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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장군 전봉준 전봉준은 신문과 기록(전봉준 공초)이 마무리되자, 권설재판소에서 을미년(1895) 3월 29일에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 날인 3월 30일(양4.24) 좌감옥에서 새벽 2시에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전봉준과 손화중·김덕명·최경선·성두한은 판결이 나오자마자 곧바로 처형되었다. 이들이 최후의 순간을 맞은 법무아문 감옥서(옛 의금부 전옥서) 터인 서울 종로구 영풍문고 앞엔 2018년 4월 24일 전봉준의 마지막 사진에 담긴 모습의 동상이 들어섰다. 이 사진은 필자가 동상제막식 전후에 여러장의 사진을 촬영했는데 그 중 하나이다.
녹두장군 전봉준전봉준은 신문과 기록(전봉준 공초)이 마무리되자, 권설재판소에서 을미년(1895) 3월 29일에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 날인 3월 30일(양4.24) 좌감옥에서 새벽 2시에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전봉준과 손화중·김덕명·최경선·성두한은 판결이 나오자마자 곧바로 처형되었다. 이들이 최후의 순간을 맞은 법무아문 감옥서(옛 의금부 전옥서) 터인 서울 종로구 영풍문고 앞엔 2018년 4월 24일 전봉준의 마지막 사진에 담긴 모습의 동상이 들어섰다. 이 사진은 필자가 동상제막식 전후에 여러장의 사진을 촬영했는데 그 중 하나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건립문 전봉준 장군 순국터 법무아문 감옥서(옛 의금부 전옥서) 터인 서울 종로구 영풍문고 앞에 2018년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뒷면 건립문이다. 이사진은 동상제막식 때 필자가 촬영한 것이다. 전봉준 장군은 을미년(1895) 3월 29일에 권설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3월 30일(양4.24) 좌감옥에서 새벽 2시에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건립문전봉준 장군 순국터 법무아문 감옥서(옛 의금부 전옥서) 터인 서울 종로구 영풍문고 앞에 2018년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뒷면 건립문이다. 이사진은 동상제막식 때 필자가 촬영한 것이다. 전봉준 장군은 을미년(1895) 3월 29일에 권설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3월 30일(양4.24) 좌감옥에서 새벽 2시에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 동학혁명기념관

전봉준, 천하영걸의 재판과정 일본 신문을 살펴본다.

「전봉준 재판과정은 예전에 일본 신문에 보도 되었고, 최근에 박맹수 교수의 번역과 도움으로 한겨레(2024.05.04.)에 보도되었다. 박맹수 교수는 "전봉준의 체포, 재판, 사형 판결, 집행 등 최후를 보도한 일본 신문 기사는 그간 부분적으로 번역·인용됐지만, 그 전모가 드러나지 않아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고 했다. 박맹수 교수는 1895년 1~6월 일본 신문이 보도한 전봉준 관련 기사 67건을 찾아 번역했다.(전봉준 재판과 관련되지 않은 일부 내용은 생략하였고 또 일부는 필자가 정리하였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마지막 모습 1895년 2월27일 한성 일본영사관으로 압송된 전봉준이 재판소로 이송되기 직전의 모습이다. 일본인 사진사 무라카미 덴신이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진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마지막 모습1895년 2월27일 한성 일본영사관으로 압송된 전봉준이 재판소로 이송되기 직전의 모습이다. 일본인 사진사 무라카미 덴신이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진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전봉준의 재판소식에 대규모 취재단은 몰려오고

전봉준, 체포 뒤 한성에 압송되자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 취재진은 150여 명이었고 보도는 67건이었으며, 위대한 인물을 보려는 인파가 검은 산을 이뤘다. 전봉준은 마지막 소망을 "내가 죽은 뒤 의로운 선비 있어 일본 병탄을 벗어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날, 비가 질척거렸다. 죽음도 고독했다. 1895년 4월24일 새벽 2시 녹두장군 전봉준의 교수형이 집행됐다. "모든 재판을 2심으로 한다"는 형법 조항이 시행되기 하루 전이었다. 전봉준의 죄목은 '군복 차림을 하고 말을 타고서 관아에 대항해 변란을 만든 자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처형하는 죄'였다.

