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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마지막 주말, 가족과 함께 찾아간 온천장은 새해를 앞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북적였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뚫고 도착한 온천장 안은 따스한 수증기로 가득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려는 사람들의 설렘이 공기 속에 묻어났다.

이맘때면 우리는 왜 이렇게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고 싶어 하는 걸까. 때로는 그저 습관처럼, 때로는 진정한 소망처럼, 우리는 새로운 시작 앞에서 늘 정화 의식을 치르고 싶어 한다. 그래서일까, 이날 온천장에 모여든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같은 바람들이 읽혔다.

 가족과 함께 간 온천여행
가족과 함께 간 온천여행 ⓒ 김지영

사전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시작한 여행이었다. 온천으로 유명한 지역이니 굳이 세세한 정보를 찾아볼 필요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인터넷에서 본 운치 있는 노천탕의 풍경을 기대하며 찾아왔건만, 실제로는 실외 사우나실만 있었다. 잠시 스쳐 지나간 아쉬움도 잠시, 뜻밖의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부 영화에서나 보았을 법한 거대한 맥주통 모양의 사우나실이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통나무로 만든 듯한 외관은 마치 오래된 양조장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 독특한 공간 속에서 땀을 흘리고 있자니, 문득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기쁨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기대했던 것을 얻지 못했더라도

 온천여행
온천여행 ⓒ 김지영

때로는 우리가 기대했던 것을 얻지 못했을 때 오히려 더 특별한 경험이 찾아오는 법이다. 노천탕 대신 만난 맥주통 사우나는 오히려 더 인상적인 추억이 되어주었다. 온몸을 감싸는 따뜻한 열기 속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즐거움을 만나는 재미란 이런 것이었나 보다.

이제 몸은 충분히 데워졌고, 예약을 걸어두었던 때를 밀 차례였다. 세신사 앞에서 2시간이라는 대기 시간이 처음에는 길게 느껴졌지만, 실외 사우나 즐거움 덕분에 그 기다림이 순간처럼 지나갔다. 그 덕에 가족들과 대화하고 서로를 돌아보는 여유도 느끼게 되었다.

드디어 세신대에 누웠다. 거친 때수건으로 몸을 문지르는 소리가 온천장에 울려 퍼졌다. 세신사의 숙련된 손길을 따라 쌓였던 때가 밀려나가는 걸 느끼며, 묵은 걱정들도 함께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때가 밀려나갈 때마다 피부가 새로워지는 것처럼, 마음도 조금씩 가벼워졌다. 일상에서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가 때와 함께 벗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물리적으로 몸을 씻어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정화가 이루어지다니.

'몸을 씻는다'는 뜻의 세신의 한자어를 생각해본다. '깨끗이 씻을 세(洗)'와 '몸 신(身)'이 만나 만들어진 말이다. 세신이라는 행위는 단순히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을 넘어 정신적 정화와 재충전의 의미까지 담고 있지 싶다.

전통적으로 우리 문화에서 목욕은, 단순한 위생을 넘어 마음을 가다듬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중요한 의식으로 여겨져 왔으니까. 이를테면, 새해를 맞아 목욕재계를 하거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몸을 정갈히 하는 전통이 그런 예라 할 수 있다.

내가 그러했듯, 새해를 앞둔 지금 온천장에는 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채워지고 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정화에 대한 갈망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갈망이며, 어떤 소망일까?

때를 밀어내며 새로워지고 싶은 마음, 묵은 것을 벗어던지고 싶은 소망, 그리고 가족과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 이날 이 모든 것들이 따뜻한 온천물속에 녹아있었다.

때로는 놓아주는 것도 사랑

온천장에서 떠오른 나의 깨달음은 아주 단순했다. "엄마, 엄마" 하며 내 곁을 떠나지 않던 꼬마 아이가 어느새 중학생이 되었다.

예전과 달리 엄마나 가족보다는 친구를 더 찾는 모습에서, 자신만의 독립적인 즐거움을 발견하고 찾아가는 모습에서, 처음에는 왠지 모를 서운함이 밀려왔다. 내 품 안에서만 머물던 아이가 조금씩 멀어지는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기도 했다.

 온천여행
온천여행 ⓒ 김지영

하지만 그것이 바로 아이의 성장이라는 걸 알기에, 마음을 다스렸다. 더 이상 엄마의 그늘에만 머무르지 않고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아이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섭섭했다. 이런 복잡한 마음은 아마 모든 부모가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그런데 욕심을 내려놓고 보니, 오히려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이렇게 가족 온천 여행에 함께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때로는 인정하고 놓아주고, 묵묵히 바라봐 주는 것이 더 큰 사랑일 수 있다는 것, 그게 평범한 진리라는 것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새해를 앞두고 온천이나 목욕탕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때를 밀어내는 동안 특별한 깨달음을 얻을지도 모른다. 나처럼 말이다. 때로는 가장 일상적인 곳에서 가장 특별한 깨달음이 찾아오기도 하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온천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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