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눈쌓인 전봉준 동상 이 사진은 고창군과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홍보용으로 공개한 고창군청 앞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상이다. 마치 전봉준 장군이 피신길에 오른 하얀 눈세상과 비슷함을 느낀다.
눈쌓인 전봉준 동상이 사진은 고창군과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홍보용으로 공개한 고창군청 앞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상이다. 마치 전봉준 장군이 피신길에 오른 하얀 눈세상과 비슷함을 느낀다. ⓒ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재차 의병기포를 위해 피노리로 피신했건만

「'때가 오니 천지가 모두 힘을 같이 했건만/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백성을 사랑하는 정의로움에 부끄럼이 없건만/ 나라 위하는 오직 붉은 한마음 그 누가 알리오.'

전봉준이 죽음을 예감하며 쓴 유시(遺詩) '운명'이다. 행간에 비장함이 가득 담겨있다. 이상과 신념이 무너지는 현실에서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처지라니… 그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피를 토하며 써 내려간 전봉준의 절명시(絶命詩)를 새겨보면, 그의 인간적인 고뇌와 끝까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품고자 했던 정의감에 자못 장엄해진다.」

김개남과 다시 만나기 위해

동학의병군 총대장 전봉준은 원평과 태인의 최후 전투를 끝으로, 다음을 기약하며 피신길에 올랐다. 전봉준은 입암산성과 백양사를 거쳐 늦은 밤을 이용해 회문산 아래 순창 피노리로 몸을 숨겼다. 전봉준이 피노리로 잠적한 이유는 그곳에서 20리 떨어진 태인 종성리에 김개남이 피신해 있었기 때문이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이미 전령을 통해 해산한 동학의병을 다시 모아 한양 광화문 부근에 집결하여 재차 기포하는 계획을 논의하려 했다.

이러한 계획은 지난 지방 기포와 같은 긴 여정을 생략하고, 광화문에서 있었던 수운 대선생 신원운동 당시를 교훈 삼아, 일거에 경성(京城) 점령을 성공시키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백양사 스님들도 전봉준을 고발하지 않고 보호해 주었는데, 전봉준은 측근이자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붙잡히고 말았다.

전봉준 장군 피체 유적지 순창 피노리에 전봉준 장군 피체 유적지가 성역화되었다. 이 사진은 필자가 동학농민혁명 전국 유적지 동학기행 때 촬영한 것이다.
전봉준 장군 피체 유적지순창 피노리에 전봉준 장군 피체 유적지가 성역화되었다. 이 사진은 필자가 동학농민혁명 전국 유적지 동학기행 때 촬영한 것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경천을 조심해라 했건만

전봉준은 세상에 떠도는 '경천을 조심하라'는 말이 있어 경천지명에서 몸조심을 하였다 한다. 그러나 북상할 때와 후퇴할 때에 경천땅에서 아무 일이 없었으므로 그 말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김경천은 전봉준의 목에 걸린 수천 냥의 상금과 군수 자리 제안에 눈이 멀어 변절한 것이다. 그때 전봉준은 주위의 눈을 피하려고 호위군사 몇 명만 대동하고 있었다.

전봉준은 새벽에 잠시 눈을 붙이고 아침에 일어나 김경천이 안내한 주막집에서 거나하게 차려 준 밥상을 받았다. 호위군사 세 명과 허기진 배를 채우며, 오래간만에 막걸리도 한 사발 들이켰다. 그러나 김경천은 이미 같은 마을에 사는 친구와 전봉준을 밀고하여 상금을 나누기로 하고 순창의 민병대에게 신고해 둔 상태였다.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소

운명(運命)의 그날, 그곳에는 밤새도록 함박눈이 속절없이 퍼부었다. 전봉준은 밤새 몸을 뒤척이다 겨우 일어나 주막집 방문을 삐거덕 열고 한 발 내디뎠다. 옆방에서 묵고 있던 호위군 세 명도 밖으로 나와 봉준과 마주쳤다. 그들은 입김을 내뿜으며 '새하얀 세상이 전녹두(全綠豆)의 얼굴처럼 참으로 아름답소'라고 말했다. 봉준과 함께 그들은 '껄껄껄' 웃었다. 그렇다. 그날 이들은 다가올 불운을 예감치 못하고 마을이 들썩이도록 호탕하게 한바탕 웃어 젖혔던 것이다.

한신현은 공명심에 역사의 죄인이 되고

민병대장 한신현은 전령을 급히 보내어 전라감사 이도재에게 급보를 했다. 하늘이 준 기회라고 여긴 한신현, 김영철, 정창욱 등은 민병대 수십 명을 긴급 출동시켜 주막집을 포위했다. 그들의 손에는 칼과 창, 쇠몽둥이 그리고 체포에 필요한 도구들과 소총이 쥐어져 있었다. 전봉준 일행이 식사를 마칠 즈음 총소리가 울리고, 건장한 사내들이 무기를 들이대며 급습했다.