사형을 선고받으면 정신이 없고 사지가 떨리며 얼굴빛이 변하는데

전봉준의 마지막 순간을 일본 기자들이 기록했다. "나는 바른길을 걷다가 죽는 자인데 역률(역적의 죄)로써 다스린다 하니 그것이 실로 천고의 유감이라고 탄식하며 아리(옥리)에게 부축을 받아 법정을 나갔다." 일본 지지신보 특파원은 1895년 5월 7일 3면에 또 이렇게 적었다. "사형을 선고받으면 놀라 정신이 없어지고 사지가 떨리며 얼굴빛이 변하게 되는데 (…) 조선 사람은 담력이 좋아 특히 동학의 거괴라고 자임하는 전(全<봉준>), 손(孫<손화중>), 최(崔<경선>), 성(成<성두환>) 같은 사람은 자못 대담한 데가 있었다."

일본기자들의 관심은 최시형, 전봉준에 집중

조선에 온 기자들의 주된 관심은 청일전쟁 전황 보도였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과 동학농민군 지도자에 대해서 앞다퉈 보도를 쏟아냈다. 일본 언론이 가장 주목했던 지도자는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1827~1898)과 동학농민군 최고 지도자 전봉준(1856~1895)이었다.

특히 일본 신문들은 전봉준의 체포와 한성 일본영사관 압송, 법무아문(개화정부에서 의금부 대신 설치한 사법행정기관) '권설(임시) 재판소' 재판, 사형 판결과 교수형 집행 과정 등을 보도했다.

전봉준, 특이한 인상과 강건함이

재판소로 이송되기 전 일본 영사관에 머물던 전봉준을 묘사한 기록도 있다. 오사카마이니치 신문은 1895년 3월 12일 3면에 '전봉준을 보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그는 총검 때문에 발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안색과 팔다리도 창백했으며, 숨도 거칠어 몹시 위독한 병증이었지만 그 기력은 상당히 강건한 듯하였다. 나이 37~38살(당시41세). 그 용모는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았으나 수염이 약간 있고 안광은 날카로우며, 눈썹 위에는 겹쳐진 일종의 잔주름이 있어 이마를 횡단하고 있는 모습은 다른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전봉준, 동도의 대수령 체포

전봉준은 1894년 12월 28일 전라도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 옛 부하의 집을 찾아갔다가 밀고로 붙잡혔다. 금구(현 김제) 전투에서 일본군에 패한 뒤 관군의 추격을 피해 은신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도쿄니치니치 신문은 1895년 1월15일 3면에 '동도의 대수령을 체포하다'라는 제목으로 이 사실을 일본 신문 최초로 보도했다.

전봉준, 일본군 19대대 총지휘관 미나미 고시로가

일본군 후비보병 19대대 총지휘관 미나미 고시로는 관군을 압박해 그해 12월30일 전봉준을 인계받았다. 그리고 나주 호남초토영(현 나주초등학교)으로 끌고 가 한 달 동안 가둔 뒤 한성으로 끌고 왔다. 전봉준은 1895년 2월 18일 한성 일본영사관에 도착했다. 일본군은 전봉준을 끊임없이 회유했고 운현궁 문객 시절부터 인연을 이어온 흥선대원군과의 관계를 끈질기게 추궁했다.

일본군, 경복궁 점령 동학군 2차 봉기 원인

도쿄아사히 신문(1895년 3월 5일 5면)은 일본 후비보병 제19대대 총지휘관 미나미 고시로 소좌가 전봉준을 취조한 내용을 보도했다. 이 기사를 보면,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이 반외세 기치를 내건 동학군 2차 봉기의 원인이 됐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난을 일으킨 이유를 상세하게 말하라"는 질문에 전봉준은 "올해 6월(양력 7월) 이래 일본병이 그치지 않고 계속 우리나라에 침입해 들어온 것은 틀림없이 우리나라를 병탄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답한다.

또 전봉준은 대원군의 밀사가 찾아온 사실은 인정했지만 밀지는 없었다며 비밀(대원군이 재봉기를 주문)을 지켰다. 그는 "병을 일으키도록 따로 사주한 자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떠한가?"라는 질문에 "다른 사람에게 선동되지도 않았고 사주받지도 않았다"고 답변했다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전봉준, 일본군 물리치고 고향으로

전봉준은 혁명 후 귀향을 꿈꿨다. 도쿄아사히신문(1895년 3월 6일치 2면)의 '동학 수령과 합의정치'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한성으로 쳐들어온 후에 누구를 추대할 생각이었느냐"는 질문에 전봉준은 "일본병을 물리치고 악간의 관리를 몰아내어 임금 곁을 깨끗하게 한 다음에 몇 사람인가 주석의 선비를 내세워 정치하게 하고, 우리들은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가 상직인 농업에 종사할 생각이었다."고 답변했다.

