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판화] 한밤에 나리는 눈송이 농민화가 박홍규의 목판화 그림이다. 동학의병군이 우금티 전투 뒤 후퇴할 때 어쩜 이 그림같이 꿈은 사라지고 쓸쓸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상상된다.](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4/1224/IE003396441_STD.jpg)
▲[목판화] 한밤에 나리는 눈송이농민화가 박홍규의 목판화 그림이다. 동학의병군이 우금티 전투 뒤 후퇴할 때 어쩜 이 그림같이 꿈은 사라지고 쓸쓸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상상된다. ⓒ 박홍규
애국과 정의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전봉준의 운명이라는 절명 시, 첫 소절은 "때가 오니 천지가 모두 힘을 같이 했건만"이다. 둘째 소절은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이다. 셋째 소절은 "백성을 사랑하는 정의로움에 부끄럼이 없건만"이다. 공주, 우금티 대회전 패배 뒤 후퇴의 길은 동학의병군이 일본군을 치기 위해 북상(北上)했던 그 길의 반대 방향으로 남하(南下)하는 길이었다. 때가 와서 천지와 함께 했고, 운이 가니 영웅도 어쩔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백성을 사랑하는 정의로움에 부끄럼이 없다는 전봉준의 말씀은 전봉준 개인의 말이 아니라 동학의병군 모두의 심정이었으리라.」

▲원평 구미란(귀미란) 전적지사진에서 멀리 보이는 산쪽 원평천 건너편 마을 부근이 동학군 진영이다. 원평천 앞쪽 들녘이 일본군과 관군의 진영이다. 원평천을 사이에 두고 동학군과 일본군 및 관군들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이곳 원평전투도 최후 항쟁지의 하나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원평 최후 항전
동학의병군이 전주성을 철수한 이튿날인 11월 23일에 미나미 고시로가 이끄는 일본군과 이두황이 이끄는 관군이 먼저 전주성에 입성하였다. 또 26일에는 선봉장 이규태의 관군이 입성하여 전주성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전주에서 금구 원평으로 후퇴했던 동학의병군은 11월 25일(양12.21) 금구, 원평에서 잔여 동학군이 가세하여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관병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김덕명을 중심으로 전봉준과 손병희의 동학의병군 4천여 명은 원평 뒷산과 구미란 마을을 사이에 두고 품자진(品字陳)을 쳤다.
일본군과 관병연합군 선봉대는 원평천 앞 벌판에 겹으로 일자진을 펼치고, 바로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동학의병연합군은 일본군, 관병연합군과 본격적으로 전투를 벌이기 전에 적군의 시야를 흐리게 하려고 산에 불을 지르고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먼저 사격을 가했다. 일본군과 관병연합군은 연기로 뒤덮인 산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하며 전진하였다.
그때 관군 대관 최영학 부대가 순식간에 우회해서 구미산에 올라 소총을 발사하여 의병군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전열이 흐트러진 동학군은 우왕좌왕하면서 앞뒤에서 집중사격을 받아 한꺼번에 100여 명이 쓰러졌고, 관군은 십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원평 최후항전은 한나절 동안의 전투로 동학군의 패색이 짙어가고 있을 때, 전봉준과 순병희는 각자의 길을 택했다. 손병희 통령은 임실의 새목재에 계시는 해월 최시형 스승에게로, 전봉준은 원평천(구미란) 전투를 마무리하고 재빨리 퇴로를 열어 구미산을 넘어 태인으로 향하였다.
전봉준 주력부대 태인에서 해산
원평에서 패한 동학의병군은 남쪽으로 20리 거리인 태인으로 후퇴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때 태인의 잔여 동학군이 가세하였다. 전봉준의 동학의병군은 11월 27일(양12.23) 하루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접전을 벌였다. 동학군은 태인전투 첫 번째 접전에서 20명, 두 번째 접전에서 30명, 세 번째 접전에서 50명, 총 100여 명의 전사자를 냈다. 그리고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관군은 십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전봉준 대장의 동학군 주력부대는 태인전투를 끝으로 27일 밤에 해산하였다. 전봉준은 비통한 심정으로 다음을 기약하며 입암산성과 백양사를 경유하여 순창 피노리로 향하고 있었다.
손화중과 최경선 부대도 해산하고
전봉준 대장의 동학의병군이 해산한 11월 27일에 광주 일대를 점령했던 손화중과 최경선의 동학의병군도 해산하였다. 전봉준의 주력부대가 해산하였다는 소식은 다른 동학의병군들에게 전달되어 연이은 해산으로 연결되었다. 해산한 동학의병군 일부는 목숨을 부지하려 고향을 등지고 산간벽지나 다른 지역으로 도피하였다. 광주에서 해산한 동학의병군 일부는 전라도 서남 해안의 장흥과 강진으로 숨어들어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동학군들을 결집하여 일본군과 관군에게 최후까지 저항하게 된다.