전봉준은 전주성전투에서 총상을 입은 상처가 아물지 않고 심하게 덧나 뛸 수도 없는 상태였다. 위기를 느낀 전봉준은 가슴에 품은 단도를 꺼내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호위군 세 명도 단도를 빼어 들고 민병대와 대치했다. 피노리 주막집에서 전봉준을 잡으려는 민병대와 전봉준을 경호하는 호위군의 격투가 시작되었다. 전봉준은 이미 포위된 상황임을 직감하고 비장한 얼굴로 단도를 입에 꽉 물고 주위를 살폈다.

민병대는 전봉준의 호위군 세 명을 제압하고, 일제히 쇠몽둥이를 들고 전봉준에게 돌진했다. 전봉준은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순간 주막집에 높게 쌓인 장작더미 위로 훌쩍 뛰어올라 민병대원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민병대는 쌓인 눈을 후딱 쓸어내고 장작 밑에 쏘시개를 넣어 불이 활활 타오르게 했다.

전봉준 장군 피체 유적지 순창 피노리에 전봉준 장군 피체지가 성역화되었다. 이 사진은 필자가 전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답사 때 촬영한 것이다.
전봉준 장군 피체 유적지순창 피노리에 전봉준 장군 피체지가 성역화되었다. 이 사진은 필자가 전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답사 때 촬영한 것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전봉준, 나라를 지킨 역적이다

전봉준이 불타는 장작더미에서 뛰어내리자마자, 체격이 우람한 민병대원 하나가 쇠몽둥이로 전봉준의 무릎을 강타했다. 이와 동시에 민병대원들은 일제히 병장기 자루와 몽둥이로 주저앉은 전봉준을 구타했다. 전봉준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주막집 대문 근처에서 이를 지켜보던 한신현은 큰 소리로 명령했다.

"전봉준을 생포하라!"

결국 전봉준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생포되고 말았다. 전봉준이 밧줄로 꽁꽁 묶인 채 형형한 눈빛으로 쏘아보자 한신현이 한마디 던졌다.

"역적의 눈빛이 덫에 걸린 호랑이 눈빛 같고만."

전봉준은 한신현의 말에 즉각 반격했다.

"나는 나라를 지킨 역적이고, 너는 나라를 판 역적이다!"

전봉준 압송 장면 전봉준 장군은 순창에서 피체, 일본군에 의해 한양으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함거(檻車)의 소달구지에 갇혀 이송되었다. 원래 중죄인은 머리를 풀어헤친 채 경우에 따라 칼까지 쓰고 나무 창살 속에 갇힌 상태로 함거(檻車)의 소달구지에 실려 포졸들에 의해 호송되는 것이 상식이나, 이 전봉준 장군 호송 모습은 비교적 예우하는 차원에서 그려진 것 같다. 이 사진은 고창군과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홍보용으로 공개한 것이다.
전봉준 압송 장면전봉준 장군은 순창에서 피체, 일본군에 의해 한양으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함거(檻車)의 소달구지에 갇혀 이송되었다. 원래 중죄인은 머리를 풀어헤친 채 경우에 따라 칼까지 쓰고 나무 창살 속에 갇힌 상태로 함거(檻車)의 소달구지에 실려 포졸들에 의해 호송되는 것이 상식이나, 이 전봉준 장군 호송 모습은 비교적 예우하는 차원에서 그려진 것 같다. 이 사진은 고창군과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홍보용으로 공개한 것이다. ⓒ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일본군, 오로지 이 한 놈을 잡기 위해서

전봉준이 갑오년(1894) 12월 4일(양12.30) 피체된 직후, 전라감사 이도재의 명령에 따라 요란한 말굽 소리와 함께 감영군 십여 명이 도착하여 전봉준을 인수했다. 관군과 민병대는 삼엄한 경계 속에 나주를 거쳐 전주로 전봉준을 압송했다. 이 소식은 일본군에게도 빠르게 전달되었다.

"우리들이 남쪽으로 온 것은 오로지 이 한 놈을 잡기 위해서였으니 함께 한양으로 압송하여 재판하는 게 마땅하다."

전봉준, 호송군을 부하 다루듯이

전라감영군은 전봉준을 전주성 안에 들이지도 못하고 일본군에게 넘김으로써, 전봉준은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전봉준은 한양으로 가는 중에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죽력고(대나무 진액으로 빚은 술)를 달라 하여 마시는 등 당당하고 의연하였다. 또한 조금이라도 호송군의 행동이 눈에 거슬리면 '내 죄는 종묘사직에 관계되니 죽게 되면 죽을 뿐이다. 너희들이 어찌 나를 함부로 다루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호송군을 마치 부하 다루듯이 하였다.

전봉준 대장이 피체되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서술해 본다.

하나, 조선개국 503년(1894) 12월 4일(양.12.30) 전봉준은 전라도 순창 피노리에서 민병대장 한신현에게 심한 부상을 입고 피체(被逮)된다.

둘, 한신현에게 급보를 받은 전라감사 이도재는 감영군을 이끌고 쏜살같이 말을 몰아 전봉준을 인수했다.

셋, 감영병과 민병대는 삼엄한 경계 속에 순창에서 나주를 거쳐 전주로 전봉준을 압송하기 시작했다.