전봉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고

전봉준은 재판을 앞두고도 의연했다. 도쿄아사히신문 특파원 아오야마 고노미는 일본 영사관 뜰에 앉아 있는 녹두장군을 본 느낌을 기사(1895년 3월 5일 2면)로 남겼다. "나는 얼핏 그의 참한 용모에서 동학 수령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았다. 그는 다리에 총상을 입고 또 그 후 다른 병도 생겨서 지금은 매우 위독한 듯 들것에 실려 와서 그대로 영사관 앞뜰에 앉아 있었다." 도쿄니치니치신문(1895년 3월 3일 2면)도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으며 (…) 심문에 대답하기를 '빨리 내 목을 베라'고 수없이 말할 정도로 스스로 호걸의 기풍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일본 영사관 앞 검은 산을 이루고

녹두장군 전봉준이 갇혔다는 소문을 듣고 일본영사관 앞으로 몰려든 인파가 산을 이뤘다고 한다. 도쿄아사히신문은 '동학당 대거괴와 그 구공(죄를 자백함)'이라는 기사(1895년 3월 5일 5면)로 현장 상황을 전한다. 일본 신문에선 어렸을 적부터 키가 작지만 몸이 다부졌던 전봉준을 이르는 별명인 녹두를 성과 함께 붙여 지칭하기도 했다.

"어제(2월 18일) 전녹두가 불가사의하게도 생포되어 일본공사관까지 호송돼 마침내는 영사관으로 넘겨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온 성안에 서로 전해져서 요란하게 떠들며 귀하고 위대한 인물을 보려고 바깥으로 나오는 자 끊임이 없어 한때는 일본영사관 문 앞에 검은 산을 이루었다."

동학당 대거괴, 살려준다는 말에 호통

전봉준은 목숨을 살려달라고 하라는 권유에도 호통을 쳤다. 도쿄아사히신문은 1895년 3월 12일 5면에 "동학당 대거괴 전녹두가 오늘(2월 27일) 법무아문으로 인도될 예정"이라며 '동학당 대거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기사에선 "이미 법무아문의 심판에 부쳐진 이상은 사형을 모면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지만 "어떤 사람이 슬그머니 전녹두에게 '일본 공사에게 청원해 목숨을 살려달라고 하라'고 하자 그는 분연히 그 말을 듣지 않고 말하기를 '여기까지 이르러 어찌 그와 같은 비열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죽음을 기다린 지 오래다'라고 하였다"고 전했다.

나라를 빼앗기는 것에 눈을 감을 수 없고

도쿄아사히신문(1895년 3월 21일 2면)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던 그의 마지막 고뇌를 기록하고 있다. "나의 죽음은 평소부터 각오한 바이지만 내가 죽은 뒤에 (조선) 팔도에서 한 명이라도 의로운 선비가 있어서 능히 나의 뜻을 이어 우리 조선이라는 국가가 영원히 일본의 병탄 아래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생각하는 데 이르면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없다."

손화중, 죽음 앞에도 큰소리로 호통

전봉준과 한날한시에 처형당한 손화중·최경선·김덕명은 전봉준·김개남과 함께 동학농민군 5대 지도자로 꼽힌다. 동학대접주 손화중(1861~1895)도 죽음 앞에서 당당했다. 일본 지지신보는 "사형 선고를 받은 손화중은 법정을 나가면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말하기를, '인민을 위해 진력했는데 어찌 사형에 처하여야 할 이유가 있는가'라고 했다"고 보도했다.

최경선과 성두환, 죽음 앞에도 태연

사발통문 때부터 참여했던 최경선(1859~1895)의 최후 모습도 기록했다. 이 신문은 "최경선은 선고를 받자 불평하는 말 한마디 없이 유유히 활보하며 법정을 나갔다"고 했다. 성두한은 충북 충주에서 혁명에 참여한 대접주였다. 이 신문은 "성두한도 육형(사형) 선고를 받자 개의치 않는 듯 태연한 얼굴로 법정을 걸어나갔다."고 보도하였다.』