▲해월신사 최시형의 사진해월 최시형 선생은 1894년 동학혁명 좌절 후, 1898년 6월 1일 사형 판결을 받고 6월 2일 교수형으로 순도 순국한다. 이 사진은 순도 직전 파블로프 러시아 공사가 촬영한 것이다. 행색은 초라하지만 거룩한 성자다운 모습이 역력하다. ⓒ 동학혁명기념관
최시형, 손병희 부대 후퇴 길에 승전보
한편 손병희의 동학의병군은 원평에서 출발하여 장성 갈재를 넘고 순창을 거쳐 임실로 잠입했다. 손병희 통령은 11월 초순부터 임실에 머물고 있는 해월 최시형 스승과 합류하여 도피 길에 오른다. 손병희 통령은 해월 선생을 모시고 임실을 떠나 장수와 장계로 가던 중 뒤늦게 알아차린 일본군과 관군연합군의 추격을 받고 여러 번 접전하여 물리쳤다. 그후 금산을 거쳐 12월 5일(양12.31) 무주를 점령했다. 이후 해월 선생과 손병희 통령의 동학의병군은 충청도 지역으로 북상을 계속했다.
「해월 최시형 선생은, 초목의 새싹 하나, 털벌레 한 마리도 시천주(侍天主) 즉 한울님을 모셨으니, 하늘같이 섬기고 공경하라 하였다. 사람은 하늘 자체라고 공경과 섬김을 강조하였다. 그러한 해월 선생이 일본군의 침략에는 모두 총을 들고 일어나 저들과 맞서라는 항일전쟁을 지휘하는 최고사령관 직위를 마다하지 않았다.」
북접 의병의 북실전투와 되자니 항쟁
「해월 최시형 선생은 "민심은 천심이다. 일제의 침략에 맞서 백성과 나라를 위해 우리 모두가 기포하는 것은 바로 천명이다"라고 말씀했었다. 그러나 동학의병들이 일본군의 총에 무참히 쓰러져가는 모습에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신음소리를 내며, 가슴을 쥐어짜고 피를 토하면서 흐느껴 울었다. 해월 선생과 함께하는 사람은 물론 같은 생명공동체인 자연만물도 '모두가 하늘이었다.」
북접 동학군의 처절한 항쟁은 시작되고
손병희 통령의 총지휘로 북상 길에 오른 동학의병군은 충청도 지역으로 넘어가 청산, 황간, 영동 등을 연이어 함락하였다. 그러나 일본군과 청주영병, 보부상군, 민보군 등의 일본군과 관병연합군에게 포위 공격을 받고 많은 사상자를 내며 무너졌다. 손병희 통령은 스승 해월 선생을 모시고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보은 북실로 향했다.

▲보은 북실 최후 항전지보은 북실 전투는 12월 17일과 18일(양1.12-13) 양일간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사진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보은 북실의 최후항쟁
보은 일대의 동학의병군 수천 명이 가세해 5000여 명에 달한 손병희 통령의 동학군은 북실에 결집하여 진을 쳤다. 일본군과 경군은 끈질기게 추격하면서 북실을 포위했다. 북실전투는 12월 17일과 18일(양1.12-13) 양일에 걸쳐 진행되었다. 일본군과 상주소모영 유격대, 민보군 등 일본군과 관병연합군이 동학의병군을 포위하여 기습 공격하면서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과 관군의 월등한 무기 앞에 의병들은 속절없이 쓰러졌다. 동학군의 무기는 도망과 후퇴의 길에 대포 등 거추장스런 무기는 소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여느 동학군들과 마찬가지로 일부만이 관군에게 빼앗은 소총, 화승총을 쓰고 나머지는 주로 칼, 쇠창, 대창, 몽둥이, 농기구 등을 무기로 사용하여 조직과 화력 모두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절대 불리한 싸움에서도 동학의병군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입으로는 시천주 주문을 외우고, 손으로는 가슴의 궁을부적을 어루만지면서 목숨을 걸고 항쟁을 지속했다. 2일간의 혈전에서 1500여 명의 동학군이 희생되었다. 북실 인근 민가의 동학도인의 집에서 가슴 졸이고 기다리던 해월 선생은 전황을 보고받고, 퇴로를 열어 탈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해월 스승의 뜻을 전해 받은 손병희 통령은 동학군에게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다.
"퇴로를 열어 탈출하라!"
