 갔다. 김덕명은 일본군에게 넘겨져 한양으로 압송되어 전봉준·손화중·최경선·성두환 등과 함께 재판을 받고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김덕명 장군이 십자가에 묶여 압송 당했다는 이야기는, 동학혁명1백주년쯤 최순식 김제원평 향토사학자가 촌로들에게 들었다는 증언으로 구전수집이야기다.

[목판화] 까마귀떼 농민화가 박홍규의 목판화 '까마귀떼' 이다. 성두환 대접주의 사진은 물론 초상화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동학의병들의 넋을 위로하는 의미로 '까마귀떼' 그림을 첨부하였다.
[목판화] 까마귀떼농민화가 박홍규의 목판화 '까마귀떼' 이다. 성두환 대접주의 사진은 물론 초상화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동학의병들의 넋을 위로하는 의미로 '까마귀떼' 그림을 첨부하였다. ⓒ 박홍규

성두환, 전봉준과 함께 반드시 없애야할 인물

성두환 북접 대두령은 남접의 전봉준과 같이 일본군에게는 반드시 없애야 할 동학군 대두목으로 지목되었다. 그래서 성두환의 근거지인 청풍 일대는 철저하게 보복과 학살을 당하여 초토화되었다.

일본군과 관군은 정예부대를 동원하여 10월 20일(양11.10)부터 한 달이 넘는 섬멸 작전으로 혁명군 수천 명과 민간인 수천 명을 학살하였다. 폭설이 산야를 뒤덮고 강추위에 온몸이 떨리는 혹한의 날씨에 성두환과 충청 북부혁명군 지도자들은 강원도 일대를 떠돌며 몸을 숨겼다.

결국 일본군과 감영군의 추적으로 을미년(1895) 1월 초, 성두환은 처절한 저항 끝에 피체되었다. 성두환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과 같이 재판을 받고 3월 30일(양4.24)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성두환, 북접에서 가장 특출한 인물

「순국열사 성두환 의병장, 누구나 대다수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라면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이방언 등 남접 인물들을 거론할 것이다. 그러나 동학 2차 기포, 동학의병전쟁에서 남접 못지않게 북접의 인물들도 많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의 제자들인 손병희, 박인호, 손천민, 강시원(강수) 대접주들을 거론할 것이다. 그런데 성두환 대접주가 북접 인물 가운데 가장 특출한 의병장이었다.

그에 대한 근거는 앞서 거론했지만, '성두환 북접 대두령은 남접의 전봉준과 같이 일본군에게는 반드시 없애야 할 동학군 대두목으로 지목되었다. 그래서 성두환의 근거지인 청풍 일대는 철저하게 보복과 학살을 당하여 초토화되었다'할 정도로 의병장 성두환은 동학의병전쟁사에서 반드시 재조명이 필요한, 나라를 위해 희생된 위인이다. 성두환 의병장은 근거지인 청풍과 충청 북부를 중심으로 광범위한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성두환 의병장 역시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과 같이 동학의병전쟁 5걸로 같은 날 함께 순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 계속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


#동학#천도교#동학혁명#동학농민혁명130주년#수운최제우선생탄신2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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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영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장」,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 평화민족통일원탁회의 공동의장,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문위원, 또 현(現)천도교선도사·직접도훈, 전(前)전주녹색연합 공동대표, 전(前)전주민예총 고문, 전(前)세계종교평화협의회 이사 등 종교·환경단체에서 임원을 엮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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