전봉준 좌감옥에서 새벽 2시에 순국

전봉준은 신문과 기록(전봉준 공초)이 마무리되자, 마침내 권설재판소에서 을미년(1895) 3월 29일에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 날인 3월 30일(양4.24) 좌감옥에서 새벽 2시에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목판화] 전봉준, 나를 죽일진대.. 전봉준은 사형선고 직후 “다른 할 말은 없다.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내 피를 뿌려 주는 것이 옳거늘 어찌 이 컴컴한 도둑 굴속에서 남몰래 죽이느냐”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농민화가 박홍규가 목판화로 그려낸 명작이다.
[목판화] 전봉준, 나를 죽일진대..전봉준은 사형선고 직후 “다른 할 말은 없다.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내 피를 뿌려 주는 것이 옳거늘 어찌 이 컴컴한 도둑 굴속에서 남몰래 죽이느냐”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농민화가 박홍규가 목판화로 그려낸 명작이다. ⓒ 박홍규

전봉준, 종로 네거리에 목을 베어 내 피를 뿌려라

전봉준은 사형선고 직후 "다른 할 말은 없다.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내 피를 뿌려 주는 것이 옳거늘 어찌 이 컴컴한 도둑 굴속에서 남몰래 죽이느냐"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때 전봉준의 동지이자 지도자들이었던 김덕명, 손화중, 최경선, 성두환 등도 함께 교수형을 당했다.

대역 죄인인 전봉준 등을 참형이나 능지처참이 아닌 교형(絞刑), 즉 목을 옭아매어 죽이는 교수형으로 처리한 이유는 조선이 도입한 근대형법의 재판 절차에 따라, 군인이 아닌 민간인 신분에 적용하는 형벌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역사왜곡, 일제의 경복궁 점령을 국권침탈로 인정치 않는 것

「동학의병군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국권침탈에 의한 식민지화를 반대하고 무력으로 쳐서 물리치려고 항일무장투쟁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일제로부터 해방 이후 현재까지(2024년 12월) 국가보훈부에서는 1894년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한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1895년 민왕후 시해사건으로 촉발된 을미의병부터 국권침탈에 항거한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있다. 이는 헌법의 평등권을 위반한 것이며, 일제에 항거한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국회에서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 및 국가보훈부 내규를 바로잡아야한다.

최근 동학농민혁명연구소장 신영우 교수는 '동학서훈국회학술토론회' 발표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에서 경복궁 점령 시기를 뺀 것에 대해, '폭포의 물이 쏟아지고 있는데 그 폭포의 맨 위쪽(1894년 2차 동학농민혁명)을 빼고 그 다음 아래부터(1895년 을미의병) 폭포의 시작이라고 하면 '웃기는 코미디' 라고 하며, 일제의 경복궁 점령을 국권침탈로 인정치 않는 것은 국가보훈부가 역사를 왜곡을 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였다.」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이미지 초상화 이 사진은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이미지 초상화로 현재 동학혁명기념관 외부 벽면에 전시중이다.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이미지 초상화이 사진은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이미지 초상화로 현재 동학혁명기념관 외부 벽면에 전시중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운명, 녹두장군의 절명시

전봉준은 사형을 당하기 직전에 '운명'이라는 절명시를 남겼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절체절명의 순간, 뜻을 다 이루지 못한 비탄이 담겨있다.

또한 당시 세간에 떠돌던 노래가 지금까지 전해져 온다. 녹두장군의 혁명과 좌절을 애달파한 노래 '새야 새야 파랑새야'이다. 이 한 편의 시와 한 곡의 노래로 녹두장군 전봉준의 생애를 상징해 보고자 한다.

운명(運命)

때가 오니 천지가 모두 힘을 같이 했건만 時來天地皆同力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運去英雄不自謀
백성을 사랑하는 정의로움에 부끄럼이 없건만 愛民正義我無失
나라 위하는 오직 붉은 한마음 그 누가 알리오. 爲國丹心誰有知

새야 새야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지방에 따라 다른 민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논에 앉지 마라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밭에 앉지 마라
아랫녘 새는 아래로 가고
윗녘 새는 위로 가고

새야 새야 녹두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어서 바삐 날아가라
댓잎 솔잎 푸르다고
하절인 줄 알았더니
백설이 펄펄 ~
엄동설한 되었구나.

- 계속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


#동학#동학혁명#천도교#동학농민혁명130주년#수운최제우선생탄신2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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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영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장」,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 평화민족통일원탁회의 공동의장,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문위원, 또 현(現)천도교선도사·직접도훈, 전(前)전주녹색연합 공동대표, 전(前)전주민예총 고문, 전(前)세계종교평화협의회 이사 등 종교·환경단체에서 임원을 엮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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