넷, 전봉준을 체포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오던 일본군에게 전봉준 피체 소식이 재빠르게 전달되어 감영군으로부터 일본군에게 인계되었다.

다섯, 전봉준 압송은 일본군에 의해 전주가 아닌 한양으로 방향이 틀어졌고, 봉준은 밧줄에 묶인 채로 소달구지가 덜컹거릴 때마다 상처가 찢어지듯 아파 이를 악물고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내곤 하였다.

여섯, 개국 504년(1895) 2월 9일 한양 일본 영사관에 압송된 전봉준의 재판은 일본영사(日本領事) 우치다 사다츠지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법무아문 재판관(法務衙門 裁判官) 대신 서광범 이하 이재정, 참의 장박, 주사 김기조, 오용묵 등도 참여하였다. 이러한 재판 과정의 심문(審問)과 전봉준의 공술(供述)이 시작되었고 일문일답의 전봉준 진술 내용은 '전봉준 공초'라는 기록으로 남게 된다.

눈보라속의 고독한 동학군 농민화가 박홍규의 '눈보라' 제목의 그림이다. 마치 전봉준 장군이 사형을 앞두고 꿈속에서 눈보라를 헤치며 홀로 걷는 모습으로 상상된다. 아, 얼마나 고독했을까! 겉으로는 영웅처럼 당당하게 최후를 맞이했지만, 녹두장군도 사람인지라 가족도 그립고 수많은 동학군이 쓰러지며 좌절된 도전의 혁명과 피눈물의 전쟁이 스크린처럼 스쳐 지나갈 때 아마 이 그림처럼 홀로 통곡하며 겨울 들녘과 눈보라의 산길을 걷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눈보라속의 고독한 동학군농민화가 박홍규의 '눈보라' 제목의 그림이다. 마치 전봉준 장군이 사형을 앞두고 꿈속에서 눈보라를 헤치며 홀로 걷는 모습으로 상상된다. 아, 얼마나 고독했을까! 겉으로는 영웅처럼 당당하게 최후를 맞이했지만, 녹두장군도 사람인지라 가족도 그립고 수많은 동학군이 쓰러지며 좌절된 도전의 혁명과 피눈물의 전쟁이 스크린처럼 스쳐 지나갈 때 아마 이 그림처럼 홀로 통곡하며 겨울 들녘과 눈보라의 산길을 걷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 박홍규

너는 나의 적이요 나는 너의 적이라

한양의 일본 영사관에 압송된 전봉준은 1895년 2월 9일부터 3월 10일까지 다섯 차례 심문을 받으며, 274개의 질문과 답변을 했다. 일본 측의 심문 과정에서도 '높은 지위를 준다거나 많은 재산을 준다'며 일본에 협조시키려는 회유가 있었으나 전봉준은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전봉준은 '나는 잘못도 없지만, 비열하게 살 생각도 없다. 이미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니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또한 전봉준은 '너는 나의 적이요 나는 너의 적이라. 내 너희를 쳐 없애고 나랏일을 바로잡으려 하다가 도리어 너희 손에 잡혔으니 너는 나를 죽이는 것뿐이요 다른 말을 묻지 마라'고 일관되게 비장한 심정을 토로했다.

일본 기자들조차 정의와 대의의 표상이라

이러한 전봉준의 굳은 의지와 당당함에 취재차 지켜보던 일본 기자들 일부는 정의와 대의의 표상이라며 경의를 표하기도 하였다. 전봉준, 체포 뒤 한성에 압송되자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 취재진은 '위대한 인물을 보려는 인파가 검은 산을 이뤘다'고 보도하였다.

또 전봉준은 나의 소망은 '내가 죽은 뒤 의로운 선비 있어 일본 병탄(倂呑_조선의 영토와 주권을 강제로 빼앗아 일본 것으로 만듦)을 벗어나기를 바란다'고 일본 신문은 보도했다. 전봉준은 동학의병이 일본군에게 진압됨으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될 것이라는 것을 내다봤다.

일본의 정부인가, 대한민국의 정부인가?

「전봉준의 진술과 일본신문의 보도 내용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2차 동학농민혁명은 항일의병전쟁임은 물론 일제식민지화에 맞선 일본군의 국권침탈에 항거한 독립전쟁이 분명하다. 일제의 국권침탈이 독립운동이라는 것은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에 명확히 기술되어있다.

'일제의 국권 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항거하다가 그 항거로 인해 순국한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과 건국포장 또는 대통령표창을 받은 자'를 순국선열로 칭하고 있다.

그러나 (2024년)현재까지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 대한 서훈이 한명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동학 2차 봉기는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한 역사가 분명함에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지 않는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의 정부인지, 대한민국의 정부인지 과연 누구를 위한 정부인지 심히 우려되는 바이다.」

-계속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


#동학#천도교#동학혁명#동학농민혁명130주년#수운최제우선생탄신200주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이윤영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장」,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 평화민족통일원탁회의 공동의장,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문위원, 또 현(現)천도교선도사·직접도훈, 전(前)전주녹색연합 공동대표, 전(前)전주민예총 고문, 전(前)세계종교평화협의회 이사 등 종교·환경단체에서 임원을 엮임 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