이때 손병희가 지휘하며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사이, 총알 하나가 날아왔다. 손병희는 순간 어깨에 묵직한 통증이 전해져 왔다. 동학군이 참패하고 자리를 떠난 자리에는 여지없이 시신들이 하얀 눈에 덮여 공동묘지처럼 보였다. 이렇게 북실의 산야에도 피로 물든 1500개의 눈무덤을 남기게 되었다.
그 후 이곳에는 숨진 의병의 수만큼의 붉은 진달래꽃들이 피어났다가 봄이 가고 꽃이 지면 스치는 바람에 울음소리로 들렸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진다.

▲음성 금왕 되자니 동학혁명 유적지해월 최시형 선생과 손병희 통령은 12월 24일(양1.19) 음성 금왕 되자니에 이르러, 최후의 항쟁에 들어갔다. 되자니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집중 공격을 받고 동학군 북접 주력부대는 끝내 슬프고 비참하게 무너졌다. 이 사진은 삼암 표영삼 선생께서 30여년 전(동학혁명1백주년)에 되자니 역사의 현장에서 촬영한 것으로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했다. ⓒ 동학혁명기념관
손병희 통령은 해월 선생을 모시고 동학군과 함께 충주 외서촌 즉 음성 금왕 되자니로 후퇴했다. 최시형 법헌과 손병희 통령의 북접 동학군은 일본군과 관병연합군의 추격을 받으며 크고 작은 전투와 후퇴를 거듭하다가 결국 음성 되자니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이게 된다.
해월 최시형 선생과 손병희 통령은 되자니로 가던 도중 역사에 남는 몇 마디를 주고받는다. 해월 선생은 '병희의 옷이 찢어지고 피로 얼룩졌는데, 총알을 맞았는가' 하면서 위로하였다. 손병희는 '옷에 구멍이 났을 뿐 큰 부상은 아니다'라고 말씀을 올렸다. 해월 선생은 '한울님을 굳게 믿고 주문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으면, 그 어떤 총알이라도 자신의 몸에 침범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찌 옷에만 구멍이 났다고 말하는가'라고 되물었다. 이에 손병희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두환 대접주가 점령한 충주 가흥청풍 대접주 성두환의 동학군은 북한강의 요충지인 충주 가흥을 점령했다. 음력 10월 일본군의 공격으로 성두환의 동학군이 물러나자 일본군은 이곳에 병참기지를 만들었다. 일본군 기록에 의하면 전봉준 장군 다음으로 성두환 장군을 지목했었다. 그의 활동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사진은 삼암 표영삼 선생께서 30여년 전(동학혁명1백주년)에 찰영한 것으로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했다. ⓒ 동학혁명기념관
해월 최시형 법헌과 손병희 통령의 후퇴와 피신 길에 반가운 소식이 전해왔다. 김창수(김구)와 성두환 대접주의 소식이었다. '김구 접주는 황해도 해주성을 점령하고, 그 일대에서 폐정개혁과 항일혁명 등의 엄청난 일들을 해냈다. 또 성두환 대접주도 충청도 북부 지역과 경기도, 강원도를 연결하는 항일 의병을 주도하였다'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반가운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일본군과 관군들이 특별 감찰대와 토벌대를 편성하여, 성두환과 김구를 체포하려고 출동하였다'는 소식도 있었다.
최시형, 손병희 부대도 무너지고
해월 선생과 손병희 통령은 음성 금왕 되자니에 이르러, 12월 24일(양1.19) 최후의 항쟁에 들어갔다. 되자니 전투에서도 일본군과 관군의 집중 공격을 받고 동학군 북접 주력부대는 끝내 슬프고 비참하게 무너졌다.
해월 선생은 '살아남아야 다시 천도·동학을 재건한다'는 말씀으로 해산령을 내렸다. 그리고 '손병희·박인호·김연국·손천민·이종훈·김낙철' 등의 주요 지도자들과 함께 강원도 홍천으로 잠입했다. 이후 해월 선생과 손병희 통령 일행은 몇 년간 강원도와 충청도의 깊은 산속을 전전하며 일본군과 관군의 추격을 따돌렸다.
하얀 공동묘지와 붉은 진달래꽃이 피어나고
「동학의병군이 참패한 그곳에는 시신들이 눈에 덮여 하얀 천국의 공동묘지처럼 다른 세상으로 변했다. 보은 북실에도 산야에 피로 물든 1천 5백 개의 눈무덤을 남기게 되었다. 먼 훗날 이곳에 숨진 의병의 수만큼의 붉은 진달래꽃들이 피어다가 봄이 가고 꽃이 지면 스치는 바람소리가 마치 슬픈 울음소리로